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7)

8화

그의 물음에 리제아나는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처절한 죽임을 당한 그녀가 과거로 회귀 왔다고 믿을까.

전생의 원한을 위해 장차 아비드의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말은?

아마 지금까지 보아온 이안의 모습으로 감히 그의 태도를 추측해보자면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그녀를 베어낼지도 몰랐다.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회귀했다고 말해도 믿을 리가. 차라리 거짓말을….’

아니 이안, 그는 거짓을 말해도 곧바로 알아차릴 것 같았다.

아비드에서 겪은 일들만 살짝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도….

아비드 제국의 일을 털어놓을까 고민하던 그녀는 미간을 구겼다.

갑작스레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끔찍한 기억들이 불현듯 그녀를 덮쳤다.

델리사와 함께 반지를 끼며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던 라이핀, 자신을 깔보던 델리사, 그리고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올리던 공작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단지 그저 찰나였을 뿐인데도, 리제아나는 다시금 분노에 입술을 조금 세게 깨물었다.

한참을 말 않고 있자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꽤 복잡한 사정인가 보군.”

리제아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 감히 동정도, 이해도 누구에게서든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 무미건조한 남자의 간단한 소감이 도리어 그녀의 맘에 들었다.

“복잡한 건 나도 질색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안의 눈은 그의 말과 달리 호기심이 어린 빛을 띠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그 눈빛을 무시하고 그녀 앞의 음식에 집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었는지 그가 화제를 돌렸다.

“…황실에 간다는 거 기억해? 계약대로 그곳에서 망명권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

“텐젤 제국의 황제에게 드디어 갈 수 있게 된 거로군요.”

리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다만, 황제 폐하의 앞에서 포로님은 델리사가 될 거야.”

“아비드 제국의 델리사?”

“그래. 내가 원래 납치하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잊진 않았겠지? 만약 당신의 정체를 들킨다면….”

그가 더 말을 잇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최후를 맞게 될지 알 수 있었다.

황제마저 속인 죄로 아마 텐젤 제국만의 끔찍한 형설로 그녀는 고통스럽게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동안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악녀의 탈을 쓰고 허울뿐인 황비의 역할을 하며 살았던 리제아나였다.

이제 연기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걱정 따위 할 필요 없어요.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 있으니까.”

새 삶을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 델리사의 탈을 쓰는 일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좋아. 믿음직스러워. 하지만 대신 한동안 내 곁에 머물러야 하는 건. 잊지 마.”

이안의 입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렇지. 그는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

리제아나는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던 그와 계약하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 당신의 옆에 있어야 하는지 이야기는 나눠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당신에게 휘둘릴 생각 없어. 죽었다가 깨어나도.”

리제아나의 복수에 이안의 존재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까지 그의 옆에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이제 더는 과거의 그녀처럼 누군가에게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그녀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단호한 요구에 이안은 그저 미적거릴 뿐이었다.

“글쎄. 누구에게 더 유리한 계약 조건인지 떠올려봐.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망명권을 얻을 수 있게 해주며 황제에게도 데려갈 거야. 당신은 그저 옆에만 있으면 되잖아?”

“그 기한을 확실히 정해. 지금.”

좀 채 누그러뜨리지 않는 그녀에 이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확실히 정해줄게.”

이안의 적안이 반짝거리며 그녀를 내려보았다.

“내가….”

리제아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그를 향해 몸을 낮추었다.

“내가 원할 때까지.”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창살 밖으로 나서 감옥문을 걸어 잠갔다.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면 되잖아.”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창살을 붙잡고서 그에게 따지는 리제아나에 이안이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황제를 만나는 일 아닌가? 황제를 만나기까지 준비나 잘하고 있어-”

감옥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 리제아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하지. 아비드 제국의 파멸을 위해서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걸.’

⚜ ⚜ ⚜

리제아나가 텐젤 제국에서 생사를 건 줄타기를 하던 시각.

아비드 제국은 그녀의 예상대로 리제아나의 실종 사실조차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리제아나는 라이핀에게 있어 잘 찾아오지도 않는 음침한 아내였다.

그래서 라이핀은 공식 행사 외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리제아나를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랑스러운 델리사가 있었다.

“라이!”

“델리사!”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차 한 잔과 함께 오전 정무를 정리한 표를 바라보던 라이핀의 귀에 봄같이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리제아나와 달리 종달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델리사.

라이핀은 델리사를 바라볼 때면 리제아나와 비교하곤 했다.

그조차도 모르게 매번 델리사의 행동거지, 말투, 손짓을 그녀와 비교했다.

“뭐 하고 있어요?”

“오전 정무를 보고 있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에이. 우리 사이에 꼭 일이 있어야 했나?”

“그랬지 참. 하하하.”

라이핀과 델리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델리사는 라이핀의 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이리저리 비볐다.

델리사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이 풍겼다.

“아 이런.”

“이런데도 가만히 있을 거예요?”

델리사는 순식간에 달아오른 라이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델리사가 고개를 들어 라이핀과 시선을 맞추는 순간, 라이핀은 못 참겠다는 듯이 델리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라이핀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은 책상 위로 놓인 지 오래였다.

까르르 웃은 델리사는 라이핀의 목덜미를 잡아 제 몸과 그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그들의 아침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야릇하게 흘러갔다.

누군가가 방의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똑 똑.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더 두드리는 강도가 세졌다.

쿵 쿵 쿵.

눈살을 잔뜩 찌푸린 라이핀은 언짢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구냐!”

“…황비 전하의 시녀 벨리타이옵니다.”

문 너머로 어린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라이핀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안겨있던 델리사를 제 품에서 내리고는 말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벨리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벨리타의 걱정 가득한 얼굴에 라이핀의 미간이 좁혀졌다.

황비궁 소속 시녀이니 분명 리제아나와 연관된 일일 터였다.

“그것이…. 비 전하께서 어젯밤에 신전으로 기도를 드리러 가셨으나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고 계십니다!”

“뭐라?”

“분명 어제 신전에 가실 때, 흑.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호위 기사 몇 분과 함께 모시러 갔는데 아침까지 나오지 않으셔서….”

벨리타가 당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지금 리제아나가, 황태자비인 그 리제아나가, 사라졌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전하. 제발 비 전하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미간을 구긴 라이핀이 눈물을 흘리는 벨리타를 바라보았다.

리제아나가 단 한 번도 사라질 거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거란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라이핀이었다.

항상 그가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그를 보필했고 말하지 않아도 척척 일을 해내는 리제아나였다.

그런 그녀가, 사라졌다니.

라이핀은 리제아나가 필요했다.

그가 이 아비드 제국을 이끄는 데에 있어 여전히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한 그녀이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라이핀의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더더욱 라이핀은 아직 리제아나가 필요했다.

“일라이자에게 오전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 전하게. 지금 당장 기사단을 꾸려 신전으로 가야겠다.”

왜인지 목이 타 라이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썼다. 어느새 식어버린 모양이었다.

라이핀은 짜증스럽게 커피잔을 탁자 위에 조금 큰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아직은 조금 남아있던 커피가 그의 손 위로 흘렀다.

빌어먹을.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한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당황한 일라이자가 서둘러 제 앞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손을 닦아주는 동안 라이핀은 물끄러미 시선을 돌려 델리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는지요, 전하?”

“…아니다.”

“부끄럽습니다, 전하. 오호호.”

여전히 예쁜데.

그 음침한 리제아나보다 훨씬 사랑스러운데.

매우 매력적인 여성인데.

왜인지 오늘따라 그녀를 보면 뛰던 심장이 잔잔했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한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여기서도 리제아나가 문제임이 분명했다.

그녀가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골치 아플 일은 없었을 터였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라이핀은 델리사의 볼에 짧은 뽀뽀를 하고는 일라이자에게서 겉옷을 건네받으며 걸어 나갔다.

“다녀오세요!”

평소라면 델리사의 종달새 같은 목소리에 라이핀의 몸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해야 할 터였다.

평소대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라이핀은 델리사를 향한 본능과 이성이 리제아나에 의해 조금은 뒤처진 상태였다.

“곧바로 신전으로 간다.”

“예, 전하.”

‘리제아나가 사라졌다, 라….’

애초에 이미 다 끝나버린 관계 아니었던가.

⚜ ⚜ ⚜

리제아나는 창살에 가로막힌 감옥의 창가 앞에 섰다.

리제아나는 굳은 입매를 하고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오늘, 텐젤의 황제를 알현한다.

그녀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될 터였다.

오늘로 그녀가 회귀한 지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회귀 전, 그녀가 아비드 제국에서 라이핀과 델리사에 의해 목숨을 잃은 그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비드 제국이 아닌 텐젤 제국에 있다.

‘내가 알던 과거가 바뀌고 있어. 이대로라면….’

리제아나는 들끓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황제에게서 인질이 아닌 망명자로서 인정을 받으면 텐젤에서 자리 잡기는 어렵지 않을 테다.

무엇보다 리제아나는 황제에게 아비드 제국의 망각초에 대한 비밀을 밀고함으로써 망명권을 따내야 한다.

‘할 수 있어.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어떤 악을 쓰더라도 이뤄야 해.’

리제아나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감옥으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녀가 몸을 돌리니 창살을 열고 선 이안이 있었다.

“갈까?”

나오라는 듯 몸을 돌리고 선 이안의 앞으로 리제아나는 당당하게 발을 내디뎠다.

“네.”

텐젤의 황제를 만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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