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이파이브로 끝내기엔 아쉽잖아. 이런 성과를 냈는데. 당신 망명권 얻고 시내 구경도 제대로 한 적 없잖아? 이번 기회에 놀자는 거지.”
“네?”
“다시 한번 이야기할까? 데이트하자고.”
리제아나는 일순 현기증을 느꼈다.
그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 거지? 그 ‘텐젤의 미친개’가?
그가 답을 원한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좋은 백발이 흘러내렸다.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데이트?”
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그를 올려보았다.
예상외의 반응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들은 거 맞아. 데이트. 왜?”
“허, 그건….”
이안이 돌직구로 대답하자 리제아나는 할 말을 잃었다.
창가로 들이친 석양빛이 리제아나의 얼굴을 비쳤다. 해가 떨어지며 비추는 노을 아래로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올랐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다른 때보다 달리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른 채였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이안은 그녀에게 더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갔다.
“자, 잠시만요. 거기 계세요.”
리제아나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두 사람의 간격은 그대로였다.
왜 피하는 거지? 이제 와서 내가 무서워진 것은 아닐 테고. 리제아나만큼 이안도 낯선 감정이 일었다.
반면 리제아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데이트라니?
하이파이브 또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행동이었지만 가볍게 손을 맞부딪히는 것이었으니까 별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비드 제국에서는 남녀가 손을 맞부딪힌다면 지나가는 아이가 보아도 가까운 사이라고 단정 짓게 만들 만한 행동이었지만 이곳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쨌든 손바닥이 마주치는 경쾌한 소리는 들뜬 기분에 부채질을 해주긴 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해 알아가는 새로운 즐거움에 일순 가슴이 뛰었다.
그래. 거기까지만이어야 했다.
데이트는 달랐다. 데이트는 연인들 사이에서 하는 나들이였다.
해서 보수적인 리제아나의 사고에 이안이라는 변수가 훅 들어오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채로 속수무책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남자가 또 무슨 속셈이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처음으로 받은 데이트 신청에 매번 침착함을 유지하던 리제아나의 얼굴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이어 그가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움 뒤로 수치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벌건 얼굴로 그를 노려보자 그는 오히려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날 놀리는 것이 아닌가?’
직접 말로 묻는 것이 빠르겠다는 판단이 서자 리제아나는 입을 열었다.
“데이트라면 연인들 사이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저에게 그런 권유를 하시는 거죠?”
리제아나가 평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아비드 제국에서 데이트란 행위는 약혼자가 청하는 의식입니다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챘는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라이핀과 달리 고귀하고 수려한 얼굴의 그는 걸음걸이에서도 우아함이 흘렀다.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붉은 눈이 진한 이채를 풍기며 가까이 다가오니 마치 적색 가넷을 박아넣은 듯 아름다웠다.
이안은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작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큭.”
이윽고 그가 박장대소했다. 그는 ‘약혼’이란 단어를 중얼거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푸핫, 거기는 그대의 나라고. 여기는 텐젤이야, 잊었어? 여기서 데이트란 친구와 함께 나들이 가는 뜻도 담고 있다고.”
리제아나는 처음으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안이 크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설명해주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새빨개졌다.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삐져나온 귀가 터질 듯 붉었다.
이안은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에 입을 가리곤 마저 웃으며 생각했다.
‘색다른 면이 있으시군.’
“혹시 그래서 얼굴이 빨개진 건가?”
이안은 여전히 유려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물었다.
“오해했네요. 미안합니다. 이만 할 말 다 하셨으면 나, 나가주시죠.”
최악이었다. 답지 않게 횡설수설까지 해버린 자신에 리제아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애써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리제아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대로 쳐다볼 뿐이었다.
“….”
오묘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하자 이안이 먼저 정적을 깼다.
“어차피 내일 일정도 없으니까, 내일 나가는 건 어때?”
당연히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리제아나는 멈칫했다.
‘잘 살기.’
문득 그녀가 텅 빈 양피지에 써놓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리제아나가 방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온종일 생각을 거듭하며 과거를 곱씹는 일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잘 살기'라는 포부까지 다짐했거늘.
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리제아나를 바라보며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다음 한발, 또 한발.
그는 그렇게 문까지 걸어간 후에 여전히 그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리제아나를 향해 가벼이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봐.”
⚜ ⚜ ⚜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저하?”
이안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에게 다가오던 하르힌이 이안의 표정을 눈치채고 의아한 듯 물었다.
이안은 언제 들뜬 얼굴을 했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나처럼 심드렁한 태도였다.
“왜?”
“그, 그게….”
기분이 좋아 보이셨던 건 착각이었나, 하르힌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이제껏 품었던 의문을 꺼내 들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하르힌이 눈치를 보다 크흠, 목을 풀며 최대한 자연스레 의문점을 제기했었다.
“뭘?”
“그레고리 상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양귀비를 빼돌리고 광각초와 연관이 있으며… 그 모든 것들 말입니다.”
“있어. 그런 게.”
“혹 그 영애가 준 정보입니까?”
“?”
순간 이안의 눈빛에 살기가 일렁인 듯했으나 하르힌은 못 본 척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으게 그러니까….”
“조사했나?”
“….”
하르힌은 답하기를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부했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하르힌, 답해.”
하지만 이안은 집요했다.
“저는 일평생 공작 저하에게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물론 공작 저하가 하시는 행동을 모두 믿는 편이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저 여자 말입니다! 마탑에 얹혀사는 저 여자가 그냥 궁금했을 뿐이라고요!”
애써 마음에 꾹꾹 눌러왔던 마음의 소리가 한번 튀어나오자 하르힌은 멈출 수 없었다. 이내 봇물 터지듯이 줄줄이 삭히고 있던 말까지 남김없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쭈.”
“헉. 그게 그러니까요,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 그런 결정을 내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이미 알아봤다고 하니 시간을 되돌린 순 없겠지만 밖으로 그 비밀을 발설했다간 정말 쫓아낸다?”
“너무합니다, 진짜! 저희의 관계가 언제 그렇게 하찮아졌답니까…!”
울상을 짓는 하르힌을 바라보며 이안이 낮게 웃음을 삼켰다.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었다.
‘흐음….’
하지만 하르힌의 말대로 리제아나를 델리사라 황제에게 소개하던 일 또한 그에게도 위험 부담이 큰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리제아나를 왜 위험을 감수하고서 거두었지?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계약이란 관계에 묶여있어서?
사실 처음에는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리제아나 역시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납치를 요구했던 것이었으니.
이안은 느긋하게 답을 내렸다.
그래, 무엇을 더 고민할 텐가. 어차피 계약뿐인 관계인데.
울먹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하르힌을 가뿐히 지나쳐 마저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하르힌.”
서운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던 하르힌이 움찔대며 답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저하?”
“내일 말이야.”
“네, 저하. 내일… 귀족 회의가 있었죠.”
“그래 그 회의.”
이안이 빙글 웃으며 회의를 언급하자 하르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르힌은 회의 준비에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이 있는지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런 하르힌을 두고 이안이 말을 이었다.
“불참한다.”
“예?”
“불참. 얘기 끝. 나 바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안은 미처 하르힌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그리고 정확히 10초 후, 현실을 직시한 하르힌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하고 이안을 찾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아니 한 번도 회의 시간에 늦었던 적도 없으셨던 분이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이안에게 어딘가 변화의 바람이 스친 것 같았다. 결국 오늘도 그는 아무도 없이 텅 빈 마탑의 복도에서 한숨을 쉬는 것으로 스스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하… 요즘 저하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야.”
⚜ ⚜ ⚜
“정말 같이 안 가는 거야, 네르?”
미세리타가 물었지만 네르아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빈번히 함께 여정을 떠났던 두 사람이었기에 미세리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네르아를 바라봤다.
“음… 요즘 들어 너무 독단으로 움직이는 거 아니니?”
미세리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네르아를 바라보았다. 네르아가 미세리타를 향해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적어도 내가 할 일은 분명히 하고 있는걸.”
방긋 웃은 네르아는 미세리타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떠났다. 급히 갈 곳이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미세리타는 어느 정도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네르아가 자신들도 모르는 일에 가담되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말리지는 않았다.
네르아가 마탑, 특히 마탑주이자 공작인 이안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까.
“아닌…가?”
미세리타는 네르아가 쥐어준 편지를 한쪽 손에 들어 그녀가 수집해야 할 풀들의 목록을 살펴보다 뒤이어 덧붙여 뇌까렸다.
“아 됐어.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설마 위험한 짓을 하겠어? 저 네르아가?”
적어도 마탑에서 함께 생활했다면 네르아가 허튼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 알았다.
다른 사건 사고 없이 방에 얌전히 지내던 아이였다.
물론 약초 만드는 것에 재능을 보이며 밖에 돌아다니기 시작해 이제는 좀 활발한 아이로 변했다.
미세리타는 바뀐 네르아가 보기에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대로 성장하길 바랐다.
그러니 지금의 네르아가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미세리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