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리제아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매끄럽게 복도를 걷는 이안을 뒤따라 걸었다.
텐젤의 황궁은 아비드의 황궁보다 투박하나 그 특유의 우아함이 있었다.
아비드의 황궁과 같이 대단한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지 않았으나 복도와 계단과 같은 내부 구조물의 크기가 대단히 컸다. 텐젤 제국다운 황궁이었다.
문득 그녀에게 발을 맞춰 천천히 걷던 이안이 흘끔 그녀를 바라보았다.
‘떠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군.’
이상하단 말이야. 여러모로.
이안은 다른 말 없이 그를 따라 복도를 걷는 리제아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한 그에게 그녀는 오히려 그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듯이 뻔뻔히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런 대담함이 이안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리제아나에 대한 의심은 쉬이 거둘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곁에 있으라는 유예 기간을 따로 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줄지도 모를 이였다.
그날, 그녀의 손길에 터질 것 같던 심장과 머리를 조여오던 두통이 점차 가라앉았고 이내 정상적인 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적국의 포로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복수를 향해 이를 갈고 있는 이 여자는 매번 치장만 하던 자신이 아는 제국의 영애들과 달랐다.
심지어 지금도, 적국의 황궁을 둘러보고 있음에도 걸음걸이는 여상하게 우아했다.
그녀는 황궁의 내부를 슥 한번 둘러볼 뿐, 초조해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안은 그의 의문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황제를 만나면 어쩔 생각이야?”
“황제께서 원하는 것을 드릴 생각입니다.”
“그게 광각초?”
“네. 아비드의 황태자비인 저니 잘 알고 있죠. 무엇보다 텐젤은 그 문제로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의 열쇠를 쥐고 있고.”
“자신만만하군.”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일을 앞두었을 때 떨기만 해서는 변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였던 그녀는 여러 시안을 다루어 왔다.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불안한 마음을 한편으로 미뤄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알현실 앞이었다.
“방심은 하지 마. 텐젤의 황제는 잔인하니.”
이안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 ⚜ ⚜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거대한 장식이 박힌 커다란 문 앞.
텐젤 제국의 상징인 은빛용이 새겨진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의 등장을 우렁찬 목소리로 알렸다.
굳게 닫힌 황제의 알현실이 이내 천천히 열렸다.
이안은 블랙 엠페라도 바닥 위에 깔린 레드 카펫을 성큼성큼 밟아가며 황제에게로 전진했다.
밧줄로 두 손이 묶인 리제아나가 그 뒤를 따랐다.
“네가 이렇게 늦게 보고하러 오다니. 무슨 일이지 공작?”
중후한 중년의 남성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텐젤 제국의 황제, 아담 텐젤 티베라였다.
위압감이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할 뿐입니다.”
“짐이 광각초에 신경이 곤두선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리제아나의 귀로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광각초.’
향을 들이마시면 정신이 반쯤 돌아가고, 입에 대면 운이 나쁘다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천만한 풀.
혹은 환각에 미쳐버린다는 위험한 물건.
견고한 마법을 사용해야만 완성되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그 악명 높은 풀을 리제아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이맘때쯤 텐젤 제국 북부에 위치한 빈민가에서 광각초가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마법사가 귀한 텐젤 제국에서는 광각초를 만들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그 말은 즉, 그 악명 높은 풀이 외부에서 유입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광각초는 단순히 마법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광각초는 정교한 배합에 따라 수십 가지의 식물을 섞어 마법으로 융합해야 만들 수 있었다.
‘분명 아버지, 아니. 필로렌치아 공작이 손을 쓴 거겠지.’
필로렌치아 공작이 오랜 시간 공들여 연 거대한 향수 가게 퍼퓸니즈.
아비드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이 가게는 철저히 귀족을 상대로만 문을 열었다.
겉으로 보면 휘황찬란한 향수 사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퍼퓸니즈.
하지만 실상은 비리로 가득한 더럽고 검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그곳에서 파는 것은 금지된 독초들을 한데 모아 만든 향수였으니까.
하나에 집 한 채보다도 더한 값을 요구했지만 미치도록 중독적인 향으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방대한 양의 독초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적국에 풀만큼 황실에 충성심이 강한 사람은 리제아나가 아는 한 딱 한 명뿐이었다.
필로렌치아 공작.
리제아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퍼퓸니즈를 통해 광각초를 극비리에 유통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저 뒤에 있는 자가 크로덴느 백작영애란 말이지?”
황제가 이안의 뒤에 묶여있는 리제아나를 손짓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안이 묶여있는 리제아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올라가는 계단 바로 밑에 그녀의 무릎을 꿇렸다.
“하하하! 드디어 쓰레기 같은 아비드 제국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겠군.”
황제는 비열한 웃음을 미친 듯이 흘렸다.
“내가 공작에게 광각초의 출처를 밝히고 해독초를 찾아오라 명령했지. 그리고 네가 짐의 앞에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알고 있습니다.”
델리사가 납치된 이유는 오롯이 광각초에 있다.
라이핀의 정부인 그녀니 광각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거라 여긴 텐젤 황제였으니 아마 그녀에게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 분명 광각초의 출처는 아비드 제국 황제. 그 애송이의 짓인 건 확실하겠지만 이 심증을 구체화할 증거가 필요했다. 그놈의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사람 말이야.”
리제아나는 황제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녀가 이 상황을 타파할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원래는 황태자비를 데려오려 했지만, 소문에 따르면 그 애송이에게는 따로 은애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더군.”
리제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코웃음 쳤다.
‘델리사가 납치를 당한 이유가, 정말로 그딴 이유 때문이었다니.’
리제아나는 더욱 독이 올랐다.
델리사의 납치 사건 때문에 그녀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델리사의 납치 마저 라이핀의 그 망할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이라니!
아담이 웃음기가 싹 가신 목소리로 이를 악다문 리제아나를 향해 말했다.
“델리사 양?”
아담의 목소리에 잠시 짙은 고요가 알현실을 감돌았다.
황제가 그녀를 느릿하게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편 이안은 긴장 어린 눈빛으로 리제아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아 남김없이 텐젤 제국에 모두 고해주마. 절대 내가 델리사라는 걸 들키지 않을 테다.’
황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알현실을 울렸다.
“자, 델리사. 이제 광각초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
황제의 말에 리제아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당한 태도만큼 상대를 속이는 좋은 방편은 없다.
리제아나는 곧은 눈으로 황제를 바로 바라보았다.
“광각초의 출처는 저희 아비드 제국이 맞습니다.”
“호오?”
“그리고 뒤에서 아비드 황실을 지원해주는 가문은….”
리제아나는 숨을 삼키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비드 황태자비의 가문, 필로렌치아 가입니다.”
그 더럽고 검은 사업은 다름 아닌 리제아나의 가문에서 모두 벌인 일이다.
제 가문을 다른 이의 것인 양 리제아나는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서 말했다.
이제 리제아나에게 그녀의 가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제아나는 더욱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던 황제가 왕좌에 앉은 채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느냐.”
“중요한 것이라면 혹?”
“광각초의 제조법.”
왕좌 위에서 느긋하게 그녀를 내려보았다.
황제의 뜻밖의 질문에 리제아나는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설마하니 제조법을 물어볼 줄이야.’
정말 텐젤 제국은 광각초의 중요한 정보를 그녀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황태자와 연관된 자니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라이핀은 과거의 그녀에게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떠맡겼지만 광각초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
필로렌치아 공작과 비밀리에 회견을 가지며 광각초를 기밀에 붙이던 아비드 황실이었다.
‘망할, 기억이….’
리제아나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회귀 전 필로렌치아 공작의 서재에서 우연히 스치듯 보았던 향수 조제 재료를 떠올렸다.
탑노트 - 허브.
미들 노트 - 다투라, 코카잎.
그리고….
라스트 노트 - 발사믹.
독초들이 끝없이 나열된 조제 재료들은 제법 충격적이었다.
향수의 첫 향기와 끝 향기는 평범했으나, 중심부 역할을 하는 주된 향기가 문제였다.
그리고 불우하게도 적혀있던 재료 중 그 마지막 하나가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해야 해. 반드시.’
리제아나는 다 터버린 아무 죄 없는 입술을 있는 힘껏 짓씹으며 살기 위해 궁리했다.
“대답이 없군.”
황제가 눈썹을 들썩이며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위험을 감지했다.
‘이대로라면 목숨이 위험하다.’
“얻어낼 정보 하나 없는 포로는 필요치 않다. 대답하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
황제가 그녀를 재촉하며 그의 옆에 선 호위병에게 눈짓을 보냈다.
호위병의 손이 허리춤에 찬 칼집으로 향하는 걸 본 이안은 미간을 모았다.
그 붉은 머리칼과 같이 불같은 성정을 지닌 황제였다.
누구든 자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필요 없다 여길 때면 그는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이안에겐 그녀가 필요했다.
이안은 정갈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입을 열었다.
“폐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이지?”
검을 뽑으려던 호위병의 팔이 멈췄다.
이안은 집중을 돌리기 위해 말을 이었다.
“아비드 제국은 저희 조국과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쪽에서 저희가 먼저 선제공격을 가게끔 유도하고 있지요. 네, 광각초로 말입니다.”
“그래서?”
황제의 반문에 이번엔 리제아나가 나섰다.
“공작님의 말씀대로 정확한 증거 없이 심증만 있는 지금으로서는 아비드 제국이 하는 도발에 하나하나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수록 텐젤 쪽에서는 저를 인질로 잡아두어야 이득이 되지 않습니까?”
리제아나의 말에 황제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
황제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리도 대담하다니. 공작이 엄청난 포로를 잡아 왔군, 그래.”
황제가 누그러진 틈을 타 이안이 리제아나에게 눈짓했다.
이제 정말 당신의 패를 보여야 해.
그의 눈빛을 읽은 리제아나는 입매를 굳히곤 그녀가 설득해야 하는 바에 더 집중했다.
리제아나는 열심히 기억을 되짚으며 입을 열었다.
겨우 잡은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폐하. 제가 감히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이라?”
“광각초의 재료를 알려드린다면,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 모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쉽게 걸려들 것 같지 않은 황제였지만,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안은 황제에게 엄청난 신뢰를 얻고 있는 듯했다.
“좋다. 대신, 거짓일 시에는 끝을 장담할 수 없겠군.”
리제아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발, 내가 알고 있는 재료 중에 있어야 하는데.’
“…먼저 다투라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코카잎도 들어갑니다.”
“그다음은?”
리제아나는 모든 재료를 줄줄이 말했다.
마지막 한 가지만 빼고.
“…도 들어갑니다.”
“모두 아는 것들뿐이군. 하지만 그 재료들로 광각초를 만들지 못했어. 중요한 재료가 한 가지 더 있을 텐데?”
‘젠장.’
리제아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재료를 황제 역시 다 알고 있었다니.
문제의 마지막 독초가 선뜻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는 것은 그것뿐인가?”
호위병의 손이 다시 한번 검집으로 향했다.
이안 역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한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생각하자. 생각해 리제아나! 두 번째 생을 이렇게 쉽게 마감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