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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17)

11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눈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어느 밤보다도 짙은, 메마른 검은 눈이 흥미 있는 장난감을 보듯 이채를 띠었다.

고개를 기울인 황제가 주름진 웃음을 내비쳤다.

“분명 제 청을 들어주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뻔뻔한 황제의 예상 밖의 대답에 리제아나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이안을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쏘아봤다.

‘나를 살려준다고 했잖아요. 보호해준다면서!’

이내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황제를 고요히 응시했다.

심드렁한 표정.

리제아나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과 몸짓에 무료함이 가득했다.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그녀에게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허나 미안하지만….”

‘안 돼!’

리제아나의 등에 식은땀 한줄기가 흘렀다.

“폐하.”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온화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러 세웠다.

“델리사 양은 이미 조국을 버렸습니다. 이미 제국을 배신한 자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광각초라는 거대한 산을 넘을 해결책을 내주었으니, 또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안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델리사 양은 이미 우리 텐젤에 발을 들였고 저희 사정까지 모두 파악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거절하신다면 그녀에겐 죽음밖에 남지 않겠죠.”

“포로가 죽든 말든, 난 상관없는데.”

‘망할 황제, 목숨을 담보로 알려준 정보인데!’

리제아나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역시 텐젤의 황제였다. 원하는 것을 알아내자마자 태도를 돌변한, 피도 눈물도 없는 늙은 왕 앞에서 리제아나는 자신의 무력함에 더욱 치가 떨렸다.

“이 영애가 원하는 것은 망명권입니다. 만일 그녀가 아비드 제국에 돌아가고 싶다면 광각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꺼내지도 않았겠죠.”

마침내 이안이 입을 열었다.

“흠….”

“폐하의 넓은 아량을 베푸셔서 이 포로에게 망명권을 하사해주시지요. 그렇다면 분명 더 없는 관용에 기뻐하며 아비드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더 이야기할 겁니다.”

이안이 눈짓하자 리제아나는 허리를 펴며 더 당당하게 보일 수 있도록 턱을 높이 쳐들었다.

“공작의 말대로입니다. 어째서 제가 알고 있는 정보가 광각초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제아나는 언제 치를 떨며 황제를 바라보았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 모습은 과연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답게 우아했다.

“라이핀 옆에서 그동안 모든 것을 지켜봐 온 접니다. 아비드 제국을 부수는 방법은 수만 가지, 아니 수천 가지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당당함에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일전에 대비하지 않은 상황과 대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은 서로 아귀가 맞았다.

이안은 재빠르게 마지막 말까지 덧붙였다.

“제가 납치해온 장본인으로서 끝까지 책임지며 감시하겠습니다. 또한 수상한 동태가 있다면 곧바로 폐하께 보고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황제의 입꼬리가 힐끗 올라갔다.

“공작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다. 델리사 양에게 망명권을 하사하지.”

됐다.

기쁨의 전율이 짜릿하게 온몸을 타고 흘렀다.

쳇, 하고 네르아가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항상 미움만 받아왔던 리제아나로서는 이방인에게 미움을 더불어 받는 것쯤이야 익숙했다.

리제아나는 승리감에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일어나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이 순간 일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천천히 억눌렀다.

대신 우아함을 잃지 않고 완벽한 예법의 인사로 아담 황제에게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누가 알았으랴. 한 나라의 황비가 적국의 황제에게 살려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다니.

하지만 살기 위해서 리제아나는 언제라도 고개를 숙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럼 이제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르아, 먼저 돌아가 있도록.”

이안은 황제가 번복하기 전에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는지 리제아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네르아의 시선이 이안에게 꽂혔다.

일말의 기대가 섞인 눈이었으나 이안은 무심하게 네르아의 시선을 비껴갈 뿐이었다.

“공작 저하….”

보다 못한 네르아가 이안을 불러보았지만 이안이 냉랭하게 네르아에게 어서 물러나라는 재촉의 시선을 보냈다.

못내 입술을 깨물며 네르아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애써 목 뒤로 말을 삼켰다.

평소와의 이안과 다른, 낯선 모습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의 말인 만큼 네르아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폐하, 저도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르아는 황제와 이안에게 인사하고 그 자리에서 마법진을 펼쳐 사라졌다. 분에 겨운 듯 입술을 비튼 채로.

한편 이안의 부축 또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일어난 리제아나는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알현실 문으로 향했다.

“수고했어. 당신 손으로 망명권을 따낸 거야.”

이안이 리제아나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시에 그녀의 손을 묶고 있던 로프를 풀어주었다.

꽉 묶여있던 손이 자유를 찾자 리제아나는 생경한 느낌에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 느낌은 뭘까. 과연 답답한 손목이 풀려서일까, 아니면 처음으로 찾은 자유 때문일까.

“다시 또 볼 날을 기대하지.”

등 뒤로 황제의 인사가 들려왔다.

이안과 리제아나는 그런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안이 무겁게 닫혀있던 알현실의 문으로 손을 뻗었다.

끼익-

이에 리제아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금빛의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눈 부신 빛이 쏟아지며 그녀를 반겼다.

동시에 이안의 목소리가 리제아나의 귀에서 아른거렸다.

“정식으로 텐젤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해. 망명한 황태자비님.”

⚜ ⚜ ⚜

한편 아비드 제국의 황실은 한 차례 분주해졌다.

다름 아닌 황태자의 아내인 황비이며 장차 황후가 될 사람이자 한 제국의 권력을 쥐고 있는 공작의 딸이 사라졌다. 황실의 혼란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일단 비밀에 부쳐. 다른 귀족들에게는 최대한 평소와 같이 보여야 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라이핀이 여러 서류를 들고 온 일라이자에게 시선을 올리며 뇌까렸다.

가뜩이나 겨우 리제아나를 방패로 내세워 그동안의 일들을 벌이던 라이핀이었기에 더더욱 그 일을 델리사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집무실 앞이 어수선해졌다.

시종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일라이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였다. 고개를 끄덕인 일라이자가 라이핀에게 입을 열었다.

“델리사 양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델리사 양을 들여오라고 할까요?”

“…나중에 오라고 해. 지금은 황실 일들이 더 급하니.”

항상 델리사라면 거절하지 않고 마냥 고개를 끄덕이던 라이핀이었지만 그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서 그녀를 거절했다.

미간을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 보고는 내가 드리러 가지.”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이핀의 말에 일라이자는 군말 없이 허리를 숙여 손에 들려있던 서류 뭉치를 종류별로 정리한 후,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끔 집무실을 나가는 것을 택했다.

현재 라이핀의 신분은 비록 황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형제가 없었기에 가장 유력한 차기 황제였다.

현 황제가 병으로 쓰러진 후, 여전히 그는 침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라이핀은 유일한 후계자로서 공식적으로 황제는 아니나 황제의 역할을 모두 해내야만 하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가장 쓸모가 있던 리제아나를 욕심을 부리면서까지 곁에 두었다.

‘잘했어.’ 아니면 ‘당신을 곁에 두어서 행복해.’

몇 마디 말이면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던 편한 인형이었다.

“그런데 왜.”

라이핀이 무거운 눈을 짓누르며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감정에 라이핀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명백히 낯선 감정이었다.

⚜ ⚜ ⚜

“오셨습니까? 각하.”

알현실을 나온 후, 이동 마법으로 황궁을 빠져나온 이안과 리제아나가 마탑의 정중앙에 나타났다.

“우읍, 이건 한 번 겪었어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리제아나가 이동마법의 후유증으로 휘청거리며 말했다.

멀리서 깔끔한 정장 차림의 머리를 뒤로 넘긴 녹색 머리의 낯익은 남성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리제아나를 가볍게 붙잡아준 이안은 그들에게 달려온 남성을 소개했다.

“여긴 하르힌. 내 충실한… 보좌관이라고 해두지. 저번에 감옥에서도 봤으니 초면들은 아닐 테니.”

“하르힌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힌’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만…. 이 분은 전에 그…! 이안 님! 설마…!”

본래 납치 대상인 델리사가 아닌 다른 여자를 데려온 이안을 떠올린 하르힌은 경악했다.

정말로 왕을 속이기로 작성이라도 하신 걸까?

어찌 이리 대담한 일을! 자칫하다 황제의 눈 밖에 나면 다치는 건 이안 님이거늘!

하르힌은 이안의 답지 않은 행동에도 그 나름대로 잘 처리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데! 마탑에 정중하게 모셔오실 줄은 몰랐지!’

다만 하르힌은 차마 그 말까지는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애써 목 뒤로 쓰게 삼켰다.

“당분간 함께 지낼 손님이시니 알아두도록.”

“하, 하지만…!”

“내가 안내할 테니 이제 가서 일 보도록 해.”

“아뇨!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하르힌은 이안과 리제아나를 흘끗흘끗 보며 지금의 상황을 더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하르힌.”

그렇게 새로운 손님을 관찰하며 훑던 순간, 낮은 목소리에 순간 하르힌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안 가?”

이안이 그에게 은근히 살기를 뿌리며 압박했다.

‘이런.’

일전에 그의 살기를 경험해 본 하르힌은 더욱 압박당하기 전에 내빼기로 했다.

하르힌은 조심스레 이안의 심기를 살피며 답했다.

“그,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누가 있을까. 특히나 그 상대가 이안이라면, 더더욱 피해야만 했다.

하르힌은 재빠르게 이안과 리제아나에게 인사를 하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르힌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천천히 리제아나에게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많은데. 따라와, 먼저 방을 보여줄게.”

“이곳이 어딘지 먼저 묻고 싶네요.”

“먼저 따라와. 이야기할 것이 많으니.”

막무가내로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안을 따라갔다.

‘아직은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할 테니, 손님방이라도 내준다면 그걸로 감지덕지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랬었는데.

“이게 제 방이라고요?”

이안이 안내해준 방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무늬의 대리석 테이블.

화려한 금속 장식을 한 가구들에, 군데군데 놓인 화분과 커다란 침대가 그녀를 맞이했다.

“피곤할 텐데 좀 앉지.”

망명한 처지라 손님방보다 더 좋은 방을 내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방안을 둘러보던 리제아나는 이안의 말에 주의를 돌렸다.

두 사람은 방 한편에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각자 의자에 앉았다.

“자. 이제 급한 건 해결됐으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떤걸요?”

하지만 이안은 마냥 그녀를 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누어야 할 대화와 함께 꼭 풀어야 할 궁금증들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내가 신전에 나타나 크로덴느 백작영애를 납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결국 이 대화를 피할 수 없음을 빠르게 눈치챈 리제아나가 흘끗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끈질긴 사람을 보았나.

“좋아요, 그토록 원하신다면 말씀해드리죠.”

약간의 거짓과 일말의 진실을 교묘하게 섞기로 다짐한 리제아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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