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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17)

15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그레고리 상단의 상단주인 메릭이 텐젤 제국 병사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들은 평소처럼 무역단들과 함께 양귀비를 배급받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텐젤의 양귀비 관리자가 매번 할당된 양보다 적은 양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항의하기도 전에 쏙 배급만 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함께 따라 나가려니 다른 이들은 보내주되, 그레고리 상단만 막았다.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윗사람의 명령이십니다.”

“하지만 왜요! 저는 그 이유가 궁금하단 말입니다. 분명 저희는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아비드의 무역단이자 아비드 제국민입니다. 함부로 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메릭이 항상 침착한 그답지 않게 되레 성내며 발을 굴렀다.

병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의 성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이어 누군가가 올라왔다.

깔끔하게 넘긴 녹색 머리에 정갈한 옷차림. 하르힌이었다. 하르힌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나서서 메릭 앞을 가로막았다.

“이 명령을 내리신 분이 온다고 하니 이야기를 한번 나누어보겠습니까?”

“대체 누가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겁니까?! 그래요! 한번 봅시다!”

메릭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부와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퍼퓸니즈라는 고안했다. 그리고 필로렌치아 공작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던 메릭의 상단이 물자 공수를 위해 채택되었다.

이내 그들은 황실의 무역단에 합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비밀리에 내려진 명령은 하나. 양귀비의 물자를 미세하게 늘린 후 따로 뒤로 빼내라는 명령이었다.

당연히 불법인 줄 알았지만 그들에게 오는 돈이, 심부름 값이 꽤 짭짤했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몇 년 동안 아무 문제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곧 아비드로 돌아가는 일정이 있는 오늘, 이상하게 그들만 병사들에게 가로막혀버린 것이었다.

‘설마… 들킨 건…. 아냐, 주인님이 얼마나 철저하신데 이런 데에 실수하셨겠어.’

문 쪽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자들인가.”

가시가 돋친 위협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는 메릭도 알고 있었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

자타공인 미친개. 황제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고 행하는 적빛 눈의 잔인한 충신. 그런 그가, 현재 메릭을 내려보고 있었다.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더불어 그가 내뿜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메릭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대들이 그레고리 상단인가?”

이안이 메릭을 정확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만….”

메릭이 침음하며 뇌까렸다.

“여기 왜 잡혀 있는지는 알고?”

그의 조롱 어린 말투에 메릭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입술을 짓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모른다면 내가 직접 알려줄 의향이 있지. 그것도, 친히.”

이안은 천천히 그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구두굽이 선명히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설마….’

메릭은 도저히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인 것은 외모에서 확연히 드러났지만 시선을 압도하는 살기와 위압감은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을 만큼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감히. 텐젤 제국의 고유 물품을 빼돌려 텐젤 제국을 위협하는 용도로 쓰다니.”

고요히 빛나는 빨간 눈에 진한 이채가 돌았다. 동시에 그가 음험하게 웃었다.

얼굴에 드러난 적나라하고 선연한 웃음은 그대로 그의 꼬인 심기를 대변하는 듯 보였다.

살기를 멋대로 뿌리는 냉엄한 표정과 서릿발 같은 미소. 이는 사실상 이안의 별명이 탄생한 근원이기도 했다.

“그… 그것이…!”

메릭이 당황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로 더듬거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음을 그 방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저 오랜 시간 다른 곳을 여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해. 그편이 정신적인 고통을 덜어줄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쇳소리가 섞인 불쾌한 음성으로 비릿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었다.

“그러실 순 없습니다! 저희는 염연히 두 황제 폐하께 승인받은 상단으로 마땅히 물품을 무역할 권한이 있으며 상품을 가질 수 있는….”

그나마 용기 내어 메릭의 뒤에 선 부상단주 엘이 입을 열었지만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이안의 칼이 전광석화와도 같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적어도 예의는 차려주려 했거늘.”

“….”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메릭 로비안즈, 아니 마즈 로비안즈와 그의 일당들이라 해야 할까.”

“!”

“이름을 바꾸려면 아예 새롭게 바꾸던가, 원.”

모두가 호흡을 멈추고 떨리는 동공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19년 전, 너희들에게 텐젤 제국에서 어음 사기 사건으로 수배령이 내려졌지만 끝내 잡지 못했지. 나도 어릴 때여서 기억이 없긴 했지만 폐하께 정확히 이를 기억하시더군.”

‘젠장! 이럴까 봐 텐젤 제국에 오길 매번 꺼렸던 건데…!’

메릭은 허탈한 눈빛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잡아라. 두 번의 자비는 없으니.”

이안은 이 말을 마치고는 엘을 향했던 묵색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고 가벼이 돌아 대기하고 있던 하르힌과 함께 사라졌다.

“이런 망할!”

그들의 뒤로 메릭의 한 깊은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무시한 채.

⚜ ⚜ ⚜

“일단 하나는 처리되었다고 봐도 되는 걸까.”

리제아나는 필로렌치아 공작, 그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양귀비의 연결 고리만 막으면 사업의 돈줄은 끊기게 될 터였다. 하지만 한번 돈맛을 보았던 공작이니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릴 터였다.

“하지만 당장 그가 움직일 방법은 없어.”

리제아나는 이안과 함께 계획을 정리했던 책상에 앉았다.

이번엔 홀로 다시 깃털 펜을 잡아 새로운 계획이라는 제목 아래의 텅 빈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버지인 필로렌치아 공작의 기세가 한풀 꺾였으니 이걸로 회귀한 이유 중 하나를 이룬 셈이었다.

“라이핀….”

현재는 원수지만 과거엔 사랑했던 사람이던 그, 그에게 리제아나는 애증을 느꼈다.

그도 분명 복수의 대상이나 한 나라의 차기 황제이며 그녀는 현재 숨어지내야 하는 처지임을 떠올리고 들끓는 마음을 다잡았다.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란다, 리제.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을 명확히 알고 있어. 하지만 널 위해서였단다. 처음으로 해본 반항치고는, 꽤 재밌었지. 기억하렴, 널 위해서라면 난 언제든 위험을 무릅 쓰고 널 구할 테니.’

문득 친모 사브릴이 꼬마 숙녀인 리제아나를 앉혀두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차를 마시기 전 마지막으로 가장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던 유언과도 같은 말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까득 깨물며 텅 빈 양피지에 커다랗게 적었다.

잘 살기.

먼저 텐젤에서 영향력을 키워야 복수든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기꺼이 들은 칼의 끝은 언제든 라이핀과 필로렌치아 공작의 목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터였다.

⚜ ⚜ ⚜

-똑똑똑.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자 누군가 리제아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딱히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곳에 올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에 리제아나는 답했다.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나인 줄 알았어?”

이안은 햇살을 머금은 웃음을 띠며 문에 기대서서 손을 가벼이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공작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 방을 찾아올 사람은.”

“맞는 이야기군.”

이안의 수려한 얼굴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리제아나의 얼굴에 불안과 함께 기대가 번졌다.

‘놀려줄까….’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는 그답지 않게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리제아나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깔끔히 생각을 접었다.

“성공했지. 당신이 말한 대로, 그대가 태어나기 전에 있던 상단의 수와 현재 무역단 상단의 수를 굳이 비교해볼 것도 없었어. 메릭, 그레고리 상단주가 19년 전 꽤 유명한 사기꾼이었거든. 덕분에 더 그럴싸한 이유로 그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었지.”

“다행이군요.”

리제아나의 짧은 감탄이 나지막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비드에 보내지는 양귀비의 수도 본래 양보다 줄여서 보냈어. 단지 소속 상단에 범죄 집단이 있었다는 이유로 보내지 않는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니, 이번에는 재배가 평소보다 적게 되었다며 보냈지.”

“!”

“이것으로 한시름 놓았어. 양귀비 근처의 경비를 강화했거든. 다만 상대는 마국의 아비드이니, 양귀비를 우리 몰래 빠지고 나갈 가능성은 아주 크지만.”

이안이 고개를 연달아 주억거리며 문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리제아나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도 일단 벌어놓은 시간으로 인해 여유가 생겼지. 그 시간 동안 광각초를 가진 모든 텐젤 제국민들을 찾아 나설 생각이야.”

필로렌치아 공작의 사업이 고꾸라진다는 이야기에 리제아나는 오랜만에 들뜨기 시작했다.

“정말 말 그대로 성공적이네요.”

기분 따라 괜히 목소리도 높아졌다. 저렇게 신나보이는 얼굴도 할 줄 알았나. 그녀의 감정을 어렴풋이 눈치챈 이안은 그녀에게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하이파이브?”

“하이…파이브요?”

리제아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공했을 때 이렇게,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며 기념하는 것을 말해.”

그녀의 손을 자연스레 들어 올린 이안은 리제아나의 손바닥과 그의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맞부딪히며 고양이 같은 눈을 요염하게 올렸다.

때마침 적절하게 석양이 나타나 그를 비추어주었다. 리제아나는 그림 한 폭과 같은 자태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 믿으라고 했잖아. 물론 그대가 잘 짜준 덕분이기도 하고.”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복수’라는 것을 한 건가?”

“첫 단계죠.”

“이 정도면 선방이지.”

이안의 말에 리제아나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트나 할까?”

그때 이안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토해냈다.

마찬가지로 석양보다 진한 이채를 띠는 빨간 눈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눈부신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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