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진짜 결혼, 진짜 부부2022.03.04.
예로니아 저택에서의 저녁 식사는 소박했다. 평소 예로니아 백작 내외가 먹던 것에 비하면 손님을 위해서 한껏 더 차린 식탁이긴 한 것이었지만, 테라비스가 보통 먹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재료에 몸값 높은 주방장이 차린 저녁에 비하면 분명 소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라비스는 웃으면서 맛있게 식사했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었는지 모르겠네. 집에서 좋은 것만 먹을 텐데 말이야.”
“무슨 말씀을요. 전부 맛있었습니다.”
테라비스의 말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다행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다 마친 듯하니, 내가 차와 후식을 준비해 오도록 하지.”
“제가 할게요, 아버지.”
예로니아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에델라가 얼른 그를 만류했다.
“아니다. 요즘은 몸이 아주 좋아져서 이런 것은 내가 하고 있단다.”
예로니아 백작은 되레 에델라를 만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꼬박꼬박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충분히 영양을 섭취했더니, 예로니아 백작의 병세는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오늘의 자리는 그래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에델라와 테라비스의 덕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예로니아 백작이 손수 준비한 차와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오늘 구운 과자와 함께 네 사람은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맛있는 식사와 또 맛있는 차에 보답하기 위해 제가 준비한 것이 있는데, 두 분께서 부디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하나의 대화 주제가 마무리되었을 때, 테라비스는 제 품 안에 손을 넣으면서 말했다.
“이미 차 선물만으로도 감사했는데!”
“그리고, 예쁜 꽃도.”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남편이 좋아했던 선물을, 예로니아 백작은 부인이 좋아했던 선물을 언급하며, 마주 보고 웃었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정말로 좋은 날이었다. 내내 불안했던 벨본은 며칠 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딸 내외가 드디어 예로니아 저택을 방문해 즐거운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더 길게 보자면, 예로니아 백작의 병세는 나아가고 있었고, 덕분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해야 할 일은 줄었으며, 딸은 행복해 보였다. 예로니아 백작 내외가 앞으로도 오늘만 같은 날이 이어졌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열어보십시오.”
테라비스가 내민 선물용의 예쁜 봉투를 예로니아 백작이 받아들었다. 에델라는 그 옆에서 얼른 열어보라는 듯 눈짓했다. 예로니아 백작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몸을 기울여 백작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함께 보았다.
“어머나!”
“이건!”
봉투에서 나온 문서를 보고 예로니아 백작과 백작 부인은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고,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예로니아 저택의 소유권 문서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언젠가,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라고 할 때나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문서가 지금 그들의 손안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자네가…….”
예로니아 백작은 얼마나 놀랐던지 말끝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설명하자면 깁니다.”
“말해보게. 시간과 차는 아주 충분하지 않은가?”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어젯밤, 두 사람은 예로니아 백작 내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의논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결론 내렸다. 강직한 예로니아 백작은 테라비스의 속임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그래도 자신의 피붙이 인지라 벨본을 가엾게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두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속여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예로니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너희 둘이 고생이 많았구나.”
그리고 생각 끝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두 사람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담아서 말했다.
“우리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부모로, 또 어른으로, 자식들에게 이렇게 도움만 받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예로니아 백작은 손에 있던 저택 소유권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당연히 받으셔도 됩니다. 그것의 원래 주인이 아니십니까?”
“내가 어리석고 무능하여 잃었던 것인데, 어찌 내가 주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나?”
“에델라에게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물론,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그 당시의 백작님께서 바른 판단을 하신 것은 아니지요.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선뜻 서명하셨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그를 도와주고 싶은 선한 마음에 그러셨던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내가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자네 말대로라면, 이 저택의 주인은 이제 자네라고 할 수 있겠지.”
“당연히 받으셔도 됩니다. 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예로니아 백작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테라비스는 그의 사위이긴 했다. 다만, 그저 계약상의 장인이었고, 서류상의 사위였다. 사실은 진짜 장인이 아니었고, 진짜 사위가 아니었으며, 진짜 가족도 아니었다. 이런 큰 선물을 덥석 받을 사이가 아니란 말이 예로니아 백작이 하려던 말이었다. 하지만 예로니아 백작은 체면상 차마 그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 예로니아 백작을 보며 테라비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눈치 빠른 테라비스가 벌써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제가 청한 이유는 방금 드린 예로니아 저택 소유권을 전해드리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것은 에델라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어젯밤, 테라비스와 에델라가 의논한 것은 예로니아 저택의 소유권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테라비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테라비스의 발언에 이번에는 예로니아 백작과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따님과 결혼을 하고 싶으니, 허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자네가 말하는 따님은…… 에델라를 말하는 거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예로니아 백작 부부에게 자녀라곤 외동딸인 에델라밖에 없었다.
“네. 맞습니다.”
테라비스 역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네는 이미 내 딸이랑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예로니아 백작의 말에 옆에서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혼한 딸과 결혼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니? 부부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전에 했던 계약 결혼 말고, 진짜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아니 에델라까지 포함하여 세 사람의 당황스러움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웃으며 말했다.
“따님을, 에델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요.”
“뭐?”
“에델라?”
“테라비스!”
테라비스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예로니아 백작은 당황해서 되물었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에델라를 찾았으며, 당사자인 에델라 역시 깜짝 놀라서 테라비스의 이름을 불렀다. 정작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인 테라비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예상했고, 또 자기 생각대로 되어간다는 듯이.
“장인, 장모님께서 놀라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당신은 놀라면 안 되는 것 아니야?”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바라보며, 놀리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은 알았어야지.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 난……. 몰랐어.”
사실, 테라비스는 알고 있었다. 에델라는 몰랐다는 걸. 이 똑똑하지만 순진한 아가씨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를 거라는 것을.
“어떤 바보 같은 남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질투를 하겠어? 또 어떤 멍청한 남자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비싼 선물을 하고, 그 부모님께 잘 보이려 그 집의 재산을 되찾아주려고 하고?”
“난 그냥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서 호의를 베푸는 거로 생각했어.”
“좋아. 그럼 당신 식대로 말해줄게. 어떤 바보 같은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 거라고 생각해?”
테라비스는 웃으면서 에델라의 손을 잡았다. 이미 자신과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이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에델라.”
그것은 진심이었다. 테라비스는 진심을 담아서 에델라의 손에, 정확하게는 결혼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의 위에 키스했다. 거짓으로 끼워진 반지에 자신의 진심을 얹은 것이었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어.”
방금 에델라의 손에 입을 맞췄던 입술이 슬쩍 호선을 그렸다.
“당신과는 달리 나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거든.”
“안다고?”
“응. 알아. 하지만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군.”
에델라는 자신은 뭐든 다 안다는 듯한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한결같을까?
“나도 당신이 좋아, 테라비스.”
에델라는 자신의 손을 잡은 테라비스의 손을 마주 꼭 잡았다. 그의 손에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에델라가 결혼식장에서 끼워준, 그 반지였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테라비스의 입술이 더욱 크게 호선을 그렸다. 저 말이 듣고 싶었다. 에델라의 눈빛에서, 에델라의 목소리에서, 또 몸짓에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입술에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들었다. 테라비스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고백에 활짝 웃었다.
“제가 순서를 조금 틀리긴 한 것 같지만, 어쨌든 신부의 허락은 얻은 것 같군요.”
테라비스는 고개를 돌려 예로니아 백작 내외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놀랐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그저 테라비스와 에델라를 따스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 있는.
“결혼 허락을 해주시겠습니까?”
테라비스의 요청에 예로니아 백작은 자신의 아내 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자신의 부인이 자신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손을 통해서 그는 알 수 있었다.
“물론이네. 내 딸을 행복하게 해주게.”
예로니아 백작은 기꺼이 결혼을 허락했다. 이제 새로 시작할 신혼부부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될 것이다.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서로 사랑하는 부부라는 것은 원래 그런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