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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17)

14화

오늘 이안은 마법진을 통해 이동하는 대신,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다.

오랜만에 직접 데벤시아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황궁을 가는 것이다.

“더럽게 느리군. 정말.”

마차 너머의 풍경을 보던 이안이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빠른 것을 선호하는 이안으로서 마차는 질색이었다. 순간이동을 한다면 곧장 도착할 황궁을 30분씩이나 마차를 타야 한다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따라온 보좌관 하르힌이 잔뜩 서류 뭉치를 들고서는 덥다는 듯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원래 이렇게 느렸나?”

“매번 순간이동으로 이동하셔서 모르시겠지만 느리다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랍니다, 저하.”

즉 매번 순간이동으로 이동하는 이안에게 밖의 풍경도 좀 구경하라는 무언의 비꼬임이 담긴 말투였다.

“요즘 은근히 기어올라?”

이에 이안이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마차 바퀴가 미친듯이 돌기 시작했다.

이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의 경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던 이안의 매끈한 미간이 이내 주름을 잡았다.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하르힌의 뜨거운 눈초리 때문이었다.

말을 붙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하르힌의 시선에 이안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물어봐.”

“오늘은 어째서 마차로 이렇게 번잡스럽게 폐하를 뵈러 가시는 겁니까?”

정말 궁금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묻는 히르힌에 이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번잡?”

“어… 그니까…. 이안 님께는 말이죠. 이안 님께는 번잡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능숙하게 태세를 바꾼 하르힌의 태도에 이안은 그의 노력을 높이 사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있어. 그런 일이.”

“아… 그것이 끝…?”

넘어가 준다고 했지. 친절하게 모두 알려줄 마음은 전혀 없던 이안이었다.

“데벤시아 공작으로서 폐하를 뵈어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무심하게 턱을 받치던 이안이 작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벌써 즐거운 기분이었다.

⚜ ⚜ ⚜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 저하 도착하셨습니다!”

이안을 발견한 기사가 서둘러 목소리를 높여 그가 왔음을 알렸다.

“들어오라 해라.”

이미 황제도 이안에게 미리 편지를 받아 그가 오늘 말할 내용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

이안은 주변 보좌관들과 기사들을 한번 훑어봤다.

어쨌든 황제 앞이니 충성심이 가득한 공작의 모습을 보이는 게 맞겠지.

“제국의-”

하지만 본론에 더 관심이 있었던 황제는 손을 휘저었다. 체면치레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앉지.”

급하게 요청한 알현에도 황제는 기꺼이 응했다. 이안이 꺼낸 화두에 대해 꽤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약점을 잡았습니다.]

이안이 보낸 한 줄의 편지에는 이 한 문장만을 담고 있었다. 황제는 편지를 받기 무섭게 부리나케 그를 불렀다.

아비드의 막강한 세력 중 하나인 필로렌치아 가문.

아비드 황가에 필요한 물자를 모두 제공해온 필로렌치아 공작가는 눈엣가시였다.

막대한 부와 넓은 인맥까지. 아비드와 적대하는 텐젤에게 가장 방해되는 인물이었다.

아비드 제국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가문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어서 앉지.”

황제는 일레네에게 차를 부탁했다.

일레네는 공손한 자세로 저만치로 사라졌다.

방해꾼이 사라지고 둘만 남자, 황제가 번뜩이는 눈을 숨기지 않고서 이안을 건너보았다.

“그래서 알아낸 사실은?”

이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이 뒤로 재밌는 일들을 꾸미고 있더군요.”

“서두가 긴 걸 보아 괜찮은 정보일 테지?”

“필로렌치아 공작의 뒷세계 사업을 아십니까?”

“뒷세계 사업?”

꽤나 구미가 당기는 주제인지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계속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이안으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귀족들을 상대로 ‘퍼퓸니즈’라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하더군요.”

“퍼퓸니즈?”

“향수 사업입니다. 듣자 하니 수도 헤르깜냐에서 거대한 상점을 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것은 그저 눈속임용이고 실상은 또다른 진실이 있지요.”

이안의 말에 황제의 눈이 빛났다. 완전히 이야기에 빠져든 것이었다.

이안은 본래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에 있어 능수능란했지만 현재 그의 능변은 모두 순전히 리제아나의 말을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말한 것들을 그대로 황제에게 전하면 되는 건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주세요.’

그녀의 담담한 긍정에 이안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리제아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제가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비록 앞에 나서진 못하지만, 공작 저하께서는 대리인일 뿐이니까요, 그저 제 말을 따라주세요. 제 미약한 분노는 거기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도울 건 없나?’

‘제가 부탁한 자료들만 찾아서 넘겨주세요. 제 손으로 직접 마무리 짓고 싶으니까요.’

단호한 어투에 이안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

‘…이러려고 돌아온 거니까.’

리제아나의 단호한 눈빛이 은연중 떠오른 이안은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나 너무 찰나의 순간이기에 누구도 그의 웃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약한 분노’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했었지….’

잠시 라제아나를 떠올리던 이안은 이내 그녀에 대한 상념을 얼른 거두어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지 않은가.

이안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황제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필로렌치아 공작은 마약성 성분을 가진, 즉 광각초의 재료들로 향수를 만들어 귀족들을 상대로 팔고 있습니다. 그것도 꽤 비싼 값으로 말이죠.”

황제의 눈에 실망스러운 빛이 스쳤다.

“꽤나 장황하게 이야기하는군.”

황제는 눈썹을 비뚜름히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뒷세계는 어느 곳에나 있지 않나.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

또한 필로렌치아 공작은 더군다나 아비드 제국의 사람이다.

그가 텐젤 제국도 아닌 아비드 제국에서 어떤 사업을 하던 텐젤 제국은 그에게 어떤 제재도 할 수 없다.

황제의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미간을 모았다.

그런 황제에도 이안은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가 극적인 자세로 두 손을 펼쳤다.

단번에 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폐하 만약 필로렌치아 공작과 뒷세계의 이음줄을 저희가 쥐고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

미간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던 황제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황제는 이윽고 이들의 연관성을 깨달았다.

양귀비. 그것이 필로렌치아 공작의 사업을 망칠 열쇠였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아비드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텐젤 제국으로 여러 상단이 하나로 묶여 만들어진 ‘무역단’이 출발했다.

‘무역단’ 안에는 그레고리 상단 또한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황궁의 지원을 받는 번창한 상단의 모습을 했지만 필로렌치아 공작의 휘하 아래에 있는 상단이었다.

라이핀이 손가락 끝에 걸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알싸한 차향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빈민가까지 물건이 퍼졌다고 들었다.”

“경비가 더 삼엄해질 겁니다. 다른 쪽으로 슬슬 옮겨가심이….”

그의 건너편에서 필로렌치아 공작이 찻잔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들의 ‘사업’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 위해 무역단이 돌아오는 날에 맞추어 마련한 자리였다.

광각초와 관련한 사업을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를 두고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얼마간 이어졌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말에 라이핀이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위험한 도박을 생각하는 중이야. 안 그래도 리제아나의 행방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 내 제국을 아무리 뒤져봐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

“그 말씀은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 법이니까.”

라이핀은 왜인지 마음속 한구석에서 그녀가 텐젤 제국에 있을 거란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한 거라면 모든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라이핀이기에 더욱 그랬다.

전부터 리제아나는 그의 편에 서서 그에게 오롯이 헌신해왔으니까.

“물론 제 딸을 찾을 수 있다면야, 뭐든지 다 해보아야죠.”

“…누가 본다면 아주 지극히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이겠군.”

그의 비꼬는 어조에 필로렌치아 공작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했다. 가느다란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사랑하니까요.”

필로렌치아 공작은 차를 한 입 마시며 간단히 답했다.

그러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공작 너머로 들려왔다.

라이핀이 정말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그거 놀랍군.”

“그러는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지 않습니다.”

“나는 다르지. 적어도 그녀를 찾기 위해 발 벗고 찾고 있지 않나.”

“저도, 제 모든 것을 걸고 찾고 있습니다. 저희 모두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저 그 방식이 조금 다를 뿐이죠.”

공작의 말 뒤로 가벼운 정적이 흘렀다.

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공작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를 건너보았다.

어느 생각에 잠긴 듯 라이핀이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핀은 점차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왜일까.

라이핀은 조금 공작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사랑? 사랑이라.

공작의 말이 라이핀의 심연 어딘가에 놓여있는 어떤 감정을 건들었다.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조금 간지러운, 부정할 수 없는 리제아나를 향한 이름 모를 감정은 오직 그만이 정의 내릴 수 있을 터였다….

“…그건.”

“전하!”

라이핀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일라이자가 황급히 밖에서 그를 부르더니 방문을 열어젖히고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역단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저 무역단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기엔 그의 얼굴이 꽤 굳어있었다. 다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알겠다. 그런데 다른 일이 있나?”

“그것이… 필로렌치아 공작 저하께서도 계시군요….”

일라이자는 그제야 함께 앉아있던 필로렌치아 공작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자세를 매만지며 자세를 바로하며 인사했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건가?”

필로렌치아 공작은 일라이자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되레 일라이자가 말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공작님도 계실수록 좋습니다.”

“?”

“텐젤 제국에서 무역단들이 돌아왔으나…. 한 상단이…. 그레고리 상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그리고, 무역 물품 중 한 물품이 현저히 양이 적어졌습니다.”

“품목 하나 정도면 다른 곳에서 충당하면 될 텐데?”

“그것이… 그게 불가능합니다.”

필로렌치아 공작의 얼굴이 석상같이 굳었다.

“적어진 물품은… 양귀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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