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번 생은 다를 거야.’
리제아나는 과거, 그러니까 그녀가 겪었던 지난 삶을 떠올렸다.
제 아비인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인형처럼 감금당해 보냈던 나날과 황족으로서 교육을 강요받아 황태자 라이핀의 반려로 떠밀려진 일.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누군가의 관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 ‘황실의 개’를 자처했던 것까지.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창가 너머로 서서히 지는 황혼녘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오늘이었다.
리제아나의 인생을 비극으로 끌고 간 그 사건.
라이핀의 정부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가 신전에서 납치당하는 그 날이.
“라이핀이 처절하게 망하게 해주세요. 또한….”
제국을 수호하는 라우라 여신의 조각상 앞에서 불경한 기도가 울려 퍼졌다.
제국의 안녕을 기원해야 할 아비드의 황태자비, 리제아나는.
“아비드 제국과 황제 라이핀에게 무궁한 흉조가 깃들기를.”
제국의 멸망을 진심으로 기도했다.
뎅- 뎅-
그리고 지금, 자정을 알리는 종이 크게 울렸다.
리제아나는 천천히 꿇고 있던 무릎을 펴고 소리 없이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기둥에 몸을 기대어 초를 셌다.
하나.
둘.
그리고 셋.
정확히 셋을 셌을 때 그녀 앞에 정교한 검은색 마법진이 펼쳐지며,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소유한 사내.
회귀한 리제아나는 이 지긋지긋한 아비드 제국을 떠나기 위해 델리아 대신 납치당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둥에서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녀는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일순 그녀 앞으로 뾰족한 얼음 기둥이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뚫을 기세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던 얼음 기둥이 멈춘 건 그녀가 겨우내 걸음을 멈춘 후였다.
“허억….”
숨을 고르는 그녀 앞으로 사내가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
드디어 그가 그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한 걸음만 더 움직였다면 어쩌면 저 날카로운 얼음 기둥에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리제아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외면했다.
무시무시한 남자라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그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줄은 몰랐다.
리제아나는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눈앞의 사내에게서 분명한 살의가 느껴졌다.
황궁의 침입자에게 그녀의 등장은 달갑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리제아나는 천천히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키며 최대한 그녀가 지을 수 있는 친화적인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남자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미소가 그리 효과를 발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얼음이 그녀의 목을 꿰뚫을 기세였다.
좋아, 포기.
리제아나는 호의적인 미소를 곧장 거두었다.
“안 오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그녀의 말에 그가 미간을 모았다. 그는 꽤 혼란스러웠다.
분명 오늘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가 신전 기도를 올린다는 정보를 극비에 얻었으나, 제 앞에 있는 여인은 델리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인은 어째서인지 남자의 목적도, 나타날 시간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겁내는 기색조차 없군.’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여자는 너무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타국의 황궁을 침입하는 일이 마냥 손쉬울 리가 없었다.
목격자도 방해꾼도 없어야 할 중요한 일에 웬 미친 여자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고 선 이 여자를 죽여야 할지 고민했다.
이내 그는 결정을 내린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인질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리제아나의 목소리가 움직이던 얼음 기둥 멈췄다.
“인질… 왜 그렇다고 생각한 거지?”
“물론 아비드 제국을 협박하기 위해서죠. 광각초의 비밀을 알기 위해.”
“…광각초?”
낮은 중저음과 함께 사내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그녀는 루비와 같은 아름다운 적색 눈을 오롯이 마주했다.
그제야 제대로 보인 사내의 얼굴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하얀 피부는 그의 신비로움을 더했다.
게다가 하얀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난 역삼각형 어깨와 성난 가슴 근육들은 그의 커다란 키와 어울려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광각초라… 글쎄?”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모호한 대답에도 리제아나는 당황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주저하면 리제아나는 이대로 얼음 기둥에 목숨을 잃을 터였다.
“그러니 아비드 제국 황태자가 총애하는,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 양을 납치하려고 왔을 테지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남자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리제아나를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알다마다.
리제아나가 회귀하기 전, 남편인 라이핀과 그의 정부 델리사의 사이가 돈독해진 원흉이니까.
리제아나는 납치에서 돌아온 델리사가 했던 증언을 똑똑히 기억했다.
‘12시 종이 울려서 기도를 마치고 신전을 나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뒷문으로 가던 도중 마법진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생겨나더니…!’
‘마법진이라고?’
델리사는 흐느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버겁다는 시늉을 했다.
‘저에게 광각초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라고 했어요.’
그녀가 가까스로 돌아오자 라이핀은 델리사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더욱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 바람에 내가 죽었지.’
현재 리제아나의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바로 델리사를 납치해 갔던 그 침입자이다.
리제아나는 델리사 대신 그자가 전생에 나타났던 것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미리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차가운 음성이 리제아나의 심장을 꿰뚫듯이 훅 들어왔다.
피같이 새빨간 눈동자가 그녀를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 날카로웠다.
‘정말 미친개라고 소문날 만하네.’
리제아나는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목적부터 말하죠.”
하지만 주먹을 꾹 쥐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델리사 말고, 날 납치해줘요.”
“뭐?”
뜻밖의 대답에 이안이 당황스럽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다행히 정보의 출처에 대한 관심이 이쪽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내가 델리사보다 권력도 높고 가진 정보도 더 많으니 당신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광각초에 대해서도 알려줄게요. 귀찮게 굴지 않을 테니, 날 대신 납치해줘요.”
당당하게 나오는 리제아나에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미친 여자인가? 내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고서 하는 말인가?”
“그럼요. 모를 리가 있을까요.”
리제아나 역시 차가운 웃음으로 답했다.
“텐젤 제국의 이안 렌디 데벤시아 공작님.”
그녀에게 있어 꼭 잡고픈 마지막 동아줄이자….
“텐젤 제국이 낳은 미친개.”
그는 바로 리제아나의 목적지이자 옆 나라 텐젤 제국의 유명한 미친개였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델리사는 당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결심한 리제아나는 날카로운 얼음 기둥에서 비켜서곤 이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오히려 납치했던 델리사를 다시 아비드에 던져놓는 수고나 하겠죠.”
그가 여기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한 번 죽음을 맞이해야 할 테니.
리제아나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날 납치해. 당장.”
그녀를 잠자코 내려만 보던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순간,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걷히고 리제아나의 얼굴이 완연히 드러났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이라….”
리제아나의 얼굴이 달빛에 비추어지자 이안은 그제야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황실의 개로 불리던 제국의 황태자비가 아닌가.”
천천히 그녀를 관찰하던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텐젤 제국의 미친개에게 납치당하고 싶다니.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것도 제국의 황태자비님께서?”
“…편할 대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의 비꼼에도 리제아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이 빌어먹을 아비드 제국을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텐젤 제국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리제아나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난 주저 없이 아비드 제국을 팔아먹을 겁니다.”
그리고 리제아나의 진심을 환히 비추듯, 내려앉은 달빛이 선연하게 빛났다.
하지만 이안은 이내 피식 입꼬리를 올려 ‘미친개’와 다름없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면 여기서 끝내지. 노닥거릴 시간이 없으니.”
하지만 리제아나의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장난이 아니라 제안이자 타협입니다. 당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지금, 당장, 여기서.”
고요한 바람만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그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바람이 나부끼는 동안 이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리제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황태자비께서 신전에 출입하지 말라 했는데 왜 순찰을 돌라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구먼.”
라이핀의 기사들이 불평을 뱉는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하필 지금… 곤란하군.”
이안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델리사에 광각초까지…. 우리의 정보가 어디까지 새어나갔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좋아. 제국의 정보를 넘기고 배신자가 된다면야 기꺼이 납치해주지.”
말을 마친 이안이 리제아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안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이제 더이상 황태자의 위험한 그늘 속에서 살지 않아도, 델리사의 질투와 모함을 받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아비드 제국만 떠나면 두 사람에게 파멸적인 복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드디어 허울뿐인 황태자비 자리에서 떠나는 거야. 라이핀, 그 증오스러운 사람에게서도 벗어나는 거야.’
물론 적국의 미친개인 이안과 함께지만 말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포로님.”
그가 싱긋 웃었다.
‘어쩌면….’
리제아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더한 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 제국에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인연의 넝쿨을 벗어던지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기에.
“…잠시만요.”
리제아나는 꽂고 있던 머리핀을 빼 바닥으로 던졌다.
라이핀이 제게 결혼식 선물로 준 진주 보석이 박힌 핀이었다.
후련하다는 듯 앞서 리제아나가 앞서 걸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그가 흘낏 바닥을 구르는 핀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찮겠어? 꽤나 비싸 보이던데.”
“필요 없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없던 정도 다 떨어진 마당에 뭣 하러 직접 다시 돌아올까?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출발하지.”
리제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안의 커다란 손을 잡고 마법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은 마법진에서 몽글몽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둘을 감쌌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간지럽혔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뒤바뀌는 사위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멀리 있는 라이핀을 향해 중얼거렸다.
행복하지 마,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