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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117)

2화

리제아나와 라이핀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돌았다.

“좋아.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이에 라이핀이 먼저 일어난 후, 가운을 걸쳐 입고서는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머리를 매만졌다.

한때 이 모습에 반했었는데,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는 라이핀은 자신을 벤 배신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같이 아침 먹으러 갈래?”

“아뇨.”

항상 라이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승낙하던 리제아나였다.

그녀가 내뱉은 거절의 의사에 라이핀은 의아한 눈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그럼 오늘치 업무 서류도 일라이자를 통해 전달해주도록 할게. 부탁할게?”

보좌관인 일라이자를 통해 그의 대부분의 일을 넘기고 델리사와 놀러 가려는 속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잦아졌나 했는데, 아마 이때가 절정이었는 듯싶었다.

덕분에 리제아나는 라이핀의 일들을 엿보며 어깨너머로 정무를 배워 한 나라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쌓여가는 일에 매번 피곤으로 몸이 무거워져만 갔다.

“리제아나?”

대답이 없는 리제아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라이핀이 조금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아 네, 전하. 물론이죠.”

그의 물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리제아나는 여상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그제야 라이핀도 더 짙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이 짧은 입맞춤을 했다.

“리제아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사랑해.”

이 말이 얼마나 큰 족쇄가 되어 자신을 옭아매었는지, 라이핀은 아마 평생 모를 터였다.

그 말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 엄청난 존재라도 된 듯이 착각했다. 그 결과, 스스로 제 무덤으로 들어가는 파멸을 불러왔다.

“저도요, 전하.”

사랑한단 말이, 억지라도 도저히 입에서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의 입이 닿았다 떨어진 손등이 지나치게 신경 쓰였다. 당장이라도 씻어내고 싶었지만 애써 웃음으로 억눌렀다.

‘어라?’

끝까지 눈을 마주칠 비위가 남아나질 않아 그와 손을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에 끼워진 은빛 반지가 유난히 그녀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와 라이핀의 결혼반지 역시 은빛 반지였지만 가운데 푸른 보석이 박혀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결혼반지가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전하, 이 반지는?”

문득 리제아나의 물음에 따라 라이핀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제 손에 닿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며 어색하게 맞잡고 있던 손을 뺐다.

“폐하께서 주신 반지야.”

“아… 그러시군요.”

“급히 미뤄두었던 정무가 생각나서 말이야. 리제아나, 미안하지만 이만 가보도록 하지.”

순식간에 미소가 지워진 얼굴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재빠른 걸음으로 재빠르게 침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리제아나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다 이내 거두었다.

리제아나는 조금 전까지 라이핀이 어루만지던 손을 바라보았다.

리제아나는 조금 전 그가 내뱉은 ‘사랑해’라는 말을 곱씹었다.

구역질이 났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남자의 사랑 고백이라니.

리제아나는 시녀를 시켜 수건을 가져오도록 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폐하께서 주신 반지야.’

“그거 델리사가 준 반지잖아!!”

손등이 새빨개지도록 물을 묻힌 수건으로 비비던 리제아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정무? 역겨운 자식. 정무를 보는 게 아니라 델리사를 보는 거겠지.”

제겐 온갖 악행을 도맡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델리사를 끼고 희희낙락하기 바빴다.

리제아나는 라이핀이 넘겨준 서류를 하나씩 펼쳐봤다.

“내가 이 서류들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일라이자를 통해 아침부터 넘겨받은 서류들의 양은 눈대중으로 보아도 많았다.

그녀는 여러 사안이 한데 뭉친 종이 서류 중 하나를 집었다.

대충 눈으로 훑으며 홀연히 옛 기억을 떠올라보았다.

그는 리제아나에게 다양한 요구를 해왔다. 그녀는 그를 위해 그의 말을 따랐다.

그가 내놓은 정책에 반발하는 가문의 사업적 자금줄을 끊었다.

또 그가 벌이는 황실 뒷사업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가 황태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방해되는 자들을 리제아나는 거리낌 없이 처리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며 리제아나는 차츰 이런 일에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서류를 내리며 리제아나는 낮게 헛웃음 흘렸다.

“궁 밖에서 성군이라 불리는 자가 사실은 이리도 추악하니.”

그리고 그의 명령을 따랐던 자신도 참으로 멍청한 여자였음이 틀림없다.

이번 주된 청탁 내용은 칼슨 후작을 은밀히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그가 회의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반발의 의견을 내비친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리제아나는 라이핀에게 더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성군인 척 가면을 쓰고서 그녀에게 온갖 더러운 일을 떠넘기는 그가.

리제아나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건드리는 것조차 싫어.’

모두 라이핀이 벌이는 범법적 사업과 관련되었거나 그의 세력에 위험이 되는 것들에 대한 서류들이었다. 리제아나는 서류를 모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벌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집무실 위의 서류들을 쓸어 모은 리제아나는 집무실 한편의 벽난로에 모두 던져 넣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의 절망, 슬픔, 아픔. 모두 갚아줄 거야.’

리제아나의 눈에 불길에 비쳤다.

⚜ ⚜ ⚜

더 집무실에 있을 수 없어 리제아나는 그대로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래, 아직 그녀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살아있으며 아직 누명조차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회귀해왔기에 미래를 알고 있다.

이제 그녀 스스로 미래를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 속에서 나지막이 피어났다.

리제아나는 뒤에 두어 명의 시녀를 거느린 채로 복도를 걸었다.

멀리 한 인영이 복도 너머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에서 만난 인물을 보자마자 조금 전까지 느꼈던 희망찬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가라앉았다.

라이핀에게 복수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잘못이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나머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그녀의 죽음에 일조한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 사실을 잊은 자신에 스스로에게 작은 욕설을 뇌까렸다.

“리제아나… 비 전하를 뵙습니다.”

델리사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마치 황궁이 제집인 양 활개 치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리제아나의 이름을 먼저 부른 후, 뜸을 들이며 그에게 존칭을 붙였다.

누가 보아도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크로덴느 영애.”

다시 입으로 증오하는 이름을 부를 수 있다니.

기분이 꽤나 더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여자를 망칠 수 있는지에 대한 무궁무진한 생각들로 머리가 채워지고 있었기에.

그녀를 향해 형식적인 예를 취한 델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알 거 없다.”

“어머. 말이 짧습니다, 전하. 지금 제게 반말하신 것이온지…?”

죽음을 겪고 회귀한 그녀가 그 죽음의 원흉인 델리사에게까지 존대를 할 의무 따위는 없었다.

리제아나는 피식 그녀를 비웃었다.

“너에게 굳이 존댓말을 쓸 필요 없지 않으냐.”

“그러…시죠.”

매번 숨죽여 그녀의 옆을 지나가던 리제아나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델리사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러는 영애는 어딘가 다녀오는 모양인데.”

“비 전하께서 굳이 아시기에 미약한 일 같습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델리사는 빠르게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으며 비꼬아 말했다.

“뭐라?”

“혹 이번 무도회에 참가하시는지요?”

리제아나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델리사가 먼저 말을 꺼내며 간단히 리제아나의 말을 끊었다.

“무도회….”

“설마 잊어버리고 계셨습니까? 저런, 파트너를 아직 구하시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 그녀가 회귀하기 전 이때쯤에 무도회가 열렸다.

델리사가 부채를 펴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며 비아냥 가득한 웃음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반짝이는 은빛 반지가 특히나 빛을 뽐냈다.

‘저 반지는….’

리제아나의 시선이 찰나였지만 그 반지에 머물렀다.

델리사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높고 길어졌다.

알아챘구나, 당신. 델리사의 생각이 공연히 시선에서 느껴졌다. 그런 도발에 리제아나는 더는 한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우습구나.”

“아무렴요. 고고한 황태자비께서 제 둥지를 잃으시게 생겼는데, 안 웃길 수가 있을까요.”

비웃음 가득한 델리사의 얼굴이 리제아나의 앞에 드리웠다.

그럼에도 리제아나는 심드렁하게 델리사를 응시했다.

“너랑 그렇게 죽고 못 사는데.”

저를 올곧게 응시하는 리제아나의 눈.

눈에 서린 한기에 델리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라이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지. 심지어 너와 식사하는 도중에도 말이야.”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죠?”

“왜 그런 것 같니?”

델리사는 떠올렸다.

언제나 급한 용무라며 델리사를 한두 시간이고 내버려 둔 채 어딘가 다녀온 라이핀을.

“라이핀이 너에겐 정무 관련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나?”

“그, 그건!”

리제아나가 한 걸음 발을 옮겼다.

리제아나의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독이 스미는 것처럼 고요하고 천천히.

“라이핀은, 사람을 죽이라고 해.”

“…!”

사람을 죽여?

비로소 델리사는 리제아나에게 얽힌 악명이 체감됐다.

황태자비라는 가면을 쓴 범죄자, 왕관을 쓴 악녀. 등등 리제아나의 뒤를 따르는 여러 별명들이 떠올랐다.

이내 무의식적으로 경련이 일듯 달달 떨리기 시작한 델리사의 손은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그게 라이핀이 내게 부탁하는 ‘정무’란다. 남의 둥지나 빼앗는 뻐꾸기 영애는 모르겠지만.”

리제아나는 델리사의 귓가에서 입술을 떼고 호흡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델리사와 마주했다.

“그런 네가 라이핀 옆에서 황태자비 노릇을 할 수나 있을까.”

붉은 얼굴로 씩씩거리는 델리사에게 리제아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자신의 권력만을 지키기 바쁜 황태자와 정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황태자비라니 아비드 제국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나는 부디 네가 황태자비가 되었으면 좋겠어.”

명백한 부탁이었다.

⚜ ⚜ ⚜

늦은 밤, 리제아나는 주변을 물리고 집무실 탁상에 앉았다.

언제나 문서들이 가뜩 쌓여있던 리제아나의 탁상은 그 어느 때보다 황량했다.

넓은 창가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은 리제아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복수.’

그녀가 당한 일들을 모조리 갚아주겠다고 결심하니 그 후로 그녀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모처럼 마음이 차분해졌다.

리제아나는 조용히 곁의 달력을 집어 들었다.

“열흘 뒤.”

그녀가 황태자비 자리에서 폐위되고 끝내 라이핀의 검에 목숨을 잃는다.

리제아나는 깃털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열흘 뒤의 날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목숨을 잃게 된 계기는 바로….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의 납치.”

리제아나는 이번엔 오늘부터 닷새 뒤의 날짜 위로 펜촉을 내렸다.

“앞으로 닷새야.”

라이핀의 정부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가 신전에서 납치당하는 그 날.

그녀가 든 펜촉에서 잉크가 달력 위로 뚝뚝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리제아나를 생각에 잠겼다.

‘열흘 뒤에 죽을 거라면 차라리 내가 닷새 뒤에 납치를 당하겠어.’

“복수….”

차가운 목소리로 리제아나는 읊조렸다.

라이핀은 이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다. 그런 그에게 복수할 방법이 이 아비드 제국에서 그리 많지 않을 테다.

하지만 이 아비드 제국을 떠난다면?’

델리사가 납치당하는 날짜 위로 그려진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리제아나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리제아나의 복수를 위한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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