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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117)

3화

태양이 내려가고 밤이 찾아왔을 무렵,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무도회장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여러 귀족이 참석한 무도회는 다소 시끌벅적했다.

특히 서로 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음악이 아우러진 활기찬 연회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귀족보다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홀로 고고히 앉아있는 리제아나가 있었다.

그녀는 무료한 얼굴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녀와 다른 이들 사이에 어떤 벽이라도 있는 양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리제아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한 영애가 그녀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를 피했다.

“들었습니까? 이번엔 데리아나 가문의 후작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치라면 황태자의 사업에 반대하던 세력 중 하나가 아닌가?”

“또 황태자비께서 뒤에서 손을 쓰신 모양인가 봐요.”

그녀가 마주한 과거와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음악과 분위기, 그리고 그녀의 소문을 흘리는 귀족들.

과거와 같이 그녀를 에스코트해야 할 라이핀의 모습 또한 여전히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편이 그녀에게 이로웠다. 그의 얼굴을 보면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그녀 자신조차 알지 모르니까.

그녀를 두고 소곤거리는 이들을 두고 리제아나는 지나던 시종을 불러 칵테일을 요구했다.

칵테일을 들고 선 리제아나는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 우스운 짓거리들을 견디는 것도 이제 끝이야.’

그녀가 계획한 날이 곧 머지않았다.

그렇기에 리제아나는 회귀 후 또다시 겪은 일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리제아나 아니냐.”

“아버지.”

리제아나는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그녀의 삶이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게 된 시작점, 아버지라 불릴 자격도 없는 필로렌치아 공작이었다.

그를 반기지 않는 기색에도 불구하고 필로렌치아 공작은 꿋꿋이 리제아나 앞에 섰다.

리제아나는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리제아나가 등을 돌리기도 전에 그녀를 마땅찮은 시선으로 훑어보던 필로렌치아 공작이 입을 뗐다.

“왜 혼자 이리 청승을 떨고 있는 게냐?”

“청승…이라뇨?”

“황태자님도 없이 혼자 뭐 하는 거냐 물었다. 설마하니 아직도 황태자님의 마음 하나 얻지 못했더냐?”

“간만에 얼굴 보는 딸아이에게 하는 안부가 거칠군요.”

그녀의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를 과연 그의 핏줄이라 여기긴 하는지 그녀의 안부보다 앞으로 그녀가 필로렌치아 가문에 어떤 도움을 줄는지 재고 따졌다.

리제아나는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들을 이야기는 앞으로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도 쓸모 하나 없는 계집.”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던 리제아나가 휙 그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필로렌치아 공작이 원하는 대로, 그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결국, 후에 라이핀을 사랑한 건 자신이었지만 황태자비가 되도록 그녀를 마음대로 휘두른 이는 필로렌치아 공작이었다. 리제아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는 필로렌치아 가문은 제가 이렇게까지 모든 걸 바칠 정도로 의미가 있나요?”

“그게 무슨 소리냐?”

“뒤에서 더러운 일들이나 하면서 재물 따위나 끌어모으는 필로렌치아 가문에 어떤 의미가 있나 물었습니다.”

리제아나의 입에서 하나하나씩 흘러나오는 단어는 공작의 심기를 자극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거칠게 교육했던 공작이었다.

그의 덩치는 여전히 리제아나에게 너무나도 컸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 스스로 몸집을 부풀려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가 드디어 미쳤나 보구나. 아비 얼굴을 보자마자 면전에 이상한 헛말들을 내놓고 다니니까 말이야.”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훑던 공작은 들고 있던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를 악다물고 이내 두어 번 헛기침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속이 타들어 가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이상한 헛말들인지 아닌지는 후에 두고 보면 알겠죠?”

“뭘 믿고 떠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나에게 교육받고 싶지 않으면 그 입을 닫는 게 좋을 거다.”

이번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리제아나 쪽이었다.

교육, 그것을 과연 교육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작은 리제아나에겐 혹독했던 그 시간을 교육이라 칭했다.

어릴 적 리제아나를 일찍이 사교계에 데뷔시키기 위해 영지에서 꾸준히 아버지로부터 그만의 가르침을 받았었다.

모든 과목의 선생들을 불러 완벽하게 끝낼 때까지 리제아나를 방에서 내보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으며 선생이 다녀간 후에는 무조건 공작에게 한 번 더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아이에게 매를 드는 일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저택에서 외출도 금지된 채로 그녀는 그저 그에게 순응해야 했다.

“두고 보셔도 좋아요. 저는 더이상 잃을 게 없거든요.”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거냐?”

리제아나의 말에 공작의 이마에 자잘한 주름이 한곳으로 모였다.

물론 여전히 리제아나는 공작이 아버지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두려웠다.

“오히려 제게 살려달라 비셔야 할 텐데. 필로렌치아의 구역질 나는 악행을 제가 모두 알고 있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밤 무도회에서만큼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과연 어떤 것부터 터뜨릴까요? 맞춰보시겠어요?”

치기일지도 모르는 반발심이 가시기 전에 리제아나는 말을 이었다.

“아, 암살 시도라면 말아요. 저는 어머니가 아니니 그리 쉽게 죽진 않아요.”

“리제아나!”

필로렌치아 공작은 더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습관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과거의 리제아나, 너는 힘없이 맞기만 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대로 필로렌치아의 손찌검을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쨍그랑-

그래서 리제아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가볍게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선택했다.

생각보다 크게 난 소리는 보기 좋게 공작은 당황하게 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하필 그녀가 떨어뜨리는 시기에 음악이 끝나는 바람에 더더욱 그녀에게 시선이 모였다.

“황비 전하께서 방금 잔을 바닥에 던지신 거야?”

“실수로 떨어뜨리신 건 아닌 것 같지…? 아버지 앞에서 지금 저런 무례를…?”

“하여튼 대단한 부녀라니까. 저들의 눈 좀 봐. 서로에게 증오감만 가득해 보인다니까!”

사람들은 예상대로 리제아나와 공작을 번갈아 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모여든 관심은 공작의 입을 막기 충분했다.

“너…!”

공작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리제아나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리고, 황태자비 앞에서는 예의 좀 갖추시길. 공작 나리.”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리제아나는 고양감에 눈을 휘어 접어 그녀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공작은 주먹을 쥔 채로 자리에서 뜰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무례한 여자라는 칭호를 더불어 얻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미소를 유지했다.

황비는 그런 자리였으니까.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님과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 님이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무도회 안의 이목이 빠르게 그녀에서 연회장의 입구로 돌아갔다.

리제아나는 라이핀이 여태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의 연인, 델리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늦은 것이다.

팔짱을 끼고 선 다정한 모습의 두 사람을 보며 리제아나는 또 한 잔의 칵테일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더 차가워졌다.

“어머, 황태자비님.”

홀로 있는 그녀를 발견한 델리사가 라이핀의 팔을 끌고 그녀의 앞에 섰다.

리제아나는 미간을 구기며 자신의 앞을 막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한시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바퀴벌레 한 쌍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니 리제아나는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델리사는 그녀의 옆에 있는 라이핀의 팔을 끌어 리제아나가 있는 곳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핀도 내키지는 않는 듯했다.

“혼자 계셨나요?”

델리사는 리제아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약간의 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과거의 그녀라면 그녀를 두고서 델리사와 나타난 라이핀의 모습에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래를 아는 그녀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은 밤이니까? 크로덴느 영애께서 아실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에이, 그리 야박하게 굴지 마세요, 비 전하. 저는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 라이핀 전하께서는 저를 걱정해주시더라고요.”

델리사는 다정히 라이핀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며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라이핀의 얼굴이 흔들리는 조명 아래로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리제아나는 굉장 허탈해졌다.

‘그동안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나는….’

이 모습들을 견디고 살았을까.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젠간 가볍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을까.

“라이핀 전하께서도 미안하시잖아요. 어서 사과드리세요, 비 전하께.”

“사과라니요, 필요 없습니다.”

라이핀이 미처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 리제아나가 먼저 그의 말을 막아냈다.

사과? 진심이 담겨 있지도 않을 텐데 구태여 무슨 사과를 한다는 말인지.

리제아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차림의 델리사를 보았다.

그녀의 열 손가락에 반은 거대한 보석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더불어 드레스에도 값비싸 보이는 보석들과 장식이 수놓아 있었다.

물어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라이핀에게 애교라도 부려 얻은 사치품들임이 뻔히 보였다.

“오늘도 델리사 양은 반짝이네.”

“네? 그게 무슨.”

그녀의 칭찬에 델리사는 짐짓 당황했다.

“황실을 위해 쓰여야 할 국고가 어디서 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다는 이야기야.”

당연하게도 리제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델리사는 눈을 깜빡이던 때, 라이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치라니 모두 내가 구해다 준 거야, 리제아나. 그녀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그는 델리사와 다르게 리제아나가 한 말에 의도를 단번에 파악한 듯 보였고, 눈썹이 조금 일그러진 것이 그가 화났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입니다.”

“무엇이?”

“황실의 안위와 나리를 위해 쓰여야 할 국고가 다른 곳에 쓰이고 있지 않나요?”

“…무도회야. 무도회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레이디의 마음, 당신도 알지 않나?”

그의 말에 리제아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어느새 라이핀의 뒤로 숨은 델리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약혼자가 될 이를 앞세우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뒤에 숨어 사치나 부리는 여자라니.

정말 어울리기 짝이 없다.

“이제 보니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왜 그동안 몰랐을까요?”

리제아나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보이며 두 사람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디 두 분,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영원히 함께하시길.”

“어머, 고마워요. 황태자비님.”

“리제아나…?”

그녀의 비꼼을 눈치채지 못한 델리사는 입꼬리를 비틀며 라이핀의 뒤에서 그녀를 비웃었다.

다만 며칠 전부터 어쩐지 그에게 쌀쌀맞은 리제아나가 라이핀은 당혹스러운 모양이었지만 리제아나는 그에게 이유 같은 걸 설명할 의무 따위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그새 그녀에게서 관심을 끊고서 호호 웃으며 두 손을 맞잡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리제아나는 이를 악다물며 연회장을 떠나기를 선택했다.

그녀의 숨이 끊어질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리제아나는 다짐했다.

‘정말 처절한 복수를 선사해줄게.’

⚜ ⚜ ⚜

아침이 밝았다.

리제아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넓은 창문의 커튼을 걷어냈다.

눈부신 아침 햇볕이 창가를 통해 들이쳤다.

리제아나는 눈을 감으며 햇살을 만끽했다.

드디어 그녀가,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가 납치되는 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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