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으우읍-”
매번 황궁 안에 앉아 업무만 보던 리제아나의 몸은 공간이동 마법을 견디기엔 너무나 나약했다.
속의 음식물이 모두 역류할 것만 같았다. 마치 영혼이 몸 밖으로 뛰쳐나가는 듯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가 어지러워하는 리제아나를 탄탄한 근육질의 팔로 받쳐주었다.
리제아나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이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지러운 거였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
“포로님, 다 왔어. 정신 차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리제아나는 재빠르게 이안의 품에서 벗어났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니 밤바람이 느껴지는 곳이 아닌 고요하지만 서늘한 곳으로 이동한 듯 보였다.
본능적으로 곁의 무언가를 잡고 선 리제아나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여기? 포로님께서 지낼 곳.”
이안은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을 튕겨 저편으로 순간 이동했다.
자신이 기대던 지지대가 사라지자 리제아나의 몸이 휘청했다.
끼익-
동시에 거대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마치 철창 문 같은.
“안전한 곳이야.”
리제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잡고 있던 무엇인가가 유독 차갑고 단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주위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고작 횃불 몇 개만이 공간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설마.”
섬뜩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아, 걱정하지는 마. 어차피 여기는 내 전용 공간에 있는 지하 감옥이니 아무도 널 찾지 못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빛나는 빨간 눈이 리제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리제아나는 제가 처한 현실을 깨닫고 철장을 붙잡았지만 달리 변하는 것은 없었다.
‘미친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리제아나는 확신했다.
‘지하 감옥이라니.’
미친개란 별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리제아나는 철장을 붙잡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리제아나는 철장을 힘있게 당겼으나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리제아나는 철장 너머의 적안의 사내를 보며 미간을 짚었다. 감옥에 갇힌 그녀의 처지가 당혹스러우나 두렵진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어. 한번 죽어본 목숨인데, 달리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그렇기에 회귀로 인해 얻은 천금 같은 기회를 그녀는 놓칠 수 없었다.
텐젤 제국의 ‘미친개’라 불리는 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무사히 적국 텐젤 제국까지 도착했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그 태도와 성격이 꽤나 거친 사람.
다행스럽게도 그런 남자를 설득해 여기까지 왔다.
다만 남자는 적국인 텐젤 제국의 공작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리제아나가 의심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텐젤 제국은 아비드 제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니까.’
또한 처음 보는 여자가 초면에 다짜고짜 납치해달라고 하며 스스로를 포로로 던지는데,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리제아나는 침착하게 이안에게 고개를 들었다.
“안전한 곳이 정말 이 지하 감옥뿐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말 그대로야. 당신은 여기 있어.”
“그래요. 텐젤 제국은 치안이 매우 엄격하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망명자 신분일 뿐인 타국인인 제가 거리를 다닌다면 분명 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리제아나는 숨을 삼키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믿어야 할 이유도 없지 않나.”
이안이 차갑게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말했다시피 난….”
그저 아비드 제국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고 재차 말해봤자 눈앞의 남자가 돌연 그녀를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말해봤자 믿겠어? 내가 회귀했고, 날 죽일 라이핀을 피해 달아나려 했다는 것. 그리고….’
리제아나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라이핀에게 파멸을 선사하고 싶다는 내 마음을.’
한숨을 폭 내쉰 리제아나는 이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리 감옥에 가둘 정도로 절 믿지 못한다면 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서 데려온 건가요?”
“…간절해 보여서.”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보았다.
“당신의 간절함을 믿은 거지.”
리제아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에게 자신을 포로로 납치해달라 부탁할 때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던 걸까.
더 듣지 않아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아비드 제국에서 떠나고파 하는 리제아나를 인질로서 데려온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리라.
리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날 꺼내요, 당장. 당신들이 원하는 것들 내가 다 줄 수 있으니까.”
“글쎄. 당신 말대로 해주기엔 당신을 뒤따르는 악명이 워낙 대단해서.”
그의 말에 단번에 리제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텐젤 제국에까지 그녀의 악명이 퍼졌을 줄은 몰랐다.
망할 라이핀.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이 없네. 리제아나는 과거에 라이핀 때문에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하, 어이가 없군요. 저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나요?”
“아니. 이편이 나아.”
그녀의 질문에 이안이 설핏 웃으며 철장을 툭툭 두드렸다.
“여기 텐젤 제국은 거친 나라야. 당신 말대로 망명자 신분일 뿐인 타국인이 거리를 쏘다니면 경비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이안은 철장을 고요히 두드렸다.
“지금 당신에겐 이 감옥이 제일 안전해.”
어떠한 말을 해도 제 고집을 꺾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리제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문득 두 사람 사이를 뚫고 발소리와 함께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님! 각하!”
이안은 덥수룩한 그의 하얀 머릿결을 쓸어올리며 낮고 시린 음성으로 읊조렸다.
“하르힌. 그 경거망동한 자세 좀 고치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을 텐데. 이번 기회에 직접 고쳐줄까?”
그 바람에 하르힌은 스스로의 입을 꾹 막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을 따라 옆에 선 하르힌과 리제아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하르힌이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영애는 누굽니까? 제가 분명 분홍 머리에 금빛 눈을 가진 영애라 말씀드렸는데요!”
“계획을 변경했어. 이….”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이내 그녀가 ‘황실의 개’라 불리던 여자라는 걸 상기했다.
글쎄. 그에게 도도한 척 매달리는 꼴은 개보다는 마치….
“강아지는 분명 우리에게 그녀보다 더욱더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강아지?’
하르힌은 이안이 강아지라 칭한 리제아나를 의아해하게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안 님. 우선 보고부터 올리시죠. 폐하께서 아까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전에, 아직 네르아에게서 연락을 받지 못했나?”
“죄송합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이안은 윗옷을 벗어 마법으로 띄워 올렸다.
옷은 부드럽게 공중을 유영하더니 리제아나 위로 조심스레 덮였다.
뜻밖에 그의 윗옷을 건네받은 리제아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우습군요. 간절해 보여 데려오더니 감옥에 가두고,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있으니 옷을 내어준다?”
“황태자비께서는 나라를 버리고 텐젤로 왔으면서, 어떤 예우를 바란 거지?”
이안은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누구 때문에 내 계획이 다 어그러졌는데?”
“하! 지금 내 탓이라도 하고 싶은…!!”
리제아나가 쿵쿵 창살을 흔드는 소리가 그의 뒤로 흘러들었지만 이안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옥을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이안은 성을 내는 그녀의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조용히 처지를 받아들였으면 좋겠군.”
작게 웃으며 그가 감옥을 나섰다. 그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 ⚜
이안이 떠난 감옥에는 금방 적막이 찾아왔다.
리제아나는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아비드 제국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이제 그만 조용히 처지를 받아들였으면 좋겠군.’
리제아나는 고개를 들어 사위를 둘러봤다.
은은히 벽을 밝히는 마나, 주변에 가득한 마법서와 서류들, 그리고… 절 가로막은 창살.
영락없는 지하감옥이었다.
체념한 듯 자세를 고쳐 누운 리제아나는 상념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라이핀이었다.
“지금쯤이면 라이핀이 내가 사라진 걸 알겠지.”
망할 라이핀. 내 머릿속에서 얼른 나가줬으면.
더는 라이핀을 보지 않으려고,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역시나 쉽지가 않았다.
전생에서 그는 어두컴컴한 공작가의 방에서 빛으로 그녀를 이끌어준 인물이었으니까.
‘내 황태자비는 네가 되었으면 하여 왔다!’
리제아나는 그녀를 찾아온 화려한 차림의 라이핀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그녀에게 황태자비를 권하는 그가, 당시 그녀에게는 다시 없을 구원자로 느껴졌다.
라이핀이 오기 전, 리제아나의 혼처로 여색가라 널리 알려진 후즈센 대공가의 영식 킨 후즈센이 확정되었다.
부정했지만, 현실이었다.
결국 리제아나는 그녀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필로렌치아 공작가의 여식이니 그녀로서는 결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소임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필로렌치아 공작가의 문이 활짝 열리며 라이핀이 나타났다.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는 젠에게 가지 않는다. 그녀는 내 황태자비가 될 것이야.’
그 한마디에 필로렌치아 공작은 몇 개월 동안 쌀쌀하던 태도를 금세 거두었다. 싱글싱글 리제아나를 볼 때마다 웃었다.
아비가 뭐 잘못한 건 없지? 라고 물으며.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도구로 보는 아버지 자격이 없는 사람.
리제아나는 마음속으로 필로렌치아 공작을 그리 정의했다.
그런 필로렌치아 공작 아래에서 그의 뜻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던 공작가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그래서 공작가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준 라이핀이 구원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악녀에게 걸맞은 결말이다!’
후에 그를 위해 노력해온 그녀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은 남자였지만.
한때 그의 포근한 갈색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었다.
그 푸른 머리칼이 눈에 담기도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수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아직 라이핀의 검이 가슴을 꿰뚫는 그 서늘한 감각을 잊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굳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너무 멀리 와버렸다.’
리제아나는 애써 추억을 털어냈다.
‘라이핀, 나의 가슴에 검을 쫓은 너를. 용서하지 않아.’
철장 너머 어둠 속에서 리제아나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