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에필로그(1)
빅토리아 바넬레오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아주 귀여운 아기였다.
엄마를 쏙 빼닮아 햇살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사파이어같이 파란 눈은 크고 동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어린아이 특유의 짧고 통통한 손발과 볼록 나온 배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아기천사 같았다.
“비키~.”
가족들이 애칭으로 부르는 제 이름을 듣자 아이는 뒤를 휙 돌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사람이 엄마임을 확인하자 활짝 웃었다.
“엄마!”
빅토리아는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예로니아 저택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음만은 얼른 엄마를 향해서 뛰어가고 싶었지만, 아직 뛸 줄 모르는 빅토리아로서는 그게 가장 빠른 속도였다.
“사랑하는 우리 딸.”
에델라는 자신에게 달려온 빅토리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가방 하나도 들기 힘들어 보이는 가냘픈 팔에서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빅토리아가 아무리 무거워져도 에델라는 아이를 안아 들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아이가 다 자라서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 이상은.
“엄마 다녀올 때까지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재밌게 놀고 있으렴.”
에델라는 아이의 볼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간지러워서인지, 엄마의 키스가 좋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하루하루가 즐거워서인지 비키는 까르르 웃었다.
“얼른 가보렴. 그러다 늦겠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에델라에게 다가서서 빅토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할머니의 품이 익숙한 듯, 순순히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품에 안겼다.
“비키는 내려놓으세요. 손목도 안 좋으시면서.”
“무슨 소리니? 우리 손녀 안는 건 아무 문제 없다. 그렇지, 비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비키를 내려놓으란 에델라의 말에 정색하곤, 비키를 향해서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비키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의 미소에 에델라도, 예로니아 백작 부인도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에델라! 이리 와서 이것 한잔 마시고 가렴.”
커다란 나무 그늘의 테이블에 앉은 예로니아 백작이 소리쳤다.
“그래. 오늘 날씨가 더우니, 시원한 것을 한잔 마시고 가렴.”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빅토리아를 안은 채, 먼저 예로니아 백작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의자 하나에 빅토리아를 앉히고, 아이에게도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레모네이드 마시게 해주었다.
꿀꺽꿀꺽 잘도 마시는 빅토리아를 보며 예로니아 백작과 백작 부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 정돈된 정원과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마치 어렸을 적의 한때 같다고, 에델라는 생각했다.
에델라가 어렸을 적, 행복했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희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한 건데, 요즘 보면 그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저희를 데리고 사는 것 같아요. 저랑 테라비스, 그리고 빅토리아까지요.”
테이블로 다가온 에델라는 예로니아 백작이 권한 레모네이드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 집 자체가 너희 집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런 생각 말아라. 나는 테라비스에게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
예로니아 백작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짐짓 엄격한 표정을 하고 에델라에게 말했다.
겨우 사람이 다닐 길 정도만 그가 손수 정리했던 예로니아 저택의 정원은 단정하게 나무들이 다듬어져 있을 뿐만이 아니라, 계절별로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나 기울어진 천장, 갈라진 벽은 말끔히 수리되었고, 텅 비어 있던 방들을 가구로 채우고, 곳곳에 그림과 오브제로 장식했으며, 적막했던 저택은 고용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에델라가 임신했을 때, 바쁜 자신을 대신해서 안정적으로 에델라를 봐주고, 임산부가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항시 옆에 있는 것이 좋겠다며 예로니아 저택으로 들어가 사는 것을 제안한 테라비스 덕분이었다.
당연히 에델라는 좋아했고, 예로니아 백작과 백작 부인은 테라비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에델라와 태어날 손주를 가까이에서 늘 볼 수 있게 되어 고마워했다.
“다 마셨으면, 비키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보렴.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니?”
“네. 맞아요.”
에델라는 남은 음료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델라의 출근을 위해 마차는 이미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자, 비키. 엄마에게 인사를 해야지?”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빅토리아의 손을 잡고 대신해서 흔들어주었다. 비키는 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델라를 바라보다 이내 방긋 웃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 특유의 해맑은 미소였다.
* * *
에델라가 탄 마차가 도착한 곳은 시내의 상점가 골목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에델라는 익숙하게 그중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의 내부에는 많은 옷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빼곡하게 구두가, 다른 한쪽에는 멋들어진 모자가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가게의 안쪽에는 귀금속도 전시되어 있었다.
“오셨어요, 사장님?”
“제니, 일찍 출근했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직원에게 에델라는 작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에델라는 이 가게 무엇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주인이었다.
“네.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여기, 예약 명단이요.”
제니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명단을 재빨리 에델라에게 건넸다.
“중요한 손님이라는 건 오후에 오실 포웨이스 남작 부인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분도 중요한 분이시긴 하지.”
에델라는 제니의 짐작이 틀렸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며 그녀가 건넨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다.
“포웨이스 남작 부인께서 참석하시는 무도회가 렌달프 남작 부인께서 주최한 장미정원에서의 야외 무도회인 거지?”
“네. 맞아요.”
에델라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손님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가 에델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에델라의 가게가 그저 옷과 장신구를 파는 평범한 가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초여름의 야외 정원이라면 꽃들도 피어 있긴 하지만 초록색이 많겠지. 거기다가 야외라면 실내보다는 조명이 어두울 테니, 드레스는 밝은색이 좋겠어. 노란색이나 흰색, 아니면…… 하늘색?”
에델라는 예전에 한번 가보았던 렌달프 남작 부인의 정원을 떠올리며 드레스가 걸린 쪽으로 걸어갔다. 제니 역시 잰걸음으로 에델라를 뒤따랐다.
“드레스는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
에델라는 노란색의 드레스와 고급스러운 레이스로 만들어진 흰색의 드레스, 그리고 연한 하늘색의 드레스를 집어 들어 제니에게 건넸다.
“아니, 잠깐만. 남작 부인의 머리카락 색엔 흰색은 어울리지 않겠어. 이건 빼도록 할게.”
제니의 손에서 흰색의 드레스를 가지고 와서 도로 옷걸이에 걸며 에델라는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포웨이스 남작 부인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리고 어울리는 구두는 노란색에는 이것, 하늘색에는 이것.”
에델라의 손이 구두장에서 레이스로 곱게 싸인 흰색의 구두와 화려한 큐빅이 박힌 새파란 색상의 구두를 꺼내었다.
“저녁이고, 화원에서 열리는 무도회이니 모자보다는 코르사주가 포인트로 예쁠 것 같네.”
모자장은 과감히 패스하고 여러 장식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에델라는 멈추어 섰다. 이전에 거침없이 드레스와 구두를 골랐던 것과는 달리 에델라는 꽤 고심했다.
모자보다 머리에 코르사주 장식을 하는 것이 장소에 어울릴 것 같긴 했지만, 너무 작은 코르사주는 눈에 띄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포웨이스 남작 부인의 나이를 고려하면 너무 화려한 것도 안 되었다.
너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지는 않고, 적당하게 고상하면서도, 포웨이스 남작 부인의 머리에 어울릴 만한 것.
“이게 좋겠어.”
에델라는 고심 끝에 두 송이의 꽃이 붙어 있는 모양새의 코르사주를 골랐다. 그리고 아까 골랐던 드레스의 위에 코르사주를 가져다 대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포웨이스 남작 부인께서 방문하시면, 지금 골라놓은 것들을 가지고 오도록 해. 부인께서 직접 입어보시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실 수 있도록.”
“하지만 포웨이스 남작 부인께서는 본인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시는 걸로 선택하실걸요? 저희 부티크에 오시는 손님들은 다들 그것 때문에 오시는 거니까요. 사장님의 뛰어난 안목과 센스를 믿고 오시는 거죠!”
제니의 아부와 사실이 반쯤 뒤섞인 말에 에델라는 작게 웃었다.
에델라가 운영하는 이 부티크가 특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원하는 손님이 있다면, 에델라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코디해준다는 것.
에델라와 함께 몇 번 쇼핑하고, 그녀가 골라준 자신의 옷들이 모임에 전부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에델라가 하고 다니는 것들이 소소하게 루젠타 귀부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어떤 것들은 유행까지 하는 것을 본 테라비스의 아이디어였다.
처음에는 장사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 에델라는 사양하려 했지만, 분명히 대박이 날 거라는 테라비스의 강력한 권고에 마지못해 시작했던 가게였다.
그리고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테라비스의 아이디어답게, 에델라의 부티크는 매우 잘되었다.
에델라의 코디를 받으려는 귀부인들이 줄을 섰을 뿐만이 아니라, 에델라가 손수 골라놓은 옷이나 소품들이 마음에 들어서 물건을 사러 오는 부인들도 많았다.
특히나 에델라가 어느 무도회에서 착용한 드레스와 비슷한 것이라던가, 어느 티타임에서 낀 반지, 혹은 지금 신은 구두와 똑같은 것이라는 주문을 손님들이 많이 했다.
“어서오세…… 아! 바넬레오 단장님! 안녕하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손님인 줄 알고 인사를 하려던 제니는 금세 말을 바꾸며 더욱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 제니 양.”
테라비스 역시 반가운 목소리로 제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은 새로 들어온 모자를 좀 가지고 왔답니다.”
그리고 에델라에게도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에델라는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닌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는데 덥지는 않았어?”
테라비스에게 다가가 가벼운 볼 키스를 하며 에델라가 물었다. 약간의 땀 냄새와 달짝지근한 레모네이드의 냄새가 그에게서 났다.
그 냄새를 맡으며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어버렸다.
“왜 웃어?”
웃고 있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에델라의 미소를 본 순간, 자기도 이미 웃고 있었으면서.
“어머니가 레모네이드를 주셨어?”
“아! 맞아. 오늘 아침에 날씨가 덥다고 직원들과 함께 마시라며 커다란 통에 싸주셨지. 아주 맛있게 잘 마셨어.”
테라비스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레모네이드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거봐.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지?”
결혼 초부터 부르짖던 그 구호를 테라비스는 오늘도 입 밖으로 꺼내고야 말았다.
“아, 물론 우리 장인어른께서도 사위 사랑이 대단하시지만. 어제는 뭐라고 하셨더라?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사위라고 하셨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척을 하며, 테라비스는 어젯밤 저녁을 먹으면서 예로니아 백작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내뱉었다.
“혼자 온 거야? 같이 오기로 하지 않았어?”
“아, 같이 왔지. 곧 들어올 거야.”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가게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에델라는 밝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던 귀한 손님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