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리제아나가 제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주먹을 쥐던 찰나, 문 너머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폐하! 양귀비를 채취하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
‘양귀비?!’
리제아나는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에 리제아나의 입술이 커다란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녀 옆에 있던 이안을 제외하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라우라 여신은 아무래도 제 편이었나 보았다.
“광각초의 마지막 재료는….”
마지막 재료가 떠올랐으니.
“양귀비입니다.”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양귀비는 텐젤 제국 특유의 후덥지근한 기후에서만 자라나는 독초였다.
환각과 경기를 일으킨다고 알려졌지만 소량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약초로 쓸 수 있었다.
텐젤 제국에서는 의학 목적으로 양귀비를 수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양귀비가 광각초의 마지막 재료라니.
“갑자기… 양귀비라?”
리제아나의 발언 이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알현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다시금 맴돌았다.
“그렇습니다, 폐하. 분명히 양귀비입니다!”
“텐젤에서밖에 보기 힘든, 이 양귀비를 우리 텐젤은 의학 목적으로 이를 사용하지. 물론 그대의 제국인 아비드에게도 수출해.”
“맞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비드 제국이 감히 우리의 물품으로 광각초를 만들어 이 사태를 초래하고 있단 말인가?”
순간 또다시 위화감이 공간을 휘감았다.
리제아나는 이 질문에 섣부르게 답할 수 없었다.
텐젤 제국의 특산물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양귀비를 불법적으로 사용하다 못해 그를 텐젤에 밀입국까지 했다.
이는 국가 간의 불화, 혹은 운이 나쁘다면 전쟁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제가 관여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저도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폐하께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광각초의 마지막 재료가 아닐까 싶습니다.”
“….”
황제는 그녀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리제아나는 이 틈을 타 말을 이어갔다.
어디서 솟아난 용기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끈질기게 이 논쟁을 이어가야 했다.
“저는 광각초의 제조 과정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그 전에.”
리제아나가 황제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이안이 당황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리제아나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와 하셨던 약속을 먼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적국의 포로인지라 제 목숨 하나는 건지고 싶거든요.”
꽤 호기로운 말투였다.
제법 건방지기도 했고.
이는 자존심 높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오히려 황제의 흥미를 끌었다.
“생각보다 꽤나, 재미있는 포로구나.”
황제는 제 턱에 덥수룩하게 난 턱수염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네르아도 얼마 전 실험을 한다며 양귀비 채집자들을 따라갔었지, 아마?”
황제가 리제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르아는 마탑 소속의 약초 마법사였다.
최근 양귀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채집자들을 따라갔던 것을 상기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렇습니다, 폐하.”
“마침 잘되었군.”
커다란 손뼉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간에 은은히 울렸다.
“채집자들을 모두 물리고 네르아와 소량의 양귀비만 들여보내게.”
리제아나를 향한 황제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인질의 말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한번 알아보자고.”
⚜ ⚜ ⚜
“제국의 태양, 아담 텐젤 티베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네르아의 알현을 허락하자 알현실의 커다란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얀 와이셔츠에 바지를 입은, 주황색 머리를 깔끔하게 높이 묶은 여성이 산뜻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아비드 제국과 정반대의 복식이었다.
‘바지에 묶은 머리를 한 여성이라. 아비드 제국에서는 천박하다 손가락질받을 만한 복장이었을 텐데.’
리제아나는 새삼 자신이 정말로 텐젤 제국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래. 채집은 어땠지?”
“폐하의 넓으신 은혜와 채집가분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왔습니다.”
네르아는 황제와 이안을 번갈아 보며 한껏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따스했던 눈빛은 리제아나를 본 순간 아주 싸늘하게 식었다.
‘뭐야, 날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당황한 리제아나에게 여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꽂혔다.
“한데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여자는… 누구옵니까?”
‘이런.’
이안이 네르아의 태도를 눈치채고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네르아는 이안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어린 나이에 버려진 네르아를 이안이 데려온 아이였다.
초반에는 누구보다 그를 경계했지만, 지금은 이안의 일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를 끔찍이도 위하는 녀석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안과 관련된 일에서 간혹 네르아가 그 선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이안은 그런 네르아의 신경이 리제아나에게 쏠리기 전에 집중을 돌렸다.
“최근 하르하제 북부 빈민촌에서 발생하고 있는 광각초 사태를 알고 있겠지?”
“그럼요.”
네르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요즘 이안이 특히나 골머리를 썩고 있는 것인데, 최측근인 자신이 이를 모를 수가 있나.
게다가 겨우 공수한 광각초를 분석해 봤지만 복잡한 구성에 마지막 재료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분께서 광각초의 마지막 재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셨다.”
“네…? 설마요, 저도 찾기 힘들어했던 재료인걸요.”
네르아가 사실을 부정하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의 심정은 이해한다만, 사실이다 네르아.”
황제가 이안의 뒤를 이었다.
“이 영애의 말로는 양귀비의 잎이 광각초를 완성시킨다 하더군.”
“…양귀비요? 제가 지금까지 연구해온 그 양귀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풀리지 않는 실마리에 머리도 식힐 겸 채집가들과 함께 양귀비 외에 다양한 약초를 공부하고 왔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 여성이, 누가 봐도 포로로 보이는 이 여성이, 광각초의 마지막 재료가 양귀비라고 말한다니.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격이었다.
“네르아. 황제 폐하의 앞이다.”
이안이 네르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큼. 폐하께서도 말씀하시는 사안이라면, 이미 검증된 사실이라는 뜻이군요.”
“아니. 그래서 너를 부른 거다.”
네르아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재료들을 준비해주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광각초를 만들 수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저돌적인 황제의 명령에 리제아나가 움찔했다.
‘지금 바로 앞에서 만들 줄이야….’
리제아나는 메말라버린 입술을 살짝 깨물며 침을 삼켰다.
분명 기억은 확실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한편 네르아도 다짜고짜 광각초를 만들어달라는 황제의 발언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폐하, 말씀하셨던 재료들 모두 구해왔습니다.”
황제의 보좌관이 재료를 가지고 귀신같은 타이밍에 등장했다.
“아, 그래.”
황제는 네르아에게 손짓으로 다가오라 명령한 후에 그녀에게 건넸다.
“광각초를 만드는 법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몇 번이고 수도 없이 반복해오던 과정이었다.
네르아는 혹여나 재료들이 바스러질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최대한 손에 힘을 빼고서 재료들을 옮겼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폐하.”
⚜ ⚜ ⚜
광각초를 만드는 과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재료를 식별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고 융합하는 데에 약간의 마력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마법사가 부족한 텐젤 제국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 향을 봉인해두겠습니다. 환각과 경기를 일으키는 풀들은 면역이 없는 자들에게 꽤나 치명적이거든요.”
‘저 사람은 마법사인가?’
리제아나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네르아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잎 하나하나에 손을 대자 핑크색 빛이 손에서 흘러나오더니 금방 사라졌다.
그 다음, 향이 봉인된 재료들을 차례로 빻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재료들이 골고루 찢어지자 마지막 재료인 양귀비를 넣었다.
리제아나는 침착하게 지켜봤다.
‘성공해야 해. 해야만 해.’
성공 여부에 따라 리제아나의 목숨이 갈린다.
모두의 시선이 네르아의 손끝으로 향했다.
어느덧 재료가 다 준비되자 네르아는 그 위를 손으로 덮으며 읊조렸다.
“Coalescență (합체)”
휘이이잉.
그녀의 손바닥에서 주황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지막한 바람 소리가 짧게 공간을 맴돌다 사라졌다.
꼴깍.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의 적막이 흘렀다.
“…되었습니다, 폐하.”
이안과 황제 그리고 리제아나와 네르아까지 새로이 탄생한 하나의 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이 광각초….”
‘성공했다.’
리제아나가 과거에서 보았던 그 광각초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보좌관! 네르아를 데리고 지하 감옥의 죄수에게 저것을 시험해보고 오거라.”
“예, 폐하.”
황제의 명령에 잠시 자취를 감춘 두 사람은 몇 분 뒤 돌아왔다.
네르아가 황제의 앞에 한걸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결과를 고했다.
“성공했습니다, 폐하.”
만족스럽지 못한 성공이 더 찝찝한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비록 광각초를 제조한 것은 자신의 힘이었을지라도 정작 결정적인 재료는 포로가 말한 것이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성공에도 불구하고 네르아는 그저 입술을 세게 짓씹을 뿐이었다.
“드디어 광각초 제조에 성공했구나!”
황제는 네르아의 보고에 더없는 기쁨을 표출하며 왕좌의 팔걸이를 두어 번 톡톡 건드렸다.
리제아나가 올려다본 황제는 이안의 눈과 같은 새빨간 머리에 절묘한 진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미세하게 올라간 눈꼬리는 단연 긴장할 수밖에 없는 위엄을 동반하고 있었다.
“제법인걸, 델리사 양.”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는 묘한 조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국가 문제를 해결할 열쇠라고 느끼는 동시에 여흥으로 여기는 듯했다.
“덕분에 네르아가 해독제 만드는 것이 더 쉬워지겠어. 그렇지, 네르아?”
황제는 네르아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 것으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무, 물론입니다. 폐하. 곧 좋은 소식을 들고 오겠습니다.”
네르아가 답하자 더 보조개가 주름과 함께 깊게 그의 얼굴에 박혔다.
‘이때다.’
분위기가 풀어지기를 기다렸던 리제아나는 황제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짓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
리제아나는 제 주군이 아닌 적국의 주군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불렀다.
“조국을 배신한 결과입니다. 폐하께 도움이 되었으니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적나라했다.
성급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이미 망명권을 약속해주었으니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을, 굳이 제 입으로 언급한 리제아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남의 손을 빌려 제 의사를 대신하는 것에 지쳐버린 그녀였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쟁취하고 싶었다.
변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으니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망명권입니다. 폐하.”
리제아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텐젤 제국에서 머물게 해주세요.”
“흐음, 망명권이라….”
리제아나의 말을 들은 황제는 재차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동시에 꼰 다리를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글쎄, 한낱 포로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