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문제의 해결2022.02.28.
“상황을 종합해보자면, 여러분의 볼일은 다 끝나신 것 같은데요.”
분명 당사자였지만, 에델라의 등장과 로즈의 검과 또 테라비스의 등장으로 인하여 어느덧 대화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스멘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말대로 에델라와 테라비스의 볼일은 이미 끝난 뒤였다. 로즈의 볼일은 아직 시작 전 이긴 했지만, 그건 뒷일을 생각하면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괜찮으시다면, 제 볼일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멘델은 제법 예의 바르게 에델라와 테라비스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가 그렇게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에델라가 그 저명한 법률학자에게 스멘델이 들고 있는 차용증과 기한연장동의서에 대한 합법적인 소견서를 들고 와서였다. 두 번째는 테라비스가 스멘델의 영업 형태에 대해서 은근한 이의를 제기하며 그가 가진 루젠타의 인맥이 어떠한지를 웃으며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단순했다. 위의 두 가지 일이 일어나고 나서 그것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스멘델의 오른팔이자 칼잡이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단 10초 만에 로즈에 의해서 오히려 그가 제압당하고 말았다. 법적으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으로나, 무력으로나, 완벽하게 제압당한 스멘델은 그들에게 고분고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벨본 드 저바이스 님. 저와 함께 제 사무실로 가셔서 우리의 재정 상태와 주고받을 것에 관해서 대화를 좀 해보실까요?”
스멘델은 매우 상냥하고 부드럽게 벨본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매우 거칠게 각각 벨본의 양팔을 붙들고 있었다. 마치 벨본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는 것처럼.
“이거 놔! 지금 감히 귀족의 신변을 천한 평민 주제에 구속하는 것이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분명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편안한 대화를 위해서 사무실까지 저바이스 님을 안내해드리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이익! 이게 무슨 안내야! 이것 놔! 안 놔? 놔!”
벨본은 눈을 부라리며 제 팔을 붙들고 있는 스멘델의 부하들에게 소리를 쳤지만, 그들은 스멘델의 말이 아니라면 듣지 않았다. 그리고 스멘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벨본을 사무실로 끌고 가라고 미리 말해둔 뒤였다. 순순히 따라가지 않는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다. 그나마 벨본이 아직 한 대도 얻어맞지 않았고, 칼로 위협당하고 있지 않은 것은 지금이 환한 대낮인 데다가, 이곳이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시내에 있는 스멘델의 사무실에 들어간다면 그들의 태도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벨본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작고 어두운 지하실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놔!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그리고 끌려가는 벨본의 태도를 봐서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럭저럭 다 끝난 모양이군요.”
발악하며 끌려가는 벨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세 사람의 곁으로 마틴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아까 부두로 가지고 갔었던 커다란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렇군. 끝이군.” 마틴의 말을 받은 것처럼 테라비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멍하니 있던 에델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의 말이 옳았다. 끝이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에델라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에델라!”
에델라가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으려던 순간, 테라비스가 급히 그녀의 허리와 팔을 붙들었다. 덕분에 에델라는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테라비스에게 기대어 설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즈가 에델라에게 물었다.
“아뇨. 괜찮아요.”
순간 밀려온 안도감과 긴장이 풀려서 그랬던 것인지라 에델라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로즈의 배려를 사양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
여전히 에델라의 허리와 팔을 붙든 채, 테라비스가 말했다.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앉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까는 사양했지만, 긴장으로 마른 입과 목을 좀 축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아, 에몬테 님. 아까 아주 멋있었습니다. 역시나 검술 솜씨가 뛰어나시더군요.”
“아닙니다.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테라비스의 칭찬에 로즈는 씩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그래서 에몬테 님이 멋있으시다는 겁니다. 요즘 세상에는 제 할 일도 못 하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항상 존경스럽습니다.”
마틴이 팔꿈치로 상단의 문을 열며 말했다. 그러자 로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틴이 열어준 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치, 아주 자주 그렇게 문을 열어주고 그 문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그 사실을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동시에 눈치챘다.
“잠깐만, 두 사람.”
그리고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낸 사람은 당연히 테라비스였다. 그의 부름에 앞서 있던 로즈와 마틴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 역시도 테라비스에게는 뭔가 수상쩍게 느껴졌다.
“뭐야? 왜 이렇게 호흡이 딱딱 맞아? 둘이 무슨 사이야?”
테라비스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저 가벼운 농담과 같은 말이었다.
“아! 그! 네? 아! 네?”
하지만 로즈가 한껏 당황하며 이상한 반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동시에 벨본 때문에 화가 났을 때도, 그의 중요 부위에 검을 겨누었을 때도, 테라비스가 그녀를 칭찬했을 때도, 내내 무표정했던 로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저기, 아니, 그게, 정말…… 무슨 사이인 거야?”
폭발적인 로즈의 반응에 이제는 가볍게 말을 건넸던 테라비스가 도로 당황할 차례였다.
“네.”
깔끔하고 단호한 목소리는 마틴의 입에서 나왔다. 놀란 눈들이 마틴을 향했다. 테라비스와 에델라, 그리고 로즈뿐만이 아니라 열린 문 너머의 상단 직원들까지도 모두 마틴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사이인데?”
자신이 물어봐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테라비스는 마틴에게 물었다.
“저희는…….”
마틴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옆에 선 로즈를 바라보았다. 붉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마틴은 로즈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로즈의 붉은 얼굴이 조금 진정되고, 장밋빛의 발그레한 홍조만이 남은 채, 로즈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손을 잡았어!’
“……!!”
‘저 결벽증 환자가!!’
“……!!!”
‘다른 사람 손을 잡았어!!!’
“……!!!!!”
‘으아아아아!!!!’
소리 없는 아우성이 붉은바람 상단을 휩쓸었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입을 연 것은 이 상황을 만든 마틴이었다.
“이런 사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다른 말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축하해, 마틴! 그리고 에몬테 양도요.”
테라비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마틴이 로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것은 조금 눈치를 챘었지만, 이렇게나 진전이 있었는지는 전혀 몰랐었다. 물론, 그 진전에 자신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뭐야?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좀 됐습니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마틴이 대답했다.
“좀이 언제인데? 응?”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뭐가 궁금하긴? 언제부터 사귀었는지,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지, 앞으로의 미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손은 대체 언제 놓을 건지?”
아직도 로즈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마틴의 손을 넌지시 눈짓하며 테리비스는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왜요? 부러우십니까?”
“아니. 내가 왜? 나도 내 것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손이 잡힌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라비스를 쳐다보았지만, 눈이 마주치자 테라비스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뻔뻔스럽게. 그런 테라비스의 미소를 보자, 에델라도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제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으니까.
* * *
마차에는 한 아름의 꽃이 실렸다. 커다란 해바라기와 청초한 백합, 소담스러운 수국 외에도 테라비스는 이름도 모르는 꽃들이 한가득하였다. 모두 정원에서 에델라가 하나하나 골라서 꺾은 꽃들이었다.
“솔직히 이해는 안가.”
테라비스는 물끄러미 연보라색의 수국을 쳐다보다가 말을 툭 던졌다.
“왜 여자들은 먹지도 못하고, 쓸모도 없는 꽃을 좋아하는 거지?”
테라비스의 미간 주름이 그의 의문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쁘니까.”
에델라는 어여쁜 꽃을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예쁜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작은 미소와 함께. 그리고 테라비스는 그런 에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에 어느새 슬며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뭐, 그렇게 말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긴 하군. 그래도 선물이 정원에서 꺾은 꽃이라면 좀 그렇지 않아? 뭔가 돈과 성의가 너무 없어 보이잖아?”
“아니야. 어머니는 좋아하실 거야. 그리고 당신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차를 준비했잖아? 어머님도 차를 좋아하셔.”
에델라는 곱게 포장된 상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실 선물을 이미 당신이 가지고 있잖아.”
에델라의 시선이 테라비스에게 닿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이었다.
“그런가?”
그런 에델라의 시선이 조금 무안하고 부끄러운 듯, 테라비스는 그답지 않게 슬쩍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혹시 처음부터 그러려고 계속 예로니아 저택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겠다고 했던 거야? 그 문서를 되찾을 생각이었고, 그걸 우리 부모님께 전달하려고?”
“뭐 비슷해.”
“맞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비슷한 건 뭐야?”
“맞긴 하는데, 완전히 딱 맞는 건 아니고, 그냥 비슷하다~ 뭐 그런 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있어, 그런 게.”
에델라의 질문에 테라비스는 두리뭉실하게 대답하며 또 시선을 회피했다. 오늘의 테라비스는 뭔가 이상했다. 예로니아 저택에 뭐라도 숨겨둔 사람처럼, 계속 가자고 졸라대던 테라비스가 드디어 오늘 약속을 잡아서 예로니아 백작 내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아버지는 뭘 좋아하시고, 어머니는 뭘 좋아하시냐고 꼬치꼬치 캐물었고, 어쩐 일로 옷은 뭘 입으면 좋겠냐고 에델라에게 물어보았으며, 준비를 다 하고 나서는 마차에 타지는 않고 혼자 뭔가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몰라도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에델라는 매우 조심스럽게 테라비스에게 물었다.
“응? 아, 아니. 아무 문제 없어.”
테라비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차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테라비스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 아주 중요한 문제를 앞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