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진짜 첫날밤2022.03.07.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예로니아 저택에서 나와 마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자마자,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 말했다.
“알아. 당신이 모르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았거든.”
고개를 까딱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안거야?”
슬쩍 자신을 올려다보며 수줍게 말하는 에델라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테라비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껴안을 뻔했다.
“그냥 보니까 알 수 있던데?”
팔에 잔뜩 힘을 줘서 에델라를 껴안으려는 것을 겨우 참은 테라비스는 대신 에델라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상당히 모호한 대답이긴 했지만,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보니까 알 수 있었다. 테라비스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 에델라를 보고 있었으니까.
“뭘 보고 알게 된 건데?”
그리고 역시나. 모호한 대답으로는 에델라의 의문을 다 채울 수 없었다.
“음……. 뭘 보고 알았냐고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척을 하던 테라비스가 슬쩍 에델라를 쳐다보자, 그녀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 테라비스는 또 그대로 벌떡 일어나 에델라를 당장 껴안을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그랬다가 사고가 나서 에델라가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이 예쁜 파란 눈이 나를 보고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진짜 그랬다. 그저 힐끗 자신을 쳐다보거나, 빤히 쳐다보거나, 혹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라비스를 바라보던 에델라의 눈빛이 어느 새부터인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떨 때는 애절함이었고, 어떨 때는 간절함이었다. 또 어떨 때는 순수한 애정이었다.
“내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봤다고?”
에델라는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테라비스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서 이리라.
“그래.”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대답이 영 미심쩍은 것 같았다. 자신이 테라비스를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쳐다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사랑에 빠진 소녀가 맞았지만.
“더 듣고 싶다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 답변은 당신이 더 싫어할 것 같은데?”
“내가 뭘 싫어할 거라는 거야?”
“당신의 키스가 달라진 걸로 알았지.”
그 말과 함께 테라비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서 전복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만큼의 움직임이었다.
“이건 대답보다는 직접 해보는 게 확실하게 알 수 있을걸?”
“뭐?”
에델라가 뒤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두 사람 모두 듣지 못했다. 에델라의 옆에 앉은 테라비스가 순식간에 에델라의 입술을 덮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전부 꿀꺽, 그가 삼켜버렸으니까. 처음에는 당황했던 에델라였지만, 이내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테라비스가 말한 자신의 키스가 달라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에델라의 입술에 톡톡 노크했다. 그게 자신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허락의 인사라는 것을 에델라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벌려 테라비스가 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그를 수줍게 환영해 주었다. 제 안으로 들어오는 테라비스의 긴 숨결과 느린 호흡을 에델라는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그와의 키스가 이제는 제법 익숙했다.
“에델라.”
잠시 입술을 떼어낸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떴다.
“알 것 같아?”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그제야 이 키스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키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 미안. 잘 모르겠어.”
그것을 까맣게 잊고, 그저 테라비스의 입술이 주는 감촉과 느낌만을 쫓고 있었던 에델라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테라비스의 입술이 슬쩍 호선을 그리는 것이 그의 입술과 닿아 있는 에델라의 피부로 느껴졌다.
“좋아. 집에 가서 천천히 더 알아보도록 하지.”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 * *
“에델라.”
부름은 순식간이었고, 키스는 그것보다 더욱 급했다. 테라비스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에델라를 와락 끌어안았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막 들어온 에델라가 깜짝 놀라는 사이, 채 닫히지도 못한 문을 테라비스는 발로 걷어차서 닫았다. 문이 닫히자, 놀라서 동그래졌던 에델라의 눈이 그제야 스르륵 감겼다. 테라비스는 그 변화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안으며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에도 두 입술이 여전히 붙어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당신의 입술은 이제 나를 거부하지 않지.”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침대에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입술을 떼어냈다. 하지만 아쉬운 듯, 결코 멀리 가지는 않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에델라의 입술 근처에서 테라비스는 속삭였다.
“처음과는 달리 내가 다가온다고 해서 벌벌 떨지도 않고.”
에델라의 허리춤에 얹어져 있던 테라비스의 손이 가볍게 에델라의 손목을 쓸어올렸다. 안쪽 손목의 여린 피부에 닿은 그의 손은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에델라가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위쪽 팔뚝을 부드럽게 문질렀을 때는, 에델라의 체온도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날 원하고 있는 같은 느낌이야.”
테라비스가 낮은 음성으로 에델라의 귓가에 그 말을 속삭이자 귓불의 보드라운 솜털이 바싹 일어나고, 팔에서는 닭살이 오스스 돋아났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에델라는 이제 테라비스가 다가오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을, 그의 숨결을, 그의 체온을, 에델라는 원하고 있었다.
“에델라.”
테라비스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지금처럼 그의 입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귓바퀴든, 귓불이든, 목덜미든. 눈을 감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지러이 오색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찔한 감각 속으로 몸이 훌쩍 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 에델라가 내던져진 곳은 침대였다. 에델라는 어느새 침대의 위로 쓰러져 있었다.
“내가 틀렸나?”
에델라의 위로 제 몸을 드리운 테라비스가 물었다.
“아니. 당신 말이 맞아.”
첫날밤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에델라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라비스의 너머로 보이는 천장과 언뜻 보이는 커튼도 똑같았다. 하지만 감정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난 이제 당신이 무섭지 않아.”
에델라는 손을 뻗어 조금 전에 자신과 키스했던 테라비스의 입술을 만졌다. 조금 전 에델라에게 키스를 했던 입술이었다. 그리고 곧 에델라의 입술에 키스를 할 입술이기도 했다.
“그래. 오히려 지금은 당신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아.”
천천히 에델라는 손을 내렸다. 테라비스의 턱을 지나, 단단하고 긴 그의 목덜미를 더듬어 내려와, 그의 실팍한 가슴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단단한 근육이 만져졌고, 그 아래로 테라비스의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그것은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내가 뭐든지 주려고 한다는 건 이미 알겠지?”
조금은 짓궂은 표정으로 테라비스는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는 덤이었다.
“그래. 알아.”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미소를 보며 자기도 웃어버렸다. 그리고 에델라의 미소를 보자 이제껏 최선을 다해서 자제하고 있던 테라비스는 자신이 더는 참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아내는 너무 아름다웠고, 지금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늘이 우리의 첫날밤이 될 거야.”
테라비스는 자신의 몸을 에델라에게 더욱 바싹 붙이며 말했다.
“뭐? 하지만…….”
첫날밤은 이미 두 달 전이었다. 다른 의미의 첫날밤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며칠이나 지난 뒤였다.
“아니야. 오늘이야.”
달콤한 미소와 그것보다 더 달콤한 속삭임이 에델라의 귓가에 닿았다. 다시 에델라의 팔에서 닭살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오늘 밤에 우리는 진짜 부부가 되는 거야. 그러니, 오늘이 우리의 진정한 첫날밤이 되는 거야.”
그제야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말하는 첫날밤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저 계약으로 맺어졌던 날의 밤이 아니라, 서명된 종이에서 말하는 조건의 밤이 아니라, 사랑하는 부부로서의 첫날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델라 드 예로니아.”
웃음기를 걷어낸 검은 눈동자가 진중하게 에델라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테라비스 바넬레오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테라비스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네. 맹세합니다.”
대답하는 에델라의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테라비스 바넬레오.”
이번에는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은 에델라 드 예로니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네. 맹세합니다.”
맹세의 말이 부부의 침실에 조용히 울렸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도, 아무도 듣는 이가 없어도, 두 사람은 부부의 맹세를 했고, 죽을 때까지 그것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에델라.”
남편은 아내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에델라 드 바넬레오.”
곧이어 아내의 콧잔등에도 남편의 키스가 내려앉았다. 마치 여린 꽃잎에 나비가 내려앉듯, 사뿐한 움직임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부인.”
사랑하는 이라는 말은 에델라의 윗입술에, 부인이라는 말은 에델라의 아랫입술에 부딪혔다. 에델라는 미소를 지으며 제 입술에 앉은 그 단어들을 핥았다. 그것은 부드럽고도, 달콤한 맛이 났다.
“테라비스.”
에델라는 미끄러지듯이 손을 올려 테라비스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곁으로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기분 좋은 무게감이 에델라의 몸으로 느껴졌다.
“나와 같은 성을 쓰는 남자.”
입술과 입술이 스쳤지만, 에델라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테라비스가 알아듣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아주 어쩌면, 에델라의 말은 이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일지도 몰랐다.
“당신을 사랑해.”
이 달콤한 고백 역시, 어쩌면 마음으로 들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심장으로 곧장 스며든 것일지도 몰랐다. 테라비스는 웃으며 에델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늘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