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비드의 황궁에 위치한 귀빈 접대실.
비록 밤이었지만 커튼이 창의 반을 가리고 있어 어둠이 더욱 짙게 방 안을 덮었다. 하지만 방의 주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둠을 즐기는 편이었다.
편히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워 곱슬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배배 꼬기만을 반복하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 증거였다.
델리사가 다리를 고압적으로 꼬며 아무도 없는 정적만이 가득한 방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달이 알맞게 차오른 게, 폐하를 뵈기 딱 좋은 분위기구나. 거기 누구 없느냐?”
“네, 네….”
요새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도 일이 일사천리로 잘 풀리는 것이 꼭 하늘이 라이핀과 자신을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리제아나가 사라진 이후, 델리사는 황궁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편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비가 사라졌으니 라이핀을 겨우 졸라 귀빈실로 거처를 옮겼고, 리제아나의 옛 시녀인 벨리타는 델리사에게 붙은 상태였다.
섬기던 제 주인의 자리를 저 굴러 들어온 돌이 저 자릴 차지한 꼴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하지만 황태자께서 은애하는 게 저 여자였다.
그러니 권력자의 명령이라 벨리타는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옷을 준비했다.
“뭐 하는 거지?”
벨리타가 델리사의 짜증이 섞인 물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를… 찾아가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럼 준비를 하셔야….”
“얘.”
벨리타는 델리사의 기껍지 않은 눈초리에 서둘러 행동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였다.
“네, 델리사 님.”
“슬립 정도면, 충분하단다.”
비웃음이 섞인 델리사의 조롱투에 벨리타의 속내에서는 또 한 번 불이 났지만, 손에 힘을 꾹 주는 것으로 마음을 눌렀다.
“아… 네.”
“그럼 폐하께 가자꾸나.”
델리사의 발걸음은 마치 하늘을 날 듯 가벼웠다. 풍성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탁자에 있던 하트 모양의 향수를 온몸에 뿌렸다.
그녀가 지나는 길마다 독한 향수 냄새가 났다.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였지만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병사들은 황홀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델리사 님?”
침소 앞을 지키던 일라이자 앞에 진동하는 향기가 닿기도 전에 델리사가 불쑥 나타났다.
델리사와 눈이 마주치자 일라이자는 당황한 낯빛을 띠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 내가 왔다고 알리거라.”
하지만 당당한 태도의 델리사와 달리 일라이자가 머뭇거렸다.
“어서 내가 왔다고 알리래도?”
“그… 그것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는 일라이자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치켜뜬 델리사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독한 향수가 일라이자의 코로 흘러 들어갔다.
진하디 못해 역한 냄새에 일라이자는 어딘가 넋 놓은 얼굴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는 현재 침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뭐어?”
뜻밖의 답변에 당황한 델리사는 벨리타를 흘끗 넘겨보며 재차 일라이자에게 되물었다.
“그럼 폐하는 현재 어디 계시지?”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 늦은 시각까지 말이지?”
“예….”
델리사의 손짓에 따라 일라이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이 시간까지 집무실에 계신 것이지?”
“사라진 황비 전하의 사건의 전말에 대한 조사를 하고 계십니다.”
“홀로?”
앙칼진 목소리가 한없이 높아졌다. 델리사는 한쪽 입술을 까득 짓씹었다.
“필로렌치아 공작님과 함께….”
일라이자의 말에 멈칫한 델리사는 결국 등을 돌렸다.
“저택으로 돌아갈래.”
“네, 네.”
벨리타가 흠칫 몸을 떨며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앞서 걷는 델리사의 뒤를 따랐다.
델리사의 흔들리는 머리칼이 벨리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방, 방금 누구라도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어….’
벨리타는 천사 같은 델리사의 얼굴에 순간 스친 살의 가득한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 ⚜ ⚜
분홍 머리의 미인이 싸늘하게 네르아를 맞았다. 해가 빨갛게 익어 오르는 시간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노을 아래로 선 델리사에게 라이핀 앞에서 짓던 그 사랑스러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을 굳힌 그녀는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늦었네요.”
수도 헤르깜냐 근처엔 위즈라는 지역이 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인 위즈는 크로덴느 백작가가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크로덴느 저택은 평화로운 풍광이 일품이었다.
“조금 늦게 왔죠? 오는 길이 매번 험해서요.”
저택의 정적을 깨운 건 네르아였다.
무사히 저택의 창문에 앉은 네르아가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아뇨. 괜찮아요.”
델리사 역시 입꼬리에 호선을 그리며 답했다.
“물건만 잘 전달해준다면 말이에요. 가져왔죠?”
델리사가 초조하게 입을 오므렸다 피며 손을 들어 올려 손톱을 까득 깨물었다.
이는 불안할 때 나오는 델리사만의 특유 버릇이었다.
혹여나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 빗나갈까, 자신의 계산 안에 들어있지 않은 일이 나올까 두려울 때마다 튀어나왔다.
“당연히 가지고 왔죠. 덕분에 예상외의 수확도 얻었고요.”
검소한 웃음을 띠며 네르아는 가방 안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뒤적이기 시작했다.
“양귀…비라고 아세요?”
가방 안의 물건을 찾느라 말이 조금 늘어졌지만 델리사는 충분히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양귀비?”
“모르시면 됐고요. 아, 찾았다!”
한참을 가방을 뒤적이던 네르아는 드디어 원하는 물건을 찾아냈다.
델리사의 눈에도 무척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만들어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물건을 들여다보던 델리사는 금세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알아챘다.
“이거 내가 받던 것이 맞나요? 무언가 바뀌었는데?”
“빙고. 정확히 맞췄어요. 조금 더 강력하게 비율을 조절해보았거든요. 저번에 전달해 드렸을 때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녀의 말을 들은 델리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감사해라. 역시 그쪽을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에이. 두 배로 돈을 내주시니 저야 매번 감사하죠.”
델리사는 자신의 손에 다시 한번 쥐어진 하트 모양의 분홍색 빛을 띠고 있는 향수를 바라보며 라이핀을 떠올렸다.
이거면,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최근 라이핀과 델리사의 사이가 멀어진 듯 보였으니까. 처음엔 리제아나의 부재가 둘을 더 가깝게 이어줄 것 같았다.
“사라져도… 감히 끝까지 방해하다니.”
하지만 왜 일까. 그날 이후로 매번 찾아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내쫓겼다. 오직 필로렌치아 공작만이 그 옆에 있을 수 있었다.
델리사는 또다시 덮쳐오는 불쾌한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며 화를 눌렀다.
그녀 역시 리제아나의 행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만일 정말 그녀가 사라졌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과 라이핀 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냥, 그대로 죽어버려도….
“-손님? 손님!”
델리사는 네르아의 부름에 잡념에서 겨우 깨어났다.
네르아에게 델리사, 그녀는 크로덴느 백작가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진 관계자로만 보였기에 그녀는 더 깊게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이 규칙이었으니.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신 델리사는 조금 전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녀도 알았다. 이미 먼 길을 왔다는 것을.
그녀는 리제아나를 싫어했다. 아니, 끔찍하게 증오했다. 그녀가 제 앞길을 망쳤으니까.
“괜찮으세요? 갑자기 웃으시고….”
“…제가 웃었다고…요…?”
당황스러워하며 델리사는 자신의 손을 천천히 들어 제 입을 가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네르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끄적였다.
“다음 물건은 혹시 언제 주문하실 예정인가요? 이번엔 꽤 빠르게 주문하셔서요. 원래는 두 달에 한 번 부르셨잖아요.”
네르아의 물음에 델리사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회가 있을 때, 붙잡아야 하거든요. 비열해도, 이게 내가 고수해온 유일한 방법이니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의미를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델리사는 그렇게 멈추어 서 있었다.
⚜ ⚜ ⚜
“준비됐어?”
이른 아침부터 리제아나의 방에 이안이 상쾌하게 등장했다.
그는 매번 입고 있는 제복이 아닌 펑퍼짐한 긴소매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바지는 그의 키를 더 돋보이게 했다.
평소에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면 지금은 수수해 보이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나 쉬이 볼 수 없는 외모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내 옆에 있던 거울을 응시하니 확실히 그와 대비되는 그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쳐 보였다.
조금 전 목욕을 한 탓에 아직까지 젖은 머리와 함께 갈라진 입술 틈, 그리고 무엇보다 활동하기 좋은 얇은 실내 드레스 차림이었다.
“일단.”
그런 그녀를 이안은 간단히 훑어보더니 두 번째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빠르게 가볼까.”
“잠시만…!”
이윽고 불쾌한 느낌과 함께 심한 멀미가 리제아나를 감쌌다. 벌써 몇 번째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이동이었다. 비틀거리는 리제아나의 팔을 이안이 낚아채듯 감쌌다.
“이런 괜찮아?”
“앞으로 이동할 때는 꼭 이동한다고 말부터 해주세요!”
정신을 차린 리제아나가 도리어 그의 팔을 붙들며 큰소리치자 그가 놀라 멈칫했다. 그의 눈이 한 바퀴 굴렀다.
“글쎄.”
“글쎄? 사과부터 해야죠. 지금, 당장.”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의 손을 놓지 않고서 사과를 요구하는 리제아나는 그의 사과를 듣지 않으면 놓지 않을 기세였다. 이안은 낮게 숨을 삼켰다. 그래 이런 여자였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무슨 일이 있어도 얻어내는 불같은 여자.
“음… 미안?”
“그리고 또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요?”
“…앞으로 안 그럴게?”
사과를 받기 무섭게 리제아나의 불같은 성정이 누그러졌다. 그를 귀신같이 눈치챈 이안이 아직 그의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자, 그럼 이제 정말 시작해보자고. 데이트.”
텐젤의 시장은 아비드의 시장 거리와 비슷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부산스럽게 고개를 움직이며 거리를 구경했다.
두 나라 모두 무역이 활발한 제국이라 다양한 나라에서 수입한 물품들이 거리를 수놓고 있었지만 마력이 발달한 아비드는 마력 위주의 물품들이 눈에 띄었다.
반대로 텐젤은 철의 강국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무기들이 그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들, 귀중품들 덕에 꼭 축제가 아니어도 중앙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가 바로 텐젤의 수도 베제테나의 명물이라고도 불리는 카르페디엠 시장이야.”
이안이 가져온 검은 로브를 리제아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고는 점점 시장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리제아나의 눈앞에 들어온 건 거대한 고목이었다.
‘이게 뭐람.’
분명 자신은 조금 전 막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이젠 군중 한복판에서 실내 드레스 차림으로 고목나무나 바라보고 있다.
이안에게 휘말려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순간이동을 당한 사정을 떠올렸다.
리제아나가 넋나간 표정을 짓자 이안은 그제야 그녀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옷부터 살까?”
“정말 제멋대로네요. 애초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좋았잖아요?!”
씩씩거리는 그녀의 물음을 가볍게 무시했다.
대신 빙실 웃으며 그녀를 부티크 앞으로 데려갈 뿐이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마담 레이송의 부티크로 들어간 그가 대뜸 말했다. 리제아나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젠가 리제아나에게 어울린다며 화려한 드레스를 골라주다 저지당한 그였다. 결국 그의 고집에 심플한 드레스 코너 쪽에 걸려있는 모든 드레스를 샀다.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그는 포장되었던 드레스 중 상아색 드레스를 건넸다.
“오늘 들릴 곳이 많으니, 여유 부릴 틈이 없다고.”
어느새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길어진 그녀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이안의 나른한 말투와 따스한 미소가 묻은 손길로.
그가 건네준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이안이 마담에게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대외적인 데벤시아 공작저에 보내 달라는 말을 마친 이안에 벙찐 리제아나를 이어서 또 한 번 이끌어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이거 먹을 줄 알아?”
그가 둥근 삼각형 모양에 그 위에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음식을 건넸다.
“아이스크림 같은데. 이 아래는 뭐죠?”
“이것도 모른다고? 과자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린 거지. 아비드 제국엔 이런 게 없나?"
리제아나는 제 손에 어느새 쥐어진 음식을 응시했다.
“백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먹어보는 걸 추천하지.”
손잡이 부분 또한 과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안이 장난치는 걸까 생각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 방식으로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함께 베어 물자 차갑고 달콤한 것이 입안을 채웠다.
“맛있어….”
리제아나가 한 입을 더 먹으며 나지막이 감탄하자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었다.
“어때 텐젤이란 나라, 꽤 좋지?”
때마침 바람이 살포시 불었다. 리제아나는 진정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더이상 아비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바삭하게 떨어지는 과자의 촉감은 물론.
그녀가 숨 쉬는 공기와 이안의 웃음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