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에필로그(3)
테라비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부럽다고? 지금 에델라의 입에서 다른 사람이 부럽다는 이야기가 나온 건가?
“지금 에몬테 님이 부럽다고 한 거야?”
테라비스는 억울했다. 자신은 에델라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니. 에몬테 님이 부럽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하지만 방금 부럽다고 했잖아?”
“아아~ 그건 신혼이 부럽다고 한 거지.”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로즈가 결혼하게 되면 신혼인 셈이니 말이다.
“내 말은 에몬테 님이 부럽다는 게 아니라 신혼 생활이 부럽다, 이 말이야. 우린 그런 게 없었잖아.”
여전히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 것 같자, 그녀는 다시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우리가 신혼이 왜 없었어?”
다만, 테라비스는 에델라와 생각이 달랐다.
“당연히 없었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잖아?”
에델라는 에둘러서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보는 남자를 찾아가 대뜸 계약 결혼을 하자는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며 당돌한 행위인지를 알고 있어서였다.
그때의 에델라는 너무나 다급하여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런 식이라니?”
에델라가 일부러 계약 결혼이나 조건 결혼 같은 말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테라비스는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짓궂게 질문했다.
몇 년이 지났지만 테라비스는 아직도 에델라를 놀리는 재미보다 더 큰 재미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얄밉다는 듯이 흘겨보는 저 얼굴을 보는 것도 전혀 질리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신혼이 어떤 건데?”
“음…….”
이번에는 테라비스가 질문을 했고, 에델라는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에 신혼이 부럽다고 말은 했지만, 콕 집어서 신혼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에델라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뭐랄까,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사랑이 넘치고, 알콩달콩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 그런 것?”
에델라 본인이 생각해도 방금 그 대답은 굉장히 추상적인 대답이었다. 자기가 부럽다고 한 주제에 너무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부끄러워 에델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신혼이라는 것을 겪어보고 뭔지 정확하게 안다면 부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인간은 원래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부러움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 나는 아직도 신혼인데?”
“뭐?”
“사랑이 넘쳐나고, 알콩달콩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은 게 신혼이라며.”
테라비스는 매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에델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왜 못 믿겠어?”
에델라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테라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덩치 큰 테라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차가 잠시 흔들렸다.
“나는 지금, 매우, 사랑이 넘치는 상태야.”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치마를 살짝 깔고 앉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여전히 테라비스가 앉기에는 살짝 비좁았다.
에델라의 허벅지와 테라비스의 허벅지가 맞붙을 만큼, 에델라의 어깨와 테라비스의 어깨가 살짝 엇갈릴 만큼, 딱 그 정도로 비좁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매우 알콩달콩하다고 생각하는데?”
에델라의 어깨와 겹쳐 있던 테라비스의 탄탄한 어깨가 그녀의 뒤로 비집고 들어간다 싶더니,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다른 쪽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자연스럽게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어깨를 자신의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자신의 코끝에 에델라의 정수리가 닿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에 짧게 입맞춤을 하는 테라비스였다.
“아니야?”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빅토리아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칭얼대며 조르는 것은 제 아버지를 닮아서인 것 같았다.
“맞아.”
에델라는 편안하게 테라비스의 가슴에 제 머리를 기대며 그의 질문에, 아니, 그의 투정에 답했다.
“당신 말이 옳아.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아직 신혼이지.”
남들과는 달리 거꾸로 시작한 결혼이었다.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어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위해서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니 남들처럼 결혼 초가 신혼이 아니라, 이제야 신혼이라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으리라.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
에델라는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나서 결혼하자고 했을 때 말이야.”
“아아~ 그때?”
에델라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며 테라비스는 피식 웃었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물론이었다. 다만, 아주 예쁜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매우 이상하고, 매우 흥미로운 여자라고 생각했지.”
낡은 옷차림으로도 덮을 수 없는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얼굴을 잘 붉히는 순진하고 수줍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제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는 당당한 여자였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모두 다 가진 기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바로 에델라였고, 그래서 테라비스는 빠져들고야 말았다.
“그…… 계약 말이야. 아직 지키지 못했잖아.”
“계약?”
“우리가 처음 작성했던 그 계약서.”
“예로니아 저택에서 결혼 허락을 받은 다음 날, 내가 불태워버렸던 그 계약서 말이야?”
“그래. 그것.”
에델라가 이미 오래전에 없애버려 존재하지 않는 계약서의 이야기를 꺼내자, 테라비스는 조금 어리둥절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봤자 보이는 것은 에델라의 탐스러운 금발과 동그랗고 예쁜 정수리밖에 없었지만.
“……내가 아직 당신을 백작님으로 불릴 수 있게 할 남자아이를 낳지 못했잖아.”
조금 망설이는 것 같은 목소리로 에델라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섭섭하다거나, 혹은 아쉽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
“응. 하지 않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에델라와는 달리 테라비스의 대답은 아주 단호했고, 또 확고했다. 자신의 대답과 생각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는 듯이.
“어째서? 그렇게나 작위를 원한 당신이었잖아.”
“첫 번째, 나는 지금 루젠타에서의 사회적 위치에 매우 만족스럽거든. 당신 말대로 나는 아직 작위도 없고, 귀족도 아니지만, 루젠타에서 나는 거의 준귀족이나 다름없는 위치야. 큰 상단의 단장이면서, 예로니아 백작 가의 일원이니까. 혹시 나 혼자만 내가 예로니아 백작 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좋아. 그럼 두 번째. 나는 장인어른께서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 내가 작위를 받기 위해서는 장인어른이…….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으니 일어나야 할 일은 언젠가는 일어나겠지만, 그게 꼭 빠르게 일어날 필요는 없지.”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테라비스가 거기까지 생각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에델라의 심정을 다 아는 듯, 테라비스는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좀 더 꽉 안아주었다.
한없이 강하면서도, 더없이 여린 여자였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싶은 여자기도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우리 사이에 아직 아들이 없는 것은 그야말로 아직일 뿐이지.”
마지막 말은 살짝 고개를 더 숙여 에델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나 같은 욕심쟁이가 아이 한 명에 만족할 거로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테라비스의 품 안에 있던 에델라의 몸이 살짝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작은 변화를 당연히 테라비스는 눈치챘다.
“에델라.”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조금 전의 짓궂은 음성도 아니었고, 다정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에델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테라비스의 가슴에 얹어져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살짝 힘을 주어 그가 고개를 내리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위로 끌어 올렸다.
욕심쟁이는 테라비스만이 아니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바퀴에 돌멩이라도 걸린 것인지 마차가 순간 덜컹거렸지만,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의 신경은 오로지 서로가 서로에게 맞닿은 곳에 가 있었다.
테라비스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에델라가 움찔하며 자신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주었다.
에델라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테라비스가 더욱 이 상황에 집중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오로지 서로에게만 몰두한 키스였다.
늘 그랬듯이.
* * *
예로니아 저택에 마차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린 뒤였다. 하지만 테라비스와 에델라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예로니아 저택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서 오렴.”
“오늘도 수고가 많았겠구나.”
“엄마!”
예로니아 백작과 예로니아 백작 부인, 그리고 빅토리아가 웃는 얼굴로 에델라와 테라비스를 맞았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안고 있던 빅토리아를 내려놓자, 아이는 엄마와 아빠를 향해서 아장아장 걸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딸, 할머니 할아버지랑 재밌게 잘 지냈어?”
테라비스는 예로니아 백작 내외를 향해서 귀가 인사를 하고, 에델라는 빅토리아를 안아 올렸다. 안겨서 좋은 것인지, 엄마 아빠가 돌아와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둘 다인지 몰라도 빅토리아는 소리 내 까르르 웃었다.
그런 빅토리아를 보며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빅토리아와 닮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실은 반대일 것이다. 빅토리아가 에델라와 테라비스를 반반 닮은 어여쁜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자, 아이들이 왔으니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볼까요?”
“그래요. 저녁 먹게 어서 식당으로 오렴.”
마중을 나왔던 예로니아 백작 부부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식당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비키, 엄마 아빠와 함께 맘마 먹으러 갈까?”
에델라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빅토리아는 또다시 까르르 웃었다. 천사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테라비스?”
“응.”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신혼이 부럽지 않은 것 같아.”
분명 조금 전에, 마차에서 신혼이 부럽다고 말했던 에델라가 갑자기 말을 바꾸자 테라비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법 고집이 있는 에델라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훨씬 행복한걸.”
에델라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테라비스 역시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에델라의 말은 옳았다.
“계속 지금처럼 행복하게 해줄게.”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뺨에 살포시 키스했다.
이제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갈 것이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할 것이다. 저녁 메뉴가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 맛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하는 식사이니까.
밤이면 포근한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이 들고, 아침이면 제일 먼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월의 어느 날에 보았던 반짝이는 햇살처럼,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