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리제아나의 방. 이안은 정갈한 자세로 꼿꼿이 허리를 피고는 긴 다리를 우아하게 다리를 꼬아 올렸다.
“그대는 끝까지 답하지 않았어. 어떻게 내가 그녀를 납치할 것을 알고 있었지?”
말을 끝으로 이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잠시나마 부드러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흉흉한 살기만이 넘실거렸다.
잠깐 잊었다. 그가 황실의 소문난 미친개였음을.
“…천천히 알려드릴 테니 살기는 넣으시죠.”
이안의 일렁이는 붉은 눈을 바라보며 리제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그의 살기가 조금 갈무리 되자, 리제아나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죽었으며 전생에 겪은 일이다…라고 이야기해도 절대 믿지 않을 거야. 도리어 미친 사람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리제아나는 의심받지 않을 만한 말을 고르고 골라 입을 열었다.
“델리사 양이 매일 밤 신전에 기도를 올린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물론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안이 리제아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계속해보라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아비드의 신전은 자유로운 이동 마법이 가능한 곳이죠.”
마력이 활발하게 흐르는 아비드 제국.
넘치는 마력 탓에 이동 마법과 같은 고위 마법을 비교적 수월하게 발동시킬 수 있었다.
제국 안은 검증된 인물이 확실한 방문 목적이 있다면 절차를 밟아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건에서 유일하게 예외인 곳이 있었다.
바로 아비드 제국의 신전.
신전은 아비드 제국에서도 가장 마력이 넘치는 땅에 위치했다.
아비드 제국의 신전은 다른 제국의 사제들이 허가를 받지 않아도 마음껏 왕래할 수 있었다.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무언의 평화협정을 맺은 곳이었다.
그 때문에 전생의 이안 역시 그 점을 노려 들어온 것이다.
“아비드 제국의 신전이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법이지. 하지만 그곳에서 납치하리란 것은 어떻게 알았지?”
“조사를 했으니까요.”
“조사라고?”
순간 이안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런, 실수.’
리제아나는 사납게 빛나는 이안의 눈을 보며 침착하게 과거를 되짚었다.
델리사가 사라지고 황실은 혹 황태자이자 미래 그들의 주군이 될 라이핀의 심기를 거스를까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리제아나만은 달랐다.
그녀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해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텐젤 제국의 황제, 즉 황제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곁에서 은밀하게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인물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이었다.
그녀는 쉽게 그가 납치 사건의 범인일 것이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물론 결국 그녀가 델리사를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고 말았지만.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할 수는 없으니 다른 변명을 할 수밖에.’
리제아나는 그녀에게 향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여유 있게 마주했다.
“어서 말해. 이 작전은 기밀이었을 텐데, 언제 텐젤 제국의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가?”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저는 당연히 광각초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순식간에 김이 새버린 이안은 조금 살기를 집어넣고는 침착히 되물었다.
“광각초?”
“네. 비록 형식적인 자리였긴 했지만 저는 황태자비였어요. 그러니 텐젤 제국에 퍼진 광각초 사태에 대해서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죠.”
한번 떠오른 생각은 순식간에 리제아나의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졌다.
“텐젤에서 광각초 사건의 배후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라이핀이 회의를 끝내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쯧, 들키지 않게 움직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일 처리가 완벽하지 못해서야.”
이안이 혀를 차며 수긍했다.
“그래서 생각했었죠. 과연 이 상황에서 텐젤 제국이 움직인다면 어떻게 할까.”
자신의 이야기에 납득할 준비가 된 이안을 보고 리제아나는 자신감 있게 말을 이었다.
“아비드와 텐젤 사이의 기류를 잘 읽을 수 있고, 사라져도 크게 문제 되지 않으며, 광각초와 관련해 아는 것이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찾겠죠.”
“흐음….”
“라이핀의 진짜 사랑은 델리사…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져있는 데다가, 황비의 신분인 저는 타겟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리제아나는 한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말을 꾸며내는 것뿐이지만 어쩐지 입안이 씁쓸했다.
“만약 침투한다면 신전이 가장 손쉬운 루트일 것이 뻔하고…. 아무리 마법사가 희박한 텐젤 제국이라고 한들 고위 마법사가 아예 없진 않을 거라 생각했죠.”
‘고위 마법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잠시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아비드와 텐젤의 국가 관계가 가장 위태로울 때를 노려 델리사 대신 매일같이 신전을 찾아갔어요.”
“…….”
이안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행히 그에게서 의심의 눈빛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자신의 말이 완전히 먹혀들어 간 것을 직감하고 리제아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비드를 벗어나고 싶어서 해본 도박이었는데, 다행히 제 추측이 맞았네요.”
승기가 완전히 리제아나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에게 질문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대답이 충분히 됐나요?”
이안은 고민을 하는 듯 그의 하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공기 중에 남아있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그래. 당신의 생각이 맞아.”
더는 숨길 이유가 없으니 이안은 사실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아비드의 신전에 침투할 수 있는 건 쉬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뒷문은 마력을 조금만 집어넣어도 뚫리게 되어있더라고.”
리제아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한숨을 돌렸다.
“꽤나 영리한 포로님이었군.”
‘이번엔 포로님으로 부르네.’
아까는 황태자비님이라 불렀다가 어느새 다시 포로님이란 호칭으로 돌아갔다. 이안의 변덕스러움은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을 듯했다.
이안은 리제아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의 의문점은 완전히 풀렸다지만, 반대로 리제아나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특히 마법에 대한 것.
분명 텐젤 제국은 마법사가 희귀하다고 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고위 마법인 순간이동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았다.
“신전에 외부 마력을 주입하려면 꽤 강한 마력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더 고위급 마법사이신가 봐요?”
“아무래도 한 제국의 마탑주라면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그렇군요. 마탑…주…. …뭐라고요?!”
리제아나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뜬 채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너무 자연스레 흘려서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내가 크로덴느 백작영애를 납치할 건 알고, 마탑주인 것은 몰랐나 보지?”
이안이 그녀를 보며 조소했다.
리제아나의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했다.
마탑주라는 것은 예상 범주에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마탑주라고? 텐젤 제국에 마탑이 있다는 사실은 전생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그럼 여긴….”
“설명이 늦었군. 이곳은 마탑이다.”
리제아나는 납치된 첫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아, 걱정하지는 마. 어차피 여기는 내 전용 공간에 있는 지하 감옥이니 아무도 널 찾지 못해.”
‘그래서 아무도 날 찾지 못한다고 장담했군.’
리제아나가 아는 마탑주란, 마력이 가장 많고 그것을 유연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얻는 직책이었다.
황족과 이어지는 연줄이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직책.
‘어쨌든 누구든 나의 뒤에서 든든히 도와줄 힘 있는 자가 필요하니까.’
그의 일이나 직책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겨우 그의 의심에서 벗어났는데 더한 오해만 사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리제아나가 입을 다물자 이안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럼 피곤할 텐데, 쉬지.”
“저기, 잠시만요.”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건가?”
‘당연하지.’
텐젤 제국까지 왔는데 어떤 계획도 없이 왔을 리가.
리제아나는 생각해 두었던 다음의 계획을 위해 그를 붙잡았으나 왜인지 이안, 그는 더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입을 떼기 무섭게 그가 말을 가로막았다.
“뭐가 그리 급해서 또 다른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하루 만에 해결하려는 버릇은 좋지 않아.”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살풋 미간을 구겼다.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리란 걸 어떻게 알았지?’
이안은 그녀의 생각이 눈에 보이기라도 한 듯 그녀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앞으로 그대가 텐젤에 있는 동안 널린 게 시간이지 않겠어? 그러니 오늘은 조금 머리부터 식히고 마음껏 쉬어. 생각이 정리되면 언제든 불러도 좋으니.”
“하지만!”
“아니면….”
그가 리제아나에게로 가까이 고개를 내렸다.
“나랑 더 같이 있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요.”
“단호해라.”
능글맞은 그의 대답에 그녀는 확실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의 얼굴이 잘생긴 건 알았지만 그것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 다른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온 기회를 잡아야 했다.
리제아나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이안을 불러 세웠다.
“공작 저하.”
입술을 살짝 비튼 채로 리제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는 예의를 갖춘 채 이안을 불렀다.
“아까 망명권을 찾은 것은 제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 하셨죠.”
그의 쉬라는 만류에도 고집스러운 리제아나에 이안을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본래 계약은 저의 망명권을 얻어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제가 스스로 얻어낸 이상, 다른 걸 도와주세요.”
“흐음… 정확히 어떤 걸 도와달라는 거지?”
그 순간, 찰나였지만 아버지의 폭언들과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라이핀과 델리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왕관.
그녀를 향해 조롱 어린 미소를 보내며 라이핀의 품에 안긴 델리사.
제가 범인인 것인 양 손가락질하며 끝내 저를 가차 없이 베어버린 라이핀.
모두 지긋지긋했다.
리제아나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목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 아버지인 필로렌치아 공작과 남편, 라이핀에게 복수하는 것.
“아버지께, 그리고 라이핀… 그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직접 제가 나서진 못하더라도 치명적인 약점을 공격할 거예요.”
“복수라….”
“그것보단, 좋게 보답이라고 포장하죠. 그들이 주었던 것 하나하나가 모두 악몽 같았으니 더 큰 선물 하나를 보내는 것이라 그리 생각하고 있어요, 전.”
단호한 말이었다.
이안은 제 앞에 있는 여자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선물이라, 퍽 괜찮은 생각이네.”
리제아나가 올곧게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와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교차했다.
이안은 눈앞의 여성이 자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적국 소속의 황태자비이자, 누구보다 삶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며, 자신을 고통 속에서 구원해 줄 능력을 가진 여자.
“좋아. 계약 조건을 조금 변경해보지. 그대는 내가 필요로 할 때 항상 옆에 있는 대신, 나는 그대의 복수와 신변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리제아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쪽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겠군요.”
“앞으로 잘 부탁하지.”
이안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리제아나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