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17)

13화

‘리제아나,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야.’

처음 무도회에서 만난 라이핀은 그녀에게 그리 속삭였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탕발림에 리제아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리제아나는 그 후로도 줄곧 라이핀만을 위해 살았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특히 그가 청혼하였을 때는 그녀는 행복에 겨워 영원히 그를 위해 살리라 결심했다.

‘나랑 결혼하자, 리제아나. 당신과 모든 것의 처음을 함께 하고 싶어.’

그의 청혼은 그녀가 라이핀에게 벗어날 생각도 못 하게 빠지게 했다.

라이핀이라는 사람에게 온전히 스며든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 그래… 처음이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말을 다시금 뇌까리니 우스울 뿐이었다.

배신도, 죽음도 모두 처음으로 선사해준 남자이니 어쩌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리제아나는 오랜만에 떠오른 옛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후회해봤자,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리제아나는 천천히 머릿속의 계획을 되짚었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 가문과 아비드 제국에게 그녀가 당한 만큼 돌려주리라.

천천히 그들의 숨통을 조일 계획이었다.

이제 리제아나는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도 아니며 더는 아비드 제국의 차기 황제, 라이핀을 사랑하지 않았다.

배신당한 여자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그녀는 여실히 보여줄 참이었다.

리제아나는 이안에게 할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그를 기다렸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린 셈이다.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모두 완성하고 나서 그녀는 음식을 가져온 하르힌에게 이안을 불러달라고 부탁했었다. 물론 그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똑똑

이윽고 노크 소리와 함께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다고 들었어.”

이안이 겉옷을 벗어 한쪽 어깨에 들춰 매곤 펑퍼짐한 블라우스 차림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늦어서 미안. 폐하께서 주신 업무가 오늘따라 많아서.”

그가 눈가를 짚으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그의 눈은 피로한 듯 많이 가라앉아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정도로 가깝지 않기에 리제아나는 고개만을 끄덕였다.

더욱이 리제아나는 과거, 라이핀의 배신으로 사람에게 신뢰를 가지기 힘들었다.

한번 배신당한 사람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니까.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다른 상처보다 더 깊어 그만큼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녀는 적당히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것으로 걱정을 대신했다.

“네. 그렇군요.”

물끄러미 응시하던 적빛 눈동자는 의외로 간단하게 갈무리된 대답에 흥미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그의 눈빛을 눈치챈 그녀가 그를 올려보자 그가 슬쩍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 먼저 이야기를 청하다니.”

활짝 열린 문에 기대 서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방 안쪽으로 더 들어왔다.

그의 그림자가 방 안쪽에 서 있던 리제아나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그녀는 대리석 테이블로 이안을 안내했다. 그가 그 자리에 도달하자 리제아나는 테이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의자 앞으로 도달했음에도 그녀는 앉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꼿꼿이 서 있었다.

“앉지 않고, 뭐해?”

참다못한 이안이 먼저 불쑥 물었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저보다 높으신 신분인 공작께서 먼저 앉아야 제가 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리제아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이에 되레 할 말을 잃은 쪽은 이안이었다.

아비드 제국이라면 분명 고귀한 신분의 그녀지만 그녀는 현재 망명하지 않았는가.

그가 아울러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리제아나가 대신 말을 이었다.

“황비도 뭣도 아닌 그저 텐젤 제국에 막 망명한 저니까. 공작 저하께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이것 역시 공작가에서 받은 하나의 가르침이기에 세뇌된 버릇 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필로렌치아 공작의 지휘에서 벗어났다 한들 몸에 익숙해진 습관이나 행동은 생각과 달리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필로렌치아 공작가에서의 교육은 여전히 그녀의 몸 곳곳에 녹아있었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이에게 양보를 권하며 분명한 예를 갖출 것.

비참한 죽음 뒤에 기적 같은 기회로 회귀하여 이곳까지 섰음에도 그녀의 이런 것들은 영 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문득 그녀는 비참해졌다.

그에게 공손하게 자리를 권하는 태도는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은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를 눈치챈 이안이 낮게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당신은…. 아니야, 앉지.”

왜 그렇게 침체된 얼굴인가. 라고 물으려 입을 열었으나 차마 이를 잇지 못하고 이안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리제아나는 책상으로 건너가 종이 뭉텅이를 손에 쥐고 그의 맞은편으로 드레스를 정리하며 앉았다.

“그래서 요점은?”

“황제 폐하에게 전달해주셨으면 하는 사안이 있습니다.”

“폐하께?”

“네.”

그녀가 또 황제에게 무엇을 전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에게서 겨우 목숨을 구하고 망명권을 얻어낸 것이 며칠 전인데?

그러나 왜인지 확신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건너보는 그녀에 이안은 질문을 삼켰다.

미간을 모으며 이안은 그녀에게 턱짓했다.

“…계속해 봐.”

“저는 현재 크로덴느 백작가의 영애, 델리사의 신분이니 폐하께 필로렌치아 공작에 대한 범행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건, 그가 비밀스럽게 진행하고 있는 뒷사업이니까요.”

“뒷사업?”

‘뒷사업’이라는 단어가 꽤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자타공인 텐젤 황국의 충성스러운 공작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책상에 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곧 다시 입궁할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그의 돌변한 태도에 리제아나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이안은 이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을 단숨에 채갈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그녀의 가문이었던 필로렌치아의 파멸은 곧 머지않았다.

“광각초를 만들 재료 중 가장 중요한 재료가 뭘까요?”

“듣기에 하나라도 없다면 광각초를 만들 수 없다고 들었다. 중요하지 않을 재료는 없을 테지.”

“아뇨. 있어요, 중요한 재료.”

“중요하다라…?”

“텐젤에는 있고 아비드에는 없는 재료가 있죠.”

“혹시….”

“네. 양귀비.”

조금 전 가져온 종이들을 그의 앞으로 가지런히 놓으며 리제아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양귀비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녀의 말에 이안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모으며 자세를 달리했다.

“그렇군. 양귀비를 이용하면….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용하겠다는 거지?”

“이걸 보세요. 여기 이 자료를 보면….”

그녀는 종이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하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언제 이렇게 이런 것들을 준비했는지.

마냥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또 나설 줄이야.

그녀가 하는 양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안은 턱을 괴고서 그녀를 소리 없이 훔쳐보았다.

역시 이상한 여자였다.

⚜ ⚜ ⚜

정확히 두 시간 후, 마탑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이안은 돌연 다시 찾아온 피곤함에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똑똑똑.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크 소리의 주인을 눈치챈 이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위스키 한 잔,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이안의 예상대로 찾아온 이는 보좌관 하르힌이었다.

“너는… 음, 쓸데없는 데에서 유능하다니까.”

한참 그를 바라보며 정확한 수식어를 찾으려던 이안은 재차 잠겨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대충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맡기신 업무를 처리하다 오셨을 테니까요. 그럴 것 같았어요.”

“귀신이네.”

이안은 하르힌의 거침없는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나지막이 터트렸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하르힌.”

이안이 그가 건네는 위스키 잔을 받아들며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하르힌 또한 쫄래쫄래 그를 따라가 얌전하게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모았다.

“듣고 있습니다.”

“너는… 아니다. 네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에게 저주에 대한 자세히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이안은 황제가 주는 특별한 약 외에 저주의 고통을 멈출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예외가 생겼다. 리제아나, 그녀는 황제와 주는 약과 마찬가지로 그의 고통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연일 뿐인지 알 수 없었기에 아직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이안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하르힌이었기 때문에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안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다만 하르힌은 그의 관대한 배려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공작 저하.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말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에 하르힌이 도끼눈을 드높이 치켜뜨고는 웅얼거렸다.

“알 게 뭐야.”

하르힌의 도발을 발로 차버린 이안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하르힌의 불평이 들려왔지만, 이안은 익숙하게 그를 외면했다.

이안의 상념은 황제에서 리제아나에게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혼자 짧은 시간에 복수 계획을 세웠단 말이지.’

처음 봤을 때부터 갑작스레 납치해달라 하지 않나, 당당하게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나 꽤나 당돌한 여자였다.

이안은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조사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종이 위의 글자를 가리키며 미간에 주름을 잡기도 했다.

문득 고개를 드니 하르힌의 성난 표정이 시야에 담겼다.

이안의 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매번 그의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거나 무표정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웃으면 어떤 모습이려나….’

문득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안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하르힌이 놀라 펄쩍 뛰었다.

“어. 왜 웃으세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하르힌이 짓궂게 살짝 올라오는 위스키의 독함에 취했는지 난데없이 그를 가리키며 웃었다.

“술 마시다가 그렇게 진하게 웃는 모습을 제가 본 적이 없는데요.”

“아니니 술이나 마셔라.”

하지만 취기가 몸을 살살 오르기 시작한 하르힌의 입은 이안의 맹수 같은 눈빛도 보지 못했는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가 이런 쪽에 조금 유능한데. 하하.”

“유능?”

“혹시… 방금 여자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유언이라면 잘 적어두도록.”

“….”

이안의 단칼 같은 대답에 입을 오므린 하르힌은 입술을 쭉 내밀고는 이안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실망하는 하르힌을 바라보며 이안은 나머지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렇게 눈치가 쓸데없이 좋은 녀석들은 역시 피곤하다고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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