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시장의 거리는 활발했다. 여러 사람이 물건들을 사고팔았고 어떤 곳에서는 흥정이 벌어졌다. 또 어떤 곳에서는 물건의 품질을 확인하며 시비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안은 이리저리 상점을 들르며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녔지만 그녀로서 그가 주겠다는 것들을 마다할 생각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돈을 정도 없이 쓴다는 것이었다.
“어때?”
이안이 리제아나에게 물어왔을 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를 최소 네 번은 부른 후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리제아나가 한 말이라고는 텐젤의 역사를 알아보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그 말에 이안은 역사책과 더불어 추가로 여가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샀다.
물론 주문은 간단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한숨을 내쉰 리제아나는 벽에 기대어 군중을 바라봤다.
“분주하네요.”
정말 게으른 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시장은 많은 발걸음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오랜만이에요.”
리제아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사람 많은 거리의 혼잡함을 느껴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더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인 걸까.
바람이 따뜻했고 하늘도 청량했다. 햇볕이 적당하게 내리쬐며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눈을 감으면 보드라운 바람결이 리제아나의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소란 속의 평화. 사소하지만 잊히지 않을 순간이 될 터였다.
“좋은가 보네.”
이안은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는 리제아나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황태자비라서면서, 제국의 제일가는 지위에 서 있었으면서, 나라를 떠나고 모든 걸 잃었는데도 편안해 보이네.’
여전히 마음속에 꺼낼 수 없는 응어리들이 박혀있는 듯 보였지만 딱히 큰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계속 머물 사람이 아니던가. 시간은 많았다.
“이제 슬슬 이동할까? 발이 아프진 않아?”
문득 이안은 리제아나에게서 눈을 뗐다.
어디에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했는데 리제아나를 눈여겨보는 질 나쁜 자들이 있었다. 으슥한 골목길 안쪽이었다.
이안은 그녀를 자신 쪽으로 당겨 그들의 시야에서 숨겼다.
“아니요. 더 걷고 싶은데요? 날씨도 선선해서 난 더 걷고 싶어요.”
그 불같은 성정과 달리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이 가녀린 외형을 지니고 있던 리제아나였다. 보기보다 몸은 튼튼했던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걷기 시작해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얼굴에는 피곤하다는 기색 하나 없었다.
어느새 이안의 싸늘한 살기에 남자들은 어두운 골목 안으로 모습을 숨긴 뒤였다.
“그럼 점심이라도 먹으러 갈까?”
“어디 아시는 곳 있으세요?”
“끌리는 음식이 있나? 딱히 없으면 가볍게 먹을 곳을 알지.”
수도의 시장은 어린 시절 그에게 놀이터와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도 업무 할당량을 마치고 나와 구석구석 관찰해보는 것이 취미였던 지라 거의 모든 가게를 꿰뚫고 있었다.
아까 먹은 아이스크림부터 추가로 꼬치와 과일 컵을 이미 시식했던 그들이라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래서 리제아나도 흔쾌히 그의 결정에 찬성했다. 이안은 손을 들어 가게가 있을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모시도록 하지.”
⚜ ⚜ ⚜
이안이 고른 식당은 ‘윙키’라는 작은 펍이었다.
주로 샌드위치와 커피, 주당들을 위한 수제맥주를 파는 간소한 가게였다. 하지만 그 식당의 특제 연어 샌드위치는 까다로운 그의 입맛조차 단번에 잡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연어 샌드위치 두 개.”
“네, 손님!”
들어가자마자 펍의 주인이 등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았다.
워낙 아는 사람만 아는 펍이었던 지라 제법 적막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이안의 호감을 산 데 한몫하기도 했다.
현재 있는 사람들은 이안과 리제아나를 포함에서 두 테이블밖에 없었으니. 그들은 충분히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금방 먹고 나갈 생각이었던 둘은 대충 아무 테이블이나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정말 가져왔다고?”
“그렇다니까! 믿을 수 없겠지만, 구했어!”
옆 테이블에서 두 남성이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 물론 사람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긴 했는데도 영 석연치 않단 말이지….”
안경을 쓰고 꽁지머리를 한 남성이 턱을 매만졌다. 불안해하는 듯했다.
맞은편의 또 다른 장발 남성이 애가 탄다는 듯이 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니 리엇! 자네 정말 속고만 살았나. 어쩔 수 없지. 내가 보여줌세!”
“자네, 아직 시험해보지 않은 것을 나보고 시험하라는 건가?”
“자네가 먼저 내게 부탁한 것 아닌가!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이렇게 홀대할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걸세. 쯧.”
장발 남성이 도끼눈을 뜨고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반박하자 꽁지머리 남성이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었지, 포드. 자네의 수고스러움을 내가 왜 모르겠나. 어?”
“그래. 아하하. …이런, 우리 소리가 꽤 컸던 모양이야.”
문득 이안과 눈이 마주친 꽁지머리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라는 몸짓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이안의 눈썹이 휘었다. 이안의 달라진 기색을 눈치챈 리제아나 또한 의아한 듯 남자 쪽을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착각한 걸까? 리제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주문하신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손님!”
때마침 주문한 연어 샌드위치가 나왔고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리제아나에게 나른히 웃어 보였다.
“맛있게 먹어.”
“네, 당신도요.”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나마 얽혔다.
순간 느닷없이 픽, 하고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니 살리니 했던 두 사람이 아니었는가.
이렇게 편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다니.
시선으로 같은 생각을 나눈 두 사람은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 ⚜ ⚜
멋대로 잡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은 그녀는 입에서 느껴지는 가득한 연어와 새콤한 양파, 그리고 크림치즈의 조화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왜요?”
문득 이안의 붉은빛 눈에 이채가 맑게 드리웠다. 그 반응에 리제아나가 천천히 그를 마주 응시했다.
“왜 사람 먹는 모습을 그렇게 빤히 보시는 거죠?”
그녀는 그 얼굴 그대로 이안을 의심쩍게 바라보며 물었고 이안은 아무 대답 없이 또다시 그녀를 관찰하는 듯이 오묘한 표정을 했다.
“내가 고른 음식을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가 잘 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그래.”
“비꼬는 건가요?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 무슨 구경거리라고 봐요?”
역시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리제아나에 이안은 그저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비꼬다니. 그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씩이나 되는 사람은 샌드위치도 칼로 썰어 먹을 줄 알았지.”
“하? 샌드위치도 안 먹어 봤을까 봐요?”
리제아나의 어조가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대개 그녀가 보아왔던 이안의 얼굴은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의 시원스러운 미소에 리제아나는 어색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큭큭 재미있다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안은 웃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무려 적국의 황태자비가 내 앞에서 식사를 하고 웃고 떠들고 있을 줄이야.”
리제아나는 이내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더니 이해한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마따나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한 나라의 황태자비가 감히 적국의 공작에게 저를 납치해달라고 요구했고, 이제는 수도의 중심 시장에서 한때는 적이었던 공작과 마주 앉아있을 줄은.
“저도 무려 ‘텐젤의 미친개’가 주는 샌드위치를 먹게 되다니 굉장히 영광이네요.”
“그래, 그 ‘텐젤의 미친개’가 연어 샌드위치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잘 기억해.”
“푸핫.”
지지 않고 받아치는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는 불가항력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오, 웃기도 하네.”
타박하는 거라 여긴 리제아나가 살포시 족제비 같이 눈을 떴지만 이안의 눈에서는 전혀 불쾌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리제아나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순간의 정적에 리제아나가 먹던 연어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또 왜요?”
리제아나가 먼저 묻자 이안이 답지 않게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의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차가운 물을 목울대 너머로 넘겼다.
“아니야. 아무것도. 어서 먹지. 다른 곳도 구경시켜줄 테니.”
⚜ ⚜ ⚜
이안과 리제아나가 식사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즈음, 비슷하게 아까 대화를 나누던 두 남성중 장발 머리 남성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럼, 난 먼저 일어나겠네. 셀세 상점 앞에서 다시 보자고.”
“알겠다니까.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내가 특별히 이 식사는 사도록 함세.”
“하하하. 맘에 들어!”
이윽고 이안은 그들을 힐끗 보더니,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리제아나가 앉아있는 거리까진 닿지 않았다. 왜인지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리제아나는 남자들을 다시 살펴보았으나 그녀로서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리제아나?”
남자들을 살펴보는 리제아나를 이안이 불러세웠다.
“네?”
“이만 가자고.”
이안의 말에 잡념에서 깨어난 리제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에 제 시선을 맞추었다.
요새 자주 마주친단 말이야.
“또 갈 곳이 있나요?”
“글쎄. 생각해 봤는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의 눈동자를 보니 마침 알맞은 게 떠올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