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지금 저와 장난이라도 치고 싶으신 겁니까?”
차가운 바람이 부는 늦은 밤의 신전.
제국을 수호하는 라우라 여신의 조각상 앞에서 불경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이자, 희대의 악녀라고 명성이 자자한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였다.
“폐위라니요? 절 황궁에 데려온 건 황태자 아닙니까?”
“제국민의 원성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리제아나.”
리제아나의 앞에 드리운 건 제국의 황태자 라이핀이었다.
“원로회의 결정에 따라 황태자비는 다른 이로 책봉하게 되었다.”
라이핀은 제 곁에 있는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
황실 연회에 나타나 라이핀의 옆을 꿰찬 여인.
델리사는 얼굴이 발그레 붉어진 채 라이핀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리제아나를 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델리사는 그동안 라이핀의 곁에서 황태자비 노릇을 했었다.
진짜 황태자비는 리제아나였음에도.
“우습군요. 황태자비 자리에 올리기 위해선 우리의 결혼을….”
“델리사는 황태자비로 책봉될 거야. 그리고 곧 황태자비가 아닌 황후로 오르겠지.”
리제아나의 말을 뚝 끊은 라이핀이 델리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보란 듯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나의 반려로서.”
쿠웅.
리제아나는 그 순간 라이핀의 진정한 사랑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의 세계가 간단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리제아나가 ‘황실의 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희대의 악녀가 된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하는 라이핀의 곁에 설 수 있는 아비드 제국의 황비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리제아나는 곧 황제가 될 라이핀의 모든 부정행위를 덮었고, 황실에 방해가 되는 자는 소리소문없이 죽였다.
황실 연회에서 누구도 리제아나의 곁에 다가오지 않았고, 시끌벅적했던 사교장은 침묵과 고요만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리제아나는 행복했다.
“리제아나, 내 부인.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라이핀이 짙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으며 침묵만이 깔린 연회장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비드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고 처음으로 리제아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났으니까.
라이핀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사해 리제아나. 이쪽은 크로덴느 백작가문의 영애 델리사 양.”
그러나 델리사 루페 크로덴느가 나타나면서 이 모든 게 틀어졌다.
섣부르게 그에게 애정을 바라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라이핀에게 살갑게 구는 델리사는 단숨에 그의 총애를 얻는 정부가 되었다.
리제아나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갈 감정이라 위안했다.
하지만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델리사가 신전에서 기도를 올린 그 날, 파멸이 시작됐다.
“델리사가, 델리사가 납치당했어! 난 이제 어떡하지? 응? 리제아나….”
기도를 하러 신전으로 향했던 델리사가 납치를 당했을 때.
그는 바다와 같은 푸른 머리를 흩트리고서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에게 하여금 평온함을 안겨주던 갈색빛의 눈동자가 파도 앞의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땀으로 범벅된 그의 몸과 헝클어진 머리, 가삐 몰아쉬는 숨.
“괜찮을…겁니다, 전하.”
애써 올라오는 분노를 참느라 손이 덜덜 떨렸다.
라이핀을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이며 침착하게 리제아나가 속삭였다.
“제가…, 제가 델리사 양을 찾아보죠.”
황태자비라는 직책을 떠안은 그녀였다.
해야 할 일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라이핀의 부탁 하나만으로 델리사를 찾기 위해 미루었다.
닷새 후.
온 제국을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던 델리사가 신전 앞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라이핀은 곧바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델리사를 간호했다.
그 바람에 라이핀의 진정한 사랑은 델리사라는 소문이 온 제국을 휩쓸었다.
그만큼 그녀의 아버지인 필로렌치아 공작의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여자가 되어서! 내가 그만한 직책을 주었으면! 당연히 라이핀 전하의 마음을 얻어내야 했거늘.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이것도 자식이라고….”
게다가.
“델리사 아가씨를 질투해서 몰래 길드에 납치를 의뢰한 거라며?”
“어머, 어머! 협박도 했다던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온종일 굶겼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델리사 납치 사건의 주범은 자신이 되어 있었다.
리제아나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믿어주기는커녕, 소문에 소문을 더할 뿐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황제 라이핀을 위해 벌인 여러 악행을 보고 들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지금, 리제아나가 맞이한 최후는 폐위였다.
“그래서, 쓸모없어진 개는 버리겠다는 겁니까?”
“뭐, 목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을 자처했으니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리제아나.”
라이핀은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로 능글맞게 대답하며 델리사의 어깨를 조심히 잡아 그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었다.
“제가 그리도 미우셨나 보죠…? 하, 제가 얼마큼 더 고개를 숙여야 저라는 존재를 받아 들여주실지 정말….”
황실의 개.
아버지인 필로렌치아 공작도 리제아나를 그리 불렀다.
사랑이라는 덧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 리제아나가 스스로를 버려 쟁취한 삶은 ‘황실의 개’일 뿐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리제아나의 안에 끓어올랐다.
철저하게 버려졌다. 또한 사랑하고 믿었던 자로부터 완벽히 배신당했다. 그 사실에 정신을 추스를 수 없었다.
가느다랗게 애써 이어지고 있던 선 하나가 머릿속에서 띡-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분했고 너무나 스스로가 가엾었다.
“결국 이렇게 저를 가벼이 버리신다고요? 이리도… 이리도 간단히?”
“….”
“이제껏 전하를 위해 내 인생을 통째로 바쳤는데!!”
절망에 빠진 리제아나는 라이핀과 델리사를 향해 소리쳤다.
마침 머리 위에 쓰고 있던 왕관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차라리, 죽여버리겠어.”
리제아나는 망설임 없이 그 왕관을 재빠르게 벗어 손에 쥐곤 라이핀과 델리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꺄아아악!”
“델리사!”
델리사를 땅에 눕힌 리제아나는 왕관을 높게 치켜들었다.
달빛을 등진 리제아나의 모습은 악귀가 따로 없었다.
“나만 이런 고통에 헤맬 수는 없지.”
서슬 퍼런 왕관 끝이 선연하게 빛났다.
“죽어.”
“리제아나…!”
뾰족한 왕관 장식이 델리사를 향해 내리꽂히려던 그 순간.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장내에 울렸다.
“어째서….”
바닥에 나동그라진 건 리제아나의 왕관이었다. 라이핀의 기사가 리제아나를 밀쳐 델리사를 구해냈다.
라이핀의 부인인 리제아나가 아니라, 바람난 상대였던 델리사를.
“리제아나를 잡아라, 어서!”
라이핀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근위 기사단이 리제아나의 두 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내려 강제로 무릎을 꿇렸다.
“어째서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라이핀…! 이 개자식!”
겨우 살아 돌아온 델리사가 죽임을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라이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전하! 고정하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델리사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리제아나가 휘두른 왕관의 끝에 긁혔는지 델리사의 볼 끝에 조그마한 생채기가 난 채였다.
델리사는 작은 상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비켜라. 델리사! 리제아나는 너를 죽이려 했어. 어서 비켜!”
라이핀은 비틀거리는 델리사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한층 더 매서운 목소리로 리제아나를 추문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살인자?”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했던 남편이다.
그라면 적어도 자신의 말을 믿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라이핀, 난 절대로…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는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는 구나. 리제아나!”
라이핀은 이내 망설임 없이 칼을 높게 쳐들었다.
“그래. 당신은 날 사랑한 적이 없었지. 충실한 개가 필요했을 뿐.”
“이것이 악녀에게 걸맞은 결말이다!”
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리제아나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걸, 쿨럭…! 너, 무 늦게… 안, 거야….”
그렇게, 희대의 악녀라 소문난 리제아나 데 필로렌치아는 군중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이용당하고 보잘것없던 내 삶도… 이젠 끝났구나….’
아버지에게 평생을 감금당하다 ‘황실의 개’를 자처하던 리제아나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적어도, 첫 번째 삶에서는.
⚜ ⚜ ⚜
“리제아나, 일어났어?”
찬란한 아침 태양이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리제아나의 정신을 차리게 한 건 그녀가 기억하는 역겨운 라이핀의 목소리였다.
“전…하…?”
리제아나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자 라이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혹시 잠자리가 불편했던 거야? 안색이 안 좋아.”
라이핀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것이 악녀에게 걸맞은 결말이다!’
라이핀의 성난 외침이 여전히 귀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라이핀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햇살과도 같이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꿈일까 싶어 라이핀 몰래 스스로의 팔을 세게 꼬집어 보았지만 통증이 몸을 타고 짜릿하게 올라올 뿐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리제아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혹여 그가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먼저 몸을 일으켰다.
“옆에 누워서 조금 더 쉬어도 되는데.”
그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라이핀이 의아해하며 그녀의 베개를 두드렸지만 리제아나는 고개를 또 한 번 내저었다.
묘한 데자뷰가 리제아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왜인지 낯익은 이 대화는 불과 자신이 죽기 열흘 전과 같았다.
라이핀이 갑작스레 침실로 찾아온 그 날과 같은 전개로 펼쳐지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았습니까? 일어나셔야죠.”
“가끔은 땡땡이 쳐도 된다니까. 리제아나, 당신은 너무 당신에게 엄격해. 정말 더 자지 않아도 되겠어?”
라이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열흘 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은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보조개가 훤히 드러나는 미소를 짓는 것까지도 다른 점이 없었다.
리제아나는 손을 심장 부근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심장은 일정한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이유야 당연히 알 수 없었다. 확실하지 않으나 어렴풋이 머릿속에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꿈도 아니며 심장이 뛰니 사후 세계는 더더욱 아닐 터였다.
하지만 과거와 겹치는 그의 행동들은 그녀에게 회귀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기적이라 칭할 만한 고귀한 기회가 제 손안에 들어왔다.
본능적인 직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네. 괜찮습니다, 전하.”
입꼬리를 들어 그를 향해 웃어 보이는 리제아나는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았다.
‘너희를. 죽여버릴 수, 있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