22화
“그래서 왜 마수에게 쫓기고 있었던 거지?”
“우연히 마주쳤다고 이야기하면 믿을 건가요?”
리제아나가 마법의 얼음 기둥에 몸이 꿰뚫린 마수를 바라보며 질린 눈을 했다. 이전에 이안과 처음 만난 날, 그의 얼음 기둥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때 그녀가 조금 더 망설였다면 아마 지금의 마수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터였다. 애써 마수에서 눈을 돌렸다.
“설명하자면 길어요. 이 꼬마를 따라갔던 길목에서… 헌데 지금 뭐하시는 거죠?”
리제아나는 그녀 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이안을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리제아나의 눈초리에도 이안은 거리낌 없이 그녀를 살피더니 그녀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봐요, 이안?!”
드러난 무릎에 바람이 닿자 쓰라린 고통이 찾아왔다.
“아얏…”
그의 시선을 따라 리제아나 역시 시선을 내리니 그곳에는 자그마한 생채기가 있었다. 잔뜩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생채기를 바라보는 이안이 리제아나는 이상하기만 했다.
“다쳤잖아?”
“그저 생채기뿐인걸요? 손마디도 안되는 작은 생채기인데….”
“어쨌든 다쳤잖아?”
이안이 굳은 얼굴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이안을 멀뚱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제아나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쾌활한 웃음이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리제아나에 이안이 답지 않게 아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크게 웃는 리제아나가 낯설었다. 그의 행동 중 어느 부분이 우스운지 그로선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리제아나는 큭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았다.
조금 전, 얼음 기둥으로 괴물을 저리 참담한 모습으로 만든 남자가 고작 자신의 무릎에 난 작은 상처에 이리 심각한 얼굴을 하다니.
리제아나는 그 괴리가 웃겨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겨우내 리제아나의 웃음이 잦아들자 이안이 짐짓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거야?”
“말해도 모를걸요.”
잔혹하기 짝이 없다는 텐젤의 미친개가 맞냐는 묻고 싶었지만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웃음은 막을 길이 없었다.
리제아나가 끝내 대답하지 않자 이안은 눈썹을 구겼다. 문득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른 채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이 꼬마는 어쩔 생각이야?”
“음… 도둑질까지 한 나쁜 꼬마지만. 아까 책임을 묻지 않겠다 했으니까…. 얘 집이 어디니?”
“뭐? 도둑질?”
이안이 되묻자 두 사람 사이에서 머뭇대던 아이가 겨우 입을 뗐다.
“…저는… 아까 말했듯이 돈이 없어요.”
“돈이 왜 그렇게까지 필요하니? 너 같이 어린 아이가?”
조금 전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리제아나가 물었다.
꼬마는 입술을 달싹이던 것을 멈추고는 제 머리에 닿은 리제아나의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꼬옥 맞잡았다.
아이의 손은 보기보다 거칠었다. 아이의 손톱 끝에는 검은 때가 잔뜩 껴있었다.
“가족들은 항상 제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막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저도 저희 집이 힘들다는 것쯤은 알아요.”
“….”
리제아나는 이어지는 이야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돈을 자신들에게서 빌린 후 돌려주는 날짜가 훨씬 지났다면서요…. 더 갚지 않으면 제 형제를 데려간다고 했어요. 잘못된 줄은 알았지만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어요.”
아이는 제 손에 쥐고 있던 보라색 곰 인형을 더욱 세게 품에 안으며 웅얼거렸다.
“어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없었어요. 이런 도둑질 말고는.”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이안의 무심한 말에 아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이는 흘끗 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요…. 귀족 나리들은 절대로 저희들의 마음 따위 모를….”
“미안하지만 그 인형 따위가 돈이 될 거란 안목을 가진 도둑은 그리 소질 있어 보이지 않는데.”
“저하!”
“이안이라고 부르라니까.”
이안은 능청스럽게 자신의 호칭을 정정해주며 꼬마에게 얄팍한 웃음을 날렸다.
“정말이야. 도둑은 좋은 물건을 잘 알아봐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그 인형은 그저 게임을 통해 얻은 평범한, 아무 값어치가 없는 인형인데. 이런 걸 팔아서 돈을 얻겠다고? 정말 형편없는 도둑이네.”
“….”
아이의 사정을 다 듣고도 여전한 비꼼에 리제아나가 눈썹을 세웠다. 리제아나조차 아이의 처지가 가여운데, 과연 그는 텐젤 제국의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친개’가 맞는 모양이다.
이안은 아이를 비웃으며 리제아나 옆으로 걸어와 오른쪽 손을 허리에 짚고 구부정하게 서서 꼬마를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리제아나.”
“….”
“리제?”
“…지금 저를 부른 건가요?”
“그래. 당신.”
리제아나는 허락도 없이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안을 어이없는 눈으로 올려보았다. 이안은 그런 리제아나의 눈초리에 개의치도 않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그녀가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만 보자 이안이 올린 손을 까딱였다. 대뜸 손을 내미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 리제아나는 미간을 구겼다.
“이번엔 약속대로 말하려고 그러지.”
“뭘요?”
“잡아줘 내 손, 응?”
이안의 재촉에 리제아나는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경계심 많은 그녀이기에 평소라면 분명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일까? 왜인지 리제아나는 그가 자신을 해치거나 다른 해를 가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역시 오산이었다.
“다친 사람은 얼른 가서 치료를 받아야지.”
“여기서 무슨 치료 타령이에요?”
그녀가 손을 올리자마자 이안은 낚아채듯 그녀의 손을 가져가곤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자, 환자는 돌아가자. 마탑으로.”
“지금 이게… 이안!”
리제아나가 뒤늦게 사납게 소리쳤지만 이미 발아래로 나타난 마법진의 빛 사이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아이가 벙 찐 얼굴로 리제아나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빙글 웃으며 이제는 없는 리제아나의 자리를 보다 아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이가 움찔 몸을 굳혔다.
⚜ ⚜ ⚜
“이름은?”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꼬마를 꽤나 거만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젤.”
리제아나에게도 말하지 않던 이름이 그에게 단번에 전달되었다.
젤이 이름을 말한 이유는 단순했다. 젤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이 핏빛 눈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단 한 치의 거짓이라도 말해선 안 된다고.
“그렇군, 젤. 너는 왜 인형을 훔쳤지? 리제가 입은 게 꽤 비싼 옷 같아서라고 생각해서인가.”
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돌려주지 않겠어? 어차피 가치도 없는 인형이니까.”
“…가치도 없는 인형이라면서 왜 자꾸 돌려달라고 하시는데요?”
“당돌한 꼬마구나.”
젤은 직감적으로 이 인형을 돌려받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래하면 꽤 괜찮은 이익을 얻을 것이란 생각에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어느 정도 얻어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난 도둑에게는 잔혹하지. 설령 그게 아이일지라도.”
어느 샌가부터 그가 내는 살기가 젤의 몸을 짓눌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운이었기에 젤은 이것이 살기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 물건의 주인은 이미 버젓이 있는데 말이야.”
이안이 손을 뻗어 순식간에 젤의 품 안에 있던 인형을 낚아채 갔다. 워낙 순간이라 젤이 미처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대신 다른 좋은 걸 줄게.”
“?”
이안이 우아하게 노을을 등지고 미소지었다. 로브 안으로 보이는 이안의 얼굴은 권태로움에 잠겨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젤은 황급히 고개를 내리곤 우물쭈물하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폈다.
“곧 사람을 보내 너희 집의 빚을 청산하도록 도와주지. 그리고 너의 집에 생활할 수 있는 비용을 어느 정도 붙여주겠다. 그럼 수지타산이 맞지?”
이안의 제안에 내내 움츠러들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젤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요? 정말이죠!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야. 덕분에 좋은 것을 보게 되었으니 그에 응당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안은 조금 전, 자신을 보며 쾌활하게 웃음 터뜨리던 리제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 호탕하게 웃는 그녀는 그로선 처음 보았다.
이안은 계속하여 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젤은 상관없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그가 돈을 후원해 준다는 그 사실 하나에 쏠려있었다.
“이제 가봐.”
“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던 젤이 그대로 달려나갔다. 문득 젤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외쳤다.
“제집은요, 저기 다트 상점 뒤로 걸으면 나오는 두 번째 골목길, 그쪽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중 가장 허름한 집이에요. ‘꼭’이에요, 꼭!”
이안은 얼른 가라는 듯 아이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겠다니까.”
젤은 그의 확인 사살이 떨어지자마자 단번에 몸을 돌려 달아났다. 이안은 제 손에 쥐어진 보라색 곰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지. 계약 관계일 뿐인 여자가 뭐라고. 하지만… 역시 그녀가 나에겐 당장 필요해. 그게 어떤 의미든 말야.’
그 때문에 이안은 조금 위험한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Urmărire. (추적)”
급할 때가 아니라면 본래 잘 사용하지 않을 마법이었다. 꽤 많은 집중력이 짧고 많은 마력을 필요로 했던 터라 웬만한 상급 마법사가 아니라면 쓸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주문이었다.
“이제 치료해주러 가야지.”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이안이 손바닥을 펼쳤다. 주문을 외우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펼쳐졌다. 이안은 그대로 골목에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