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제아나가 그녀를 따라 발 빠르게 뒤쫓아갔다.
달리는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뺨을 스치는 산뜻한 바람에 그녀는 기분이 괜스레 간지러워졌다.
“꼬마야!”
아무리 리제아나가 불러도 꼬마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뛰고 또 뛸 뿐이었다.
하늘이 도운 건지 어느새 골목길은 막다른 끝에 이르렀다. 소녀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헉… 헉…. 얘, 얘 꼬마야….”
숨이 턱 끝까지 찬 리제아나는 드레스 차림으로 로브까지 쓴 탓에 체력이 한계치에 다다랐던 차였다.
“그만 뛰고…. 왜 인형을…. 후… 훔쳐 갔는지…. 말해…줄래?”
호흡이 가빠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도 간신히 내뱉은 단어들 덕에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확실히 전달된 듯 보였다.
“…당신….”
리제아나의 힘겨움이 소녀의 마음에 다다랐던 것일까. 소녀는 리제아나를 말없이 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옷차림… 비싸 보여요…. 당연히 이 인형도 비쌀 거야…. 그렇죠…?”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문득 소녀의 갈색빛 눈에 알알이 슬픔이 잔뜩 어린 울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돈이 필요해요…. 이것이라도 팔아서 돈을 얻어야 해요…. 그러니까 돈 많은 당신이 양보해줘요…. 네…?”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한 듯한 말투. 이 아이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평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눈물을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곰 인형을 꽉 쥐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리제아나가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왔나, 리엇!”
소녀가 서 있던 곳에서 왼편의 골목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엇이라는 이름이 익숙해 고민하던 그때, 리제아나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가게에서 떠들썩하게 떠들던 남자 중 하나였다. 아까 그들이 언급한 ‘셀세 상점’이라는 곳이 이 근처에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불안감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은 무엇일까?
이윽고 이어진 말에 리제아나는 황급히 소녀에게 입으로 뻥긋거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이쪽으로 당장 와!’
⚜ ⚜ ⚜
이안은 음료를 사기 위해 줄에 섰다. 대기하는 동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한 나라의 공작인 내가 고작 여인의 물을 사기 위해 줄을 기다린다니. 네르아나, 미세리타에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물을 사려 했지만 아까 가게에서 나온 물을 그녀는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음식을 다 먹지도 못 하고 배가 부르다고 했던 것도 덩달아 떠올랐다. 그녀가 유일하게 다 먹은 음식은 하나뿐이었다.
‘아이스크림. 그러고 보니, 단 걸 좋아하는 건가.’
리제아나에게 아침을 배달해주는 몫을 임시로 맡았던 하르힌의 보고에 따르면 모든 음료는 반 이상을 남기지만 가끔 나오는 핫초코는 다 마신다고 했다.
‘그럼 물보다는 단 음료가 낫겠군.’
그리하여 수박 주스를 선택한 이안은 사람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시장에서 가장 단 수박을 주스로 짜내어 파는 가게로 친히 몸을 옮겼다.
정체를 밝히고 단번에 사 가는 방법이 있었으나 그 뒷처리가 귀찮아질 것이 뻔했기에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이상하게 잘하던데….’
줄에 서니 다른 생각들이 속속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리제아나의 다트 실력.
다트 화살을 보고 반짝이던 눈. 이 모든 것이 거짓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초장부터 완벽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보라색 풍선을 보란 듯이 맞추었다.
풍선이 터지는 경쾌한 소리가 주변을 울리자 그 사이로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며 불그스레 웃는 모습이 눈에 특히나 띄었다.
“잠깐이었지만 웃고 있었단 말이지….”
볼수록 이상한 여인이었다.
“하.”
이안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려냈다.
하지만 그녀가 벽을 쳐서일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다. 찰나의 틈도 내주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이안은 아니었다만.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제 차례가 된 것인지, 직원은 이안의 주문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박 주스 두 잔.”
이안은 간략하게 주문을 마치고는 옆에 서서 주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은 선선했다. 날씨는 적당히 따뜻해 기분 좋은 가을 내음이 물씬 느껴지는 듯했다.
이윽고 주스가 나오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오자 이안은 주문한 수박 주스 두 잔을 받아들고 막 가게를 나서려던 참이었다.
“꺄아아악!”
“으어어억!”
커다란 비명이 또렷하게 시장에 넓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이어지는 고함.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부터 사람들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못 볼 것이라도 보았다는 마냥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어떤 이는 몸을 떨며 급히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무심코 사람들이 뛰어나오는 방향을 바라보던 이안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트 상점이 있는 방향이었다.
즉 리제아나가 있을 곳이었다.
“젠장, 리제아나!”
이안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망가는 이들 중에 리제아나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녀와 비슷한 옷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닮은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젠장!”
들고 있던 수박 주스 두 잔을 내팽개치듯 던지고 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 ⚜
“리제아나!”
그는 인파 사이를 급하게 헤쳐나가며 리제아나를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르페디엠 시장은 수도에 위치한 중앙 시장인 만큼 넓고 컸다. 지역 곳곳에서 자신의 물건을 팔기 위해 오는 상인들이나 저 먼 나라에서 온 상인들의 수가 상당했다.
“역시 광각초인가…?”
이안은 조금 전 가게 안에서 보았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의 중심 시장이자 텐젤의 수도이다. 광각초가 벌써 퍼졌을 리 없었다. 아니, 퍼져서도 안 됐다.
광각초는 그 향을 그대로 일정 이상 맡는다면 이성을 잃게 할 강력한 힘이 있었다.
온갖 독초들이 한데로 섞였으니, 당연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수많은 사례로 인해 이미 그 피해를 속속히 알고 있었다.
독초를 갈아서 다른 곳에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환각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니 날것의 냄새를 맡는다면 인간의 몸으로서는 웬만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더군다나 광각초를 생으로 섭취한다면 마물과 비등한 힘을 얻어 주위를 모두 쓸어버린다는 극약 중의 극약이었다.
익숙한 가게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가 찾던 다트 상점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걸음을 가까이 옮겼지만, 사람의 형상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분명 리제아나가 좋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시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의 심정을 헤아리듯 서늘한 바람이 흉흉한 소리와 함께 불어왔다.
그 바람이 자연스레 그를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그가 있는 곳 지척으로 겁에 질린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확신을 확인시켜주듯이 그 골목길 사이로 다수의 사람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마수가 틀림없어!!”
“죽기 싫으면 다들 도망쳐!”
사람들이 모두 이안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수?’
의심의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이안은 분노했다. 감히 겁도 없이 텐젤에 광각초를 풀다니.
“텐젤 제국의 수도 한가운데에서 감히 광각초가…?”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광각초의 위력은 일반인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안, 그가 마력을 사용했다간 다른 이들도 휘말릴 터였다.
게다가 아직 리제아나도 찾지 못했다. 이안은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검은 로브를 쓴 인물이 소녀 손을 잡고 뒤늦게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꼬마야!”
“으아앙!”
소녀가 넘어지고 검은 로브를 쓴 인물 역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 앞으로 인간 모습을 한 마수 바로 앞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젠장!"
그 광경을 목도한 이안은 재빨리 순간이동 마법 주문을 외웠으나 마수의 움직임이 그보다 빨랐다.
이안이 주문 시전을 포기하고 공격 마법 주문을 짧게 중얼거릴 때였다.
인간형 마수가 그들에게 부딪히려는 순간, 검은 로브의 인물이 빠르게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윽고 검은 로브의 인물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빠르게 꺼내어 들더니 그대로 그들을 덮치는 마수에게 던졌다.
검은 로브가 던진 것은 다름 아닌 꽃잎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순식간에 꽃잎이 마수와 로브 사이를 감싸기 시작했다. 꽃잎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긴박한 상황에서 세 사람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꽃바람은 기이하게도 아름다웠다.
이안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꽃잎을 정면으로 맞은 마수가 괴로워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꽃잎에 스치는 것마저 괴로운 듯 몸을 비틀던 마수는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거대한 울음소리를 냈다.
“크아아아악!”
마수가 쓰러지며 이는 바람에 아이를 품에 안은 이의 로브가 벗겨졌다.
벗겨진 로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리, 리제아나?”
이안이 사주었던 그 상아색 드레스를 입은 채 검은색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여자, 바로 리제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