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니 각하!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으신 분이 도대체 왜 이번에는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지하 감옥에서 나오기 무섭게 하르힌 그를 다그쳤다.
하르힌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안은 귀 아프게 울리는 하르힌의 목소리에 미간을 구겼다.
“하르힌.”
그의 신경질적인 부름에 하르힌은 그를 나무라기 위해 열었던 입을 닫았다.
분명 아까 리제아나는 이안을 '공작'이라 불렀다.
아직 그녀는 그의 대외적인 위치밖에 모르는 듯 보였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그는 텐젤 제국의 높은 명예를 가진 공작 중 하나였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작위일 뿐.
그의 실질적인 위치는 마법에 능통한 네 명의 마법사를 거느리는 텐젤 제국의 유일한 마탑주였다.
상업, 문화면에서 여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아비드 제국과 달리 텐젤 제국은 군사력이 중시되었다. 하지만 마법은 텐젤 제국에서 보기 드물어 마법사는 그 존재가 굉장히 가치 있는 인력이었다.
그 때문에 국력의 기반인 마법사들은 더욱 외부에 숨겨야 할 인재들이었다.
특히 데벤시아 공작 가문은 대대로 마력이 흘러넘치는 마법사 집안이었다.
그 덕분에 데벤시아 가문은 황실과 종신 계약을 맺어 제국에서 압도적인 권력과 재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그의 심장에 걸린 저주와 텐젤 제국의 황실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대가가.
후에 황제의 그림자라는 자격으로 마탑이 세워졌다.
홀로 마탑을 관리하기에 힘에 부쳤던지라 이안은 19세의 나이에 직접 온 제국을 돌아다니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마탑에 머무르며 제국을 지탱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데벤시아 공작가의 보좌관이자 마탑의 두 번째 마법사인 하르힌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법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마탑주 님께서 어찌 이 쉬운 걸 틀린단 말입니까!”
하르힌은 지하실에서 나오고부터 그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갈 때까지 한숨을 쉬며 잔소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르힌. 지하 감옥에 근래 빈 공간이 많더군.”
“네, 네?”
이안은 무심히 하르힌에게 시선을 주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녀에 관한 이야기로 귀찮게 굴면 그중 하나가 너의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어.”
하르힌은 희게 질리며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 ⚜ ⚜
마탑의 어느 고요한 방안, 어둠 속에서 수정구슬에서 빛이 뿜어나왔다.
수정구슬이 빛나자 이안은 기다린 듯이 입을 뗐다.
“폐하, 최근 텐젤 북부의 빈민가 지방에서 광각초가 나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대도 동의한 것처럼 의회 귀족들도 모두 동의한 바이다.]
수정구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이안은 제 앞에 드리운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쓰레기 같은 아비드 제국이 일을 냈군.]
현재 텐젤 제국은 아비드 제국과 적국 관계로 수면 밑에 드러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재배가 법적으로 금지된 광각초가 다수 풀린 정황이 포착됐다.
이 풀의 향을 들이마시면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 만큼 이성이 마비됐다.
만일 풀을 직접 삼키게 된다면 운이 나쁘다면 죽음에 이르거나 혹은 환각에 미쳐가다 마력 반발 때문에 마수로도 변할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다.
이 끔찍한 광각초는 견고한 마법을 통해 완성된다는 정보만 소문으로 돌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이안은 그리 생각했다.
분명 텐젤에서 놓친 무언가가 아비드 제국에 있을 터였다.
마법사가 부족한 텐젤 제국에선 광각초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안에게 내려진 명령은 이러했다.
[광각초의 출처를 밝히고 해독초를 찾아라.]
광각초의 출처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정확한 증거를 찾아줄 인물이 필요했다.
“이안.”
황제 아담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불렀고 눈빛으로 이안은 황제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안의 말을 끝으로 수정구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폐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감당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르힌이 뭐라고 떠들어대던 이안은 서류들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귀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자함이었다.
이안은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기초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선택한 가장 쉬운 방법은 인질 포획이었다.
하르힌의 정보력에 따르면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 라이핀 아비드 베네딕트에게는 황태자비가 있다고 했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가진 우아하지만 악랄하다고 소문난 황태자비 리제아나.
그리고 그 옆에 라이핀의 숨겨진 비밀 연인인 분홍색 머리칼에 노란 눈을 한 백작가의 영애, 델리사까지.
소문을 조사한 결과 리제아나보다는 델리사의 존재가 라이핀에게 있어 더 소중함이 틀림없었다.
이에 이안은 당연히 델리사를 대상으로 납치를 실행하려 했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델리사는 당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납치했던 델리사를 다시 아비드에 던져놓는 수고나 하겠죠.’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
소문처럼 밤하늘 같은 검은 머리에 고결한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
‘그러니까, 날 납치해. 당장.’
음침한 줄만 알았는데 대신 납치해달라고, 스스로 포로가 되겠다며 나서는 그녀는 꽤 강단 있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지.”
간만에 호기심이 피어오른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재밌네.”
“뭐가요? 대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철저히 하르힌을 무시한 이안은 손을 뻗어 서류 하나를 찢었다.
“알 거 없어. 누구도 보지 못하게 폐기해.”
본래의 납치 대상이었던 델리사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서류 자료였다.
⚜ ⚜ ⚜
잠에서 깬 리제아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부스스 몸을 털었다.
아직 딱딱한 바닥에 적응하지 못해 온몸이 뻐근했다.
리제아나는 몸을 풀기 위해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를 깨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 눈치 볼 이유도, 그럴 사람도 없었다.
더구나 비록 감옥이긴 했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잠을 잔 적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라이핀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뛸 듯이 기뻐하며 델리사를 당장이라도 황비로 맞을 심산인 듯 보였으니까.’
잠시 스트레칭을 멈추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리제아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굳이 위로 올려다보지 않아도 저만한 키를 가진 인간은 드물다.
“데벤시아 공작.”
리제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언제 보아도 강렬한 적색 눈동자에 시선을 잠시 마주쳤다가 이내 다시 내리깔았다.
어젯밤은 근원 모를 불꽃 같은 충동적인 감정에 이끌려 다행히 납치 계약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밤이 지나 아침을 맞은 리제아나는 그날 밤, 불꽃처럼 타올랐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일말의 불씨조차 남지 않았다.
사실 회귀 후의 용기가 안심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아비드 제국에서 벗어났기 때문인 걸까.
“포로님 잘 잤어?”
다행히 이안의 차갑지만, 웃음기가 담겨있는 특유의 저음이 리제아나에게 꿈이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자는 것 말고 제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리제아나의 답변에 이안은 뭐가 웃긴지 짧게 웃었다.
“풋. 지하감옥은 이제 익숙해진 모양이네.”
“익숙해졌다…는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 같습니다만.”
리제아나는 여전히 아주 작은 금도 가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 리제아나에게 그가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빵과 우유를 담은 접시였다.
“아침이야.”
“딱히 배고프지 않습니다.”
“먹어.”
하지만 정말로 리제아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한테 도움이 되려면 먹고 힘내야지.”
음식을 거부하는 리제아나를 쳐다보며 삐뚜름하게 웃은 이안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포로님이 내 말을 거부할 자격이 없어. 포로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으니까.”
“뭐 그런….”
“그러니까, 먹어. 좋은 말로 할 때.”
이안이 접시를 감옥 안으로 밀어 넣으며 붉은 눈을 휘었다.
감옥에 마음대로 넣은 것도 모자라 하다못해 이젠 음식도 먹으라 마라.
“이안 랜디 데벤시아 공작. 적당히 하시죠.”
이렇게 감옥에 갇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델리사와 라이핀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미안하지만, 난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게 아냐. 당신에게 델리사를 납치하라 명했던, 그리고 내가 정보를 건네줄,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거야.”
“뭐?”
이안의 목소리에 동요가 일었다.
화악, 고조되는 분위기에 주변을 밝히던 마나 또한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치솟기 시작한 마나가 리제아나를 휩싸듯 밝히고 있었다.
“내 쓸모는 아담 황제 앞에서 완성될 거라고. 당신이 아니라.”
그리고 드러난 리제아나의 표정은 이안을 압도하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헛짓거리 그만하고 아담 황제에게 안내해. 포로 놀이에 어울려주는 것도 이젠 흥미 없으니까.”
처음이었다.
텐젤 제국의 유일한 마탑주로 자신을 압도한 이는 없었기에 당연했다.
더욱이 리제아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수를 모두 읽혔던 그로서는 리제아나의 존재 자체가 해괴하기 짝없었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건, 아비드 제국을… 무엇보다 라이핀과 델리사를 쳐 죽이기 위해 못할 게 없다는 거야.”
증오와 원망으로 뭉친 사람의 눈이 제 앞에 선뜩하게 비쳤다.
“그런데 이딴 감옥에 날 가둬두고 애완동물 취급하면 내가 어떤 기분일 것 같니?”
이안은 그녀가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얼마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녀에 대한 의문이 한둘이 아니다.
그가 그곳에 나타나, 델리사 영애를 납치하려던 것까지 모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안은 분노로 형형한 눈을 한 리제아나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군. 고분고분하지 않은 포로의 끝이 처참하다는 건 아이라도 아는 사실 아닌가? 그대로 끝을 보고 싶나?”
“목숨 따위는 전혀 아깝지 않아! 그러니….”
리제아나가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이안의 멱살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놀라 리제아나에게 속절없이 끌려간 이안에게 악다문 잇새로 그녀가 속삭였다.
“열어. 내가 여기서 혀 깨물고 죽으면 당신 또한 소득 없이 황제의 발닦개에 그치고 말 테니.”
“하? 뭐라? 발닦개?”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이안이 미간을 구겼다.
날짐승의 그것과 같이 형형한 눈으로 리제아나를 바라보며 이안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었다.
-찌릿
그가 갑작스럽게 목덜미를 붙잡았다.
“큭…!”
이안은 붕대로 감싸고 있던 그의 목 뒤에 새겨진 태양 문양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태양 문양의 저주.
이안이 데벤시아 공작가의 순수혈통이라는 증거인 동시에 고통의 증거.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높이 떴을 때 발현되는 저주는 마치 심장이 베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이 저주는 오직 그의 주군인 텐젤 제국 황제의 곁에서만 잠잠해졌다.
그 이유로 이안은 항상 날짜를 계산하며 주기적으로 황실에 입궁해왔었다.
“…젠장.”
그는 열기가 느껴지는 목 뒤에 저주의 문양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미간을 구겼다.
‘계산에 따르면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황제가 보낸 편지에도 분명…!’
“무슨…?”
“신경… 꺼…. 별… 것… 아니니까.”
리제아나에게 대꾸한 그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러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바닥에 붙은 듯 그대로 멈추어 섰다.
끔찍한 고통이 불헌 듯 그를 덮쳐왔다.
“이안 공작?”
이윽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으윽…!”
신음을 흘린 그가 그대로 중심을 잃으면서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
“아직. 시간이 분명 남았, 크윽….”
이안은 고통스럽게 그의 옷깃을 쥐어뜯으며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산대로라면 분명 내일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도 아닌데 어째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주저앉은 그가 결국 힘없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