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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117)

19화

리제아나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보라색 곰돌이 인형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제법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안이 있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미심쩍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제 눈동자 색을 보시곤 이 곰돌이 인형을 떠올리셨군요….”

낮게 웃으며 여러 다트판이 걸린 노점상 앞으로 선 이안이 상품으로 걸린 곰돌이 인형을 재차 가리켰다. 그것이 두 사람의 목표라는 무언의 언질이었다.

리제아나가 이안의 손짓에 따라 다트 화살이 놓인 자리 앞으로 서자 이안이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다트라는 거야. 간혹가다 아주 좋은 물품이 상품으로 걸려있을 때가 있지. 오늘은 저 곰돌이 인형이 저 주인에게나 그대에게나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칠 모양이군.”

“미신은 안 믿는 편이라.”

“뭐… 미신은 믿는 사람 마음이니까.”

이안은 한 발짝 앞으로 나가 돈을 내고는 주인에게서 다트 화살 열 개를 받았다.

상품으로 걸린 물건에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가 안 통하는 듯 싶었다.

정해진 자리로 옮겨 공기가 가득찬 주머니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음….”

말을 잠시 멈춘 리제아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이안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까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거야. 저 곰돌이는 그대를 닮아 꽤 예쁘니까, 잘 어울릴 것 같거든.”

“칭찬으로 들어야 할까요…?”

“알 게 뭐야. 어쨌든 그대와 어울리는 게 중요하지.”

제법 간단히 답을 마친 이안은 한쪽 눈을 감았다. 짧게 과격을 겨냥한 그는 왼손을 들어 가볍게 연달아 다섯 개의 화살을 던졌다.

펑 펑 펑 펑 펑.

던지는 족족 보라색 공기주머니들이 툭툭 터지며 이내 풍성했던 주머니들의 몸이 비참하게 쪼그라들었다.

“해볼래?”

별안간 이안이 나머지 다트 화살을 건네며 물었다.

‘흥미로워하는 얼굴이군….’

항상 무표정만 짓던 리제아나였다. 이안은 그녀의 다른 표정이 마주할 때마다 신기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이안은 리제아나가 평소처럼 새침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할 거라 예상했다.

“좋아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이안의 다트 화살을 건네받았다.

‘또 새로운 모습….’

이안은 리제아나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 흡족한 기분에 웃음을 짓고는 그녀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득 이안은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웃어주는 자신을 자각했다. 이안은 다트를 잡으며 과녁 앞으로 선 리제아나를 바라보며 흠칫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망명한 아비드의 황태자비며 자신은 텐젤의 공작이 아닌가. 이래서야 괜찮을까.

‘아냐. 계약 관계니 서로 알아둬야 나쁠 것 없지.’

싫든 좋든, 어쨌든 그녀의 옆에서 감시를 자처한 이는 그였다. 델리사 대신 그녀를 납치한 이안이 결국 그녀를 책임져야 했다.

리제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며 수상한 동태를 보이진 않는지 잘 알아야 했다.

그러니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져도 그저 계약이라는 명분 때문이니 구태여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터였다.

“이안?”

조금 더 그의 곁으로 다가온 리제아나가 제비꽃 같은 보랏빛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안은 리제아나가 먼저 말을 잇기 전에 저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으로 다급히 대화의 흐름을 가져갔다.

잠깐이었으나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결국, 결론은 같았다. 이대로 그녀를 지켜보는 것.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 상념을 정리한 이안은 다시 리제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낱낱이 드러낼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먼저 다트 화살을 잡아.”

이안이 방금 떠오른 비책을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다트 화살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표적을 향해, 그러니까 우리가 딸 상품은 보라색 곰 인형, 즉 보라색 풍선만 열 개 맞추면 돼. 이렇게 쏘는 거야. 먼저 저것을 맞춰봐.”

이안은 리제아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그녀가 직선으로 알맞게 던진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거리의 공기주머니를 가리켰다.

“뭐, 처음 해보는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어. 내가 도와줄게.”

“말만 감사히 받죠. 나머진 제가 해볼게요.”

리제아나는 제 손에 쥐어진 다트 화살을 들어 올려 아까 그와 마찬가지로 한쪽 눈을 감고 과녁에 집중했다.

저 앞에 있는 것만 노리는 거야.

하나, 둘, 그리고 셋.

속으로 정확하게 셋을 세고서 리제아나는 화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다트 화살은 리제아나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펑.

무엇인가가 터졌다.

“어라?”

이안과 리제아나를 얕보고 있던 상점 주인이 당황한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설령 그녀가 맞추지 못해도 격려할 생각이었던 이안과 분명 빗나갈 거라 확신했던 다트 상점 주인의 예상은 공기주머니처럼 터졌다.

다크 화살은 정확히 목표를 맞추고 과녁에 꽂혀있었다.

‘우연이겠지.’

황궁을 벗어날 일조차 몇 없는, 순간 이동에도 힘겨워하는 여인이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출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잘한 것은 잘한 일이니.

“대단한걸, 리제아나?”

이안은 박수를 치며 리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승리로 인한 도취감도 흥분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리제아나는 감을 잡았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남은 화살, 다 주세요.”

그녀가 당당히 손을 내밀자 이안은 얼떨결에 나머지 네 개의 화살을 모두 건넸다.

문득 닿은 그녀의 손에 땀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가 올려다본 리제아나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대체 리제아나, 당신은 어떤 여자지?’

하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떨림을 이안은 미약하게 느낄 수 있었다.

⚜ ⚜ ⚜

이안의 눈썹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풍선이 놓여있던 자리는 다트 화살들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다.

“훌륭한걸, 아가씨…?”

남은 다트 화살로 모든 보라색 풍선을 정확하게 터트린 리제아나에게 상점 주인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넌지시 말을 붙였다.

“어디서 배운 거야? 방금 저 사내에게 배운 거 아니야?”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이안은 낮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거라곤 다트 화살을 쥐는 자세뿐이었다.

“그럼요.”

리제아나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턱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다트는 아비드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여가 놀이 중 하나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것일 뿐, 아비드에도 이미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저 목표를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니 예전 몸을 썼던 감각이 어렴풋이 되살아났을 뿐이었다.

“허.”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자태에 이안은 낮게 침음했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몸놀림은 분명 언젠가 몸을 쓰던 사람의 것이었다. 이안이 턱을 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비드에서는 어떻게 지냈었는지 물어봐도 돼?”

“대충 아실 텐데요.”

“뭐, 구설과 진실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까.”

그 말에 리제아나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사건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진실과 구설. 언뜻 보면 엄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단어 임에도 불구하고 아비드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구설이 곧 진실이었고 진실은 곧 구설이 되었다.

라이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는 그녀의 행동마다 이것이 그이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매번 고민했다.

‘어쩜 그리 멍청했는지.’

그가 다정한 말투와 손짓으로 리제아나를 맞을 때는 그녀가 라이핀이 시킨 일을 모두 훌륭하게 완수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리제아나는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그의 다정한 시선이 조금 더 오래 그녀에게 머물 거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헛된 망상이었다. 보란 듯이 라이핀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델리사였으니까. 그리고 결국, 그녀가 맞이한 끝은….

옛 생각에 불쾌해진 리제아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찌나 세게 씹었는지 살짝 피가 났다.

“리제아나. 혹시 그대-.”

그 모습을 응시하던 이안은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리제아나가 화제를 돌렸다.

“아 이런. 햇빛이 좀 강하군요…. 더운데, 귀찮으시겠지만 마실 것 좀 사다 주실 수 있으세요? 뜨거워서 현기증이 다 나는군요.”

연약한 척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며 그녀가 말하자 이안이 허,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객처럼 목표물의 숨통을 끊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별안간 웬 온실 속의 화초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에게 연약한 영애 연기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이안은 못이긴 척, 그녀의 연기에 속아주기로 했다. 어쨌든 시간은 많으니까.

“좋아. 하지만 다음엔 꼭 대답해야 해?”

말을 끝으로 그는 근처의 노점에서 마실 것을 사러 몸을 돌렸다.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거야. 대단한걸. 아가씨는 못 딸 줄 알았지만, 상품은 상품이니. 자, 가져가라고. 보라색 곰돌이야.”

상점 주인은 기꺼운 흥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품을 모아둔 곳으로 걸어가 보라색 곰돌이 인형을 꺼냈다.

“글쎄요. 타고났을까요? 곰 인형, 감사해요.”

우아하게 웃으며 리제아나는 곰 인형을 받아들였다.

다트 상점에도 사람들이 점점 몰려오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그를 기다리며 주위를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주인에게 짧게 인사를 하곤 자리를 떠나 구석으로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조금 산만했던 주위가 잠잠해지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리제아나는 잠시 구부정하게 앉아 곰 인형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보다 혼잣말을 뇌까렸다.

‘뭐야. 상품 물건 주제에 고급스러워 보이잖아?’

곰돌이의 얼굴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지만 입혀져 있는 옷을 보아 손수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인형이 바느질된 마감을 손끝으로 매만져보니 이것 역시 마법이나 기계 사용 없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몸통 부분에 바느질된 선이 조금 삐뚤빼뚤한 것이 그 이유였다.

곰 인형이 주는 아늑한 인상에 빠져든 리제아나는 제 손의 인형을 응시했다.

그리고 툭.

누군가가 그녀를 치는 바람에 곰 인형이 자연스레 손에서 떨어졌다.

“어?”

부딪힌 ‘누군가’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리제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갈색빛 눈을 크게 뜬 아이는 곤란해 보이는 듯했다.

미처 리제아나가 반응할 새도 없이 소녀는 보라색 곰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것이 목표였는지 곰 인형을 재빠르게 낚아채 골목으로 사라졌다.

“어? 잠시만, 꼬마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제아나가 그녀를 따라 발 빠르게 뒤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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