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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117)

21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몇 분 전.

리제아나와 소녀는 남자들을 피해 담벼랑 아래로 숨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긴 리제아나는 소녀에게 검지를 입가로 가져가 보였다. 소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리제아나를 올려 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숨을 죽이고 리제아나의 말을 따랐다.

“왔나, 리엇!”

“정말 가지고 온 건가?”

“그렇다니까.”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 아니 그래야만 하네. 그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도 보고 싶네.”

이윽고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제아나는 귀를 기울였다. 가게에서 그들에게 느껴지던 불길한 위화감의 정체를 어쩌면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 더 거리를 좁혀 골목길의 막다른 길옆 구석에 위치한 상점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구했다는 듯한 대화를 나누었었지.’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꽁지 머리와 긴 머리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꽁지머리의 남자는 물건을 받고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자의 손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투명한 병이었다. 병 안에는 정체 모를 풀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리제아나는 이내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풀이 아니었다.

“저… 풀은… 설마….”

다른 풀들과 달리 세 갈래로 나뉘어 잎끝이 뾰족한 그 풀은 분명…,

다름 아닌 광각초였다.

“광각초일세. 값은 자네가 조금 전 식당에서 줬으니 굳이 더불어 정산할 필요는 없겠지.”

“고맙네, 정말!”

리엇이라 불린 남자는 단숨에 병을 받아들고 병의 뚜껑을 열고 코로 가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참 동안 냄새를 들이마시던 남자의 두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일순 붉게 핏줄이 섰다.

이내 남자가 급히 병 안의 풀들을 꺼내더니 자신의 입 안으로 마구잡이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자네, 잠깐…!”

리제아나는 광각초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문을 통해 어깨너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광각초를 들이마신 이는 본 적 없었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으윽-”

풀을 우악스럽게 씹어대던 남자가 문득 괴롭다는 듯이 목을 잡고 고통스럽게 쓰러진다.

장발의 남성, 리제아나의 기억으로 ‘포드’라고 불렸던 남성은 리엇이 무릎을 꿇고 쓰러지기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가 ‘셀세’라고 적힌 간판의 상점 안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나 리제아나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할 시간 따위 없었다.

리제아나는 얼른 담벼랑 끝으로 다가가 건너편 담에 몸을 숨긴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했다.

“꼬마야 이리와. 얼른.”

혹여나 쓰러진 남성을 자극할까 봐 큰소리로 외치지는 않았으나 소녀에게 닿기는 충분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녀를 보호해야만 한다.

광각초를 일정 이상으로 들이마신 이는 이성을 잃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인간을 초월한 힘으로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곰 인형 네가 가져도 돼. 도둑질한 거에 다른 책임도 안 물을게. 그러니까 얼른 이리와.”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도 꽤나 일어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눈을 계속 깜빡거릴 뿐이었다.

남성의 고통 어린 신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이어졌다.

그는 계속해서 몸을 웅크리며 숨이 막히는 것인지 켁켁 거리는 소리를 연속적으로 내뱉었다.

“….”

“얼른!”

리제아나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무섭게 고통을 호소하던 신음이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멈추었다.

동시에 리제아나의 외침도 재빠르게 잦아들었다.

남자가 서서히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힘없이 떨어졌던 고개가 번쩍 여자아이가 서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잔뜩 풀어진 채 헝클어진 꽁지 머리의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충혈되어 붉은 눈이었다.

‘큰일이다. 벌써 눈에 초점이 없어.’

리제아나는 초조함에 메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필 여자아이에게 가다니.

갈색 눈은 허공을 바라보듯 초점이 사라진 상태이었지만 그 몸은 명확하게 아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리제아나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꼬마야 뛰어!”

겁에 질린 채 남자를 바라보던 소녀가 그제야 몸을 움직여 단숨에 골목 밖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으어어억!”

남성이 온전히 몸을 일으켜 꼬마를 뒤따라가기 직전, 리제아나가 바닥의 돌멩이를 던져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남자가 리제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여기야!”

리제아나가 재빨리 뛰기 무섭게 남자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남자를 피해 거리를 뛰었다.

남자는 거리의 모든 것을 부수고 던지며 리제아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남자의 모습은 더 사람 같지 않았다. 마수와도 같았다.

남자는 이내 거리의 사람들로 눈을 돌렸다.

“저게 뭐야!”

“사, 사람 살려!”

사람들이 놀라 남자를 피해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다간 거리의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지는 시장 한가운데서 리제아나는 초조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길 한편에서 나풀거리는 들꽃이 눈에 띄었다.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리제아나는 꽃과 저를 두고서 세상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착각을 받았다.

“이게 왜… 여기에.”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골목길의 길목과 어느 한 식당 사이의 흙바닥이었다. 그곳에 낯익은 모습의 꽃이 그 꽃잎을 나풀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들풀들 사이에서 가장 드높이 솟은 자줏빛 꽃이었다.

줄기잎은 피침 모양이며 수술을 중심으로 타원형의 꽃잎이 둥글게 감싼 모양새였다. 꽃받침은 원대를 감싸며 가장자리로 재차 갈라져 톱니와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에 그 식물이 분명했다.

“자줏빛 색을 띠며 주변에는 어린 식물들이 많고… 둥근 꽃잎…. 아마 이름이 라이지나였지.”

리제아나의 기억력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덕분에 이런 자잘한 특징들도 기억나는 것이리라.

게다가 이 꽃의 이름은 리제아나와 비슷한 덕에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 꽃이 분명해.”

그녀는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확신에 차서 뇌까렸다. 왜 필로렌치아 공작이 이 꽃에 대해 조사했을까?

리제아나는 회귀 이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에도 광각초를 뛰어넘을 다른 약초는 없었다. 환각이 강한 꽃과 풀을 모아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꽃은 보기에 그저 흔한 들꽃과 같았다. 리제아나는 미간을 모으고 꽃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혹시…!’

스치는 생각에 리제아나는 급히 꽃들을 따기 시작했다.

줄기에 박혀 있는 가시가 조금 따갑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너무 촉박했다.

“꺄아아악!”

인간형 마수가 나타났다는 말은 바람에 실린 듯이 시장 구석구석 퍼진 모양이었다.

굽이진 골목을 빠져나오니 도망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서로 고함을 외치면서, 살려달라고.

“꼬마는, 꼬마는 어딨지?”

본래 회귀하기 전의 리제아나라면 꼬마가 다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것에 관심 가지지 않고 제 영역에 속한, 제 이득과 맞물리는 사람만을 영역 안으로 들이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언제나 자신과 라이핀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황실이 가질 이득만 생각하라고 그는 언제나 강조했다.

아까 다트의 여운이 남아있어서 그랬던 걸까, 순간 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정의감이 치솟은 걸까. 리제아나는 여태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초조함으로 미간을 구겼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 ⚜ ⚜

아이는 얼마 안 있어 금방 눈에 띄었다. 짧은 다리로 얼마 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주변이 모두 키가 큰 어른들뿐인 탓에 아이는 이리저리 치이기 바빴다.

리제아나는 얼른 뛰어가 아이의 손을 잡았다.

“가자, 꼬마야.”

저를 찾은 리제아나를 보고 일순 망설이던 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달렸다. 인파 속을 헤치며 리제아나는 나아갔다. 하지만 쏟아지는 인파에 문득 소녀가 리제아나의 손을 놓치고 넘어졌다.

“꼬마야!”

넘어진 소녀 뒤로 마수가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리제아나는 말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꼬마를 한 손으로 껴안았다. 고함이 더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도망칠 곳은 없다고.

“젠장…!”

리제아나는 주머니 속 안에 가득 넣어둔 꽃잎 뭉치를 쥐었다. 그녀로서 이 꽃의 정체를 분명히 확신하지 못했지만 현재 그녀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수는 거침없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고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을 믿는 수밖에!’

리제아나는 마수가 제게 가까이 다가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 얼굴에 꽃잎을 잔뜩 뿌렸다. 마수는 그 꽃잎에 닿기 무섭게 괴로운 신음을 내며 꽃잎을 맞은 얼굴을 감싸 쥐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리제아나는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는 인간형 마수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효과가 있잖아…?”

리제아나는 멍하니 제 손의 꽃잎을 바라보았다. 뜻밖의 정보를 얻어낸 탓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이내 리제아나는 긴장감에 몸을 굳혔다. 고통스러워하던 마수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던 탓이었다. 아직 이 꽃잎이 광각초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모르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몰랐다.

리제아나는 이를 갈며 마수를 노려보았지만 이제 그녀가 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겁먹은 아이를 안아주는 일뿐이었다.

크르르륵-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마수에 리제아나는 그대로 두 눈을 꼭 감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줄이야!’

하지만 그녀를 덮쳐야 할 고통도, 마수의 고함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크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뒤로 주위가 잠잠해졌다. 리제아나는 눈을 떠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치로 마수는 얼음기둥에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마수 뒤로 아름다운 외양의 남자가 섰다.

이안이었다.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리제아나에게 득달같이 다가와 평정심을 잃고 외쳤다.

“당신! 미쳤어?!”

“….”

나 정말 살았구나. 무릎을 숙여 제 어깨를 잡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생생해 리제아나는 그녀가 무사함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괜찮은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수 앞에 선 거야, 당신은? 아무리 당신이라도 어떻게 마수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있지? 죽을 뻔했다고!”

“이안…?”

이안은 리제아나가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되찾고 숨을 고르고는 질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꼬마는 또 누구고?”

그의 질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녀가 감싸고 있는 아이를 서둘러 품에서 떼어냈다.

“꼬마야, 괜찮아?”

저보다 아이의 안위를 먼저 살피는 리제아나에 이안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어이없다는 탄식을 뱉었다.

아이는 참았던 숨을 한숨에 내쉬었다. 자신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드는지 아이는 리제아나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절 구해준 거예요…?”

이때껏 누군가를 해치기만 했지, 누군가를 구한 기억은 없었는데.

기분이 오묘했다.

순간 긴장이 풀린 리제아나는 웅크리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리제아나는 기막힌 상황을 벗어난 안도감에 그만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넌 살았어.”

그리고 그 모습을 엿보던 이안도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한 여자를 보고 있자니 어째서 이리도 안심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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