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리제아나는 바닥에 쓰러진 이안을 두고서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굴던 그가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굴렀다.
그는 정말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며 가슴께를 잡아 뜯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 있는지도 몰랐던 태양의 문신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그의 눈도 붉게 빛났다.
“이게 대체…?”
리제아나는 창살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뒤로 물러섰다.
급작스럽게 고통을 호소하는 그가 리제아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비드 제국에서 리제아나는 이안에게 다른 지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회귀한 후에도 그랬다.
“으윽….”
그에게서 물러나 있던 리제아나는 그의 신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찌 되었든 이 감옥에서 그녀를 꺼내줄 유일한 남자였다.
“공작? 이봐요 공작?”
그를 불러도 이안은 신음만을 흘릴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급히 주위를 살폈지만 지하 감옥에는 그녀와 그, 두 사람뿐이었다.
리제아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거야! 난 아직 당신이 필요하다고!”
리제아나는 창살에 가까이 다가갔다.
“망할! 정신 차려,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
그녀의 외침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리제아나는 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의 몸을 흔들어서라도 눈을 뜨지 못하는 그가 정신이 들게 해야 했다.
감옥 안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까진 거리가 멀었다.
리제아나는 할 수 없이 그녀 지척에 놓인 그의 손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마침내 그의 손을 붙든 리제아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은 그대로 익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문득 그에게서 흘러나오던 신음이 멈췄다.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이안에게로 리제아나는 급히 시선을 올렸다.
‘정, 정신이 든 건가?’
“후우…. 당신이야?”
그의 긁는 듯한 목소리에 신음에 가까운 부정확한 호흡이 섞여 나왔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다고 느꼈던 그의 목소리가 끈적이게 들려왔다.
“내가 시간을 잘못 계산했을 리가 없는데….”
그의 목덜미에 자리했던 태양 문양은 어느새 빛을 잃고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손바닥을 붙든 리제아나의 손으로 향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저주가 풀린 거지?’
이안이 기억의 파편을 더듬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사이에서 그녀가 자신의 손을 움켜쥔 사실을 떠올렸다.
“이봐. 당신.”
이안은 생명줄인 양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안은 본능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는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태양의 문양은 빛을 잃었지만 아직 열기는 뜨거웠다.
아직 저주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리제아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 손 놔! 난 단지 당신, 정신 차리라고….”
“잠깐 한 번 더 손 좀 빌리지.”
그의 커다란 손이 이번에는 부드럽게 리제아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타오르는 듯한 열감이 느껴지던 태양의 문양이 점차 식어갔다.
가슴을 옥죄던 심장의 고통 역시 잦아들었고, 이내 황제의 곁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편안함이 온몸을 잠식했다.
“…이건.”
이안은 리제아나의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건.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제아나에게는 텐젤 제국의 황제와 비슷한 힘이 있는 듯했다.
반면 영문을 모르는 리제아나의 머릿속은 아직도 의문투성이였다.
갑작스럽게 눈앞의 남자가 짐승처럼 변했고,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멀쩡해져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손을 잡으니 나아졌어.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한 걸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채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꽤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는 조금 전과 같은 일이 꽤 익숙한 듯이 보였다.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턱을 짚고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좋아, 포로님. 한 가지 제안하지.”
생각에 빠져있던 리제아나는 자신을 부르는 이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안?”
“제국에서 아무 도움 없이는 혼자 지내기 힘들 거야. 내가 공작의 신분으로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주지.”
“대신 내게서 뭘 원하죠?”
그가 슥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필요할 때, 지금처럼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
적국의 납치범과 감옥 안에 갇힌 포로 사이에서 나오기엔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상황이 달랐다면 꽤나 로맨틱하게 들렸을 테지만.
“그렇다면….”
그러지 않아도 리제아나는 적국에서 어떻게 새 삶을 시작할지 막막하던 참이었다.
망명권을 얻는 것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인 목표인 라이핀과 가족에 대한 복수까지.
리제아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그 고통이 나와 관련이 있을 수도….’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를 더 요구할 수도 있을 터였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그를 향해 쳐들었다.
“좋아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가장 먼저 제 신원을 확실히 해줘요.”
“신원이라?”
“공작 전하에게 언제까지나 계속 매여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 혼자 텐젤 제국을 돌아다녀도 괜찮을 신원을 원해요.”
리제아나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이안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새 삶을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 텐젤의 미친개와 함께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좋아. 그럼 계약 성립이야.”
이안의 입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웃었다.
⚜ ⚜ ⚜
감옥 문을 나서며 이안은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식으로 태양의 저주를 억제할 방법을 찾을 줄은 몰랐는데.
이안은 목 뒤에 있을 저주의 문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각하.”
그때 그의 주머니에 있던 동그란 통신 마도구 너머로 하르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데.”
“그….”
“뭐냐고 물었다.”
“그게요….”
하르힌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안 그래도 리제아나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그였다.
하르힌의 뜸 들이기에 그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셋 세기 전에 말해.”
“….”
“셋.”
“…….”
“둘?”
“….”
“하나….”
“황실입니다! 황실에서 각하께 전언을 보내셨어요.”
초를 세는 일은 그의 한계치가 극이 달할 때 나오는 버릇 같은 것이었다.
저번에 여유를 부리다가 셋을 초과한 하르힌은 한 달 동안 두꺼비로 변한 채로 생활해야 했다.
그 후로 하르힌은 다시는 이안에게 까불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장난스레 굴기도 하지만, '셋'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마법처럼 그는 이안의 말을 곧잘 따랐다.
“황실?”
“예…. 각하께서는 항상 임무를 완수하시면 끝나자마자 폐하께 소식부터 보내셨지 않습니까?”
“그랬었지…. 이런.”
황제의 성격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특히 그가 이번 일은 황제가 크게 신경쓰고 있는 일이었다.
“젠장.”
이안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욕설을 고대어로 낮게 으르렁거리며 내뱉고는 손을 펼쳐 황실 전용 양피지를 끌어냈다.
그다음,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양피지 위에 우아한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안 데벤시아입니다. 납치에 성공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겠습니다. 그럼.]
간결하고 짧은 메시지였지만 닦달하는 황실을 달래주기에는 한없이 충분한 정보였다.
하르힌에게 거의 던져주다시피 양피지를 건넨 이안은 이만 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황실에서 보낸 건 아예 열어보지도 않을 생각이십니까?”
“뻔해. 원하면 네가 읽어보던지.”
하르힌이 슬쩍 편지를 열어보았다.
정기 의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계약에 따라 태양의 각인이 발동될 거라는 협박을 돌려 전하는 글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갖다 버려.”
이안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하르힌이 난로에 편지를 던졌다.
황제가 지금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안은 장작 속 불에 타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불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불이 더욱 거세게 치솟아 올랐다.
활활.
더 불타올라라.
이안은 차가운 시선으로 불을 내려보았다.
황제의 최후 역시 그리될 것이다.
신은 믿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열렬히 기도하고 있었다.
⚜ ⚜ ⚜
“아침인지 새벽인지.”
눈을 뜰 때마다 그녀를 맞이하는 건 천장뿐이었다. 덕분에 리제아나는 현재의 시간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었다.
그저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의 짙음에 따라 낮과 밤만을 겨우 구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그저 미웠다.
회귀해서 돌아오면 뭐하나,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던 자 때문에 감옥에 되레 갇혔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안은 그녀가 무슨 제안을 하든 능청스럽게 넘기며 무시했다.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감옥의 짙은 회색빛 바닥을 노려보던 있던 리제아나의 귀에 딸깍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 문이 열린 것이다.
“포로님.”
이안의 어조는 놀랍도록 항상 엉클어짐 없이 유연했으며 한없이 다정했다.
전날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안은 여유롭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또 가져왔어.”
이안이 전과 마찬가지로 접시를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빵과 우유. 이번엔 김이 피어오르는 수프 그릇도 함께였다.
이번엔 리제아나는 군말 없이 그릇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언제 이 감옥을 나가게 될지 모르지만 그녀로서는 체력과 힘이 필요했다.
앞으로 이 거친 텐젤 제국에서 적응해나가야 할 그녀니까.
리제아나는 수프를 한 숟갈 퍼 올렸다.
따뜻한 수프에 절로 몸이 풀리는 듯했다.
그녀 앞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서 그런 그녀를 주시하던 이안이 뜬금없이 말했다.
“포로님이 곧 황궁에 가게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죠?”
리제아나는 뜬금없는 이안의 말에 미간을 찡그리며 이안이 그녀를 납치한 첫날 밤에 주고 간 윗옷을 내밀었다.
“내게 제안했던 거 기억 안 나? 텐젤의 황제가 널 보고 싶어 하더군.”
깨끗하지 않은 감옥에 있던 옷이다 보니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먼지가 묻어있었다.
이안은 리제아나가 내민 윗옷을 받더니 아공간을 만들어 그 안으로 옷을 집어넣었다.
쓰레기통으로 직행 되는 통로였다.
“광각초 때문이군요.”
“그래. 광각초는 마법사의 힘을 넣어 개화시키지만, 씨앗 자체는 어디선가 얻어오는 것 같더군.”
이안은 리제아나의 시선을 쓰레기통 공간에서 돌리기 위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아직 본론이 남아 있었다.
“그 출처를 알아내는 것이 델리사를 납치하려는 목적이었지.”
“이해합니다. 광각초를 아비드에서 뿌리고 있다는 정황이 필요하겠죠.”
리제아나는 금방 수긍했다.
앞으로 이 남자와 함께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리제아나는 흘끔 이안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당신을 어떻게 부를까요? 계약까지 확실히 맺었으니 이제 저희는 서로의 계약자이니 호칭도 정리해야죠.”
“이안이라 불러.”
“이안.”
리제아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좋아요. 이안. 저도 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할 참이었어요.”
“텐젤 제국에 오자마자 황제를? 배짱 한번 좋군.”
“네. 텐젤 제국에 오겠다고 결심한걸요.”
“그 이야기는 다른 뭔가가 있어 텐젤 제국에 왔다는 이야기군.”
역시 이 남자 범상치가 않다. 단번에 눈치를 채다니.
리제아나는 눈을 빛내는 적안의 남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비드 제국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왔음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겠다고,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러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절망…. 그래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복수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가?”
“네. 처절하게 그들을 짓밟을 거예요. …반드시,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
“왜요? 왜 그렇게 봐요?”
그녀를 말없이 빤히 바라보는 이안에 리제아나는 물었다.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가 잔인한 복수를 결심한 일이 무엇일까….”
이안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물으면 알려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