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악당과 두 여자2022.02.25.
“빌어먹을 평민 새끼! 내가 이대로 물러날 줄 알아? 당장 귀족 모독죄로 고발하고 말겠어. 어디 감히 천한 장사치 주제에 나에게 사기를 쳐? 내 반드시 그놈을 철창에 처넣고 말겠어!”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테라비스를 향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벨본은 항구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 고발장을 작성해서 자신에게 사기를 친 놈을 감옥에 처넣지 않으면, 이 분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이!”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목소리가 벨본을 부르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는 곧장 고발장을 작성하러 갔었을 것이다.
“저놈은 또 왜…….”
그자가 누군지를 확인한 순간, 벨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고, 입술이 비틀리며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런 벨본의 표정을 보며 그자는 피식 웃으면서 붉은바람 상단의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제 몸을 떼어냈다.
“마침 잘 만났군.”
벨본은 인상을 펴고, 스멘델에게 다가섰다. 테라비스와의 일이 전부 틀어진 이상, 이제 벨본에게 남은 희망은 스멘델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스멘델이 에델라에게 받아낼 10억 루나에서 벨본이 받을 몫이 그에게 남은 희망이었다.
“우리 협상을 다시 해야겠어.”
“협상이라니?”
“내 몫을 낮추고 기한을 늘려달라고 했잖아.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 그러니까 다시 원래의 계약대로…….”
“아! 그래. 맞아. 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당신을 찾아온 거야.”
당장 에델라를 재촉해서 돈을 받아내고, 원래대로 제 몫을 30%로 달라고 하려던 벨본의 말을 싹둑 잘라내며, 스멘델은 입을 열었다.
“기한을 늘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해.”
“그래.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에델라를 찾아가서…….”
“벨본 드 저바이스. 당신이 빌려 간 내 돈을 지금 당장 갚아야겠어.”
“뭐?”
“금액은 알고 있겠지? 이전에 당신에게 일러주었으니까 말이야. 사실 그동안 이자가 더 붙었지만,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그것은 탕감해주도록 하지.”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10억 1천 2백만 루나야. 서류를 보여줄까? 이미 본 서류겠지만, 당신이 직접 서명한 차용증과 역시 당신이 직접 서명한 채권 기한 연장동의서가 나에게 있거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그건 분명 에델라에게서 받기로 한 돈이잖아? 그래서 나와 나누기로 한!”
벨본은 악에 받쳐서 누가 듣거나 말거나 버럭 소리쳤다.
“역시 그랬군요.”
씩씩거리는 벨본의 목소리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얹어졌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이 조용히 붉은바람 상단의 문을 열고 나왔다.
“에, 에델라!”
금세 낯빛이 창백해진 벨본과는 달리 에델라는 무표정했고, 차분했다. 마치 벨본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배신감이나 분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델라의 뒤에 선 로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용히 그림자처럼 에델라의 뒤에 서서 벨본을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전에 제가 외삼촌께 말씀드렸죠? 외삼촌의 빚은 외삼촌이 갚으시라고요. 그때 분명 외삼촌께서는 알겠다고 말씀하셨고요.”
“그, 그랬었지.”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갚으실 생각이 전혀 없으셨던 것 같군요.”
“…….”
“제 남편에게 접근하지 말라고도 말씀드렸는데, 그이에게 이상한 투자를 권하셨고요.”
“그건 오히려 내가 당한 거야! 네 남편이야말로 사기꾼이었어!”
“어떤 사기를 당하셨는데요?”
“자기 상단의 배에 투자하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배였다. 너도 가서 그 배를 보면 알 거다. 네 남편이 사기꾼이라는 걸!”
“전 그것보다 외삼촌께서 무슨 재산이 있으셔서 투자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아무 재산도 없고, 빚쟁이에게 쫓기느라 궁곤하게 살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분명 어느 금융업자에게 담보로 맡겼었다던 예로니아 저택의 문서가 왜 외삼촌의 손에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그게 왜 외삼촌의 소유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인지 역시 궁금하네요. 예로니아 저택은 엄연히 예로니아 백작 가의 소유인데요.”
벨본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테라비스는 분명 에델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었고, 에델라는 테라비스와 술을 마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예로니아 저택에 찾아와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부부인 두 사람이 서로 많은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벨본이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서로 충분히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특히나 벨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외삼촌의 빚은 외삼촌께서 알아서 갚으시길 바라요.”
에델라는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라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
그리고 부부가 합심해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라는 걸 마침내 깨달은 벨본은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싫다면?”
얻을 것이 없다면,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더는 에델라에게 회개한 척, 착한 사람이 된 척하지 않아도 되었다. 벨본은 자신의 앞길을 망친 조카를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네 빌어먹을 평민 남편 덕분에 번 돈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 빚을 갚겠어? 어쩔 수 없이 지난번처럼 잠적하는 수밖에 없지. 그럼 그 빚은 보증을 선 예로니아 백작에게 갈 거고, 아픈 네 아버지가 갚지 못하는 빚은 자식인 네가 갚아야겠지.”
벨본은 비웃음을 띤 얼굴로 에델라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벨본의 비열한 계획을 들으면서도,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에델라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당연했다. 벨본이 그럴 생각이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외삼촌께서는 참 변함없이 무책임하시고, 비열하시군요. 그리고 멍청하시고요.”
“뭐?”
“제가 여기 금융업자분과 함께 있다는 것에서, 그리고 이분이 제가 아니라 외삼촌께 조금 전에 빚을 갚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뭔가 깨닫는 바가 전혀 없으신 건가요?”
에델라의 지적에 그제야 벨본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멘델이 에델라와 함께 서 있는 것이, 그리고 자신에게 돈을 지금 당장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긴 했다.
“외삼촌 말대로 15년 전 저희 아버지, 예로니아 백작께서 외삼촌이 빌리신 돈에 대해서 보증을 선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죠. 하지만 두 달 전 연장동의서에는 서명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예로니아 백작께서는 연장에 동의하지 않으셨으니, 보증 또한 연장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차용증이 연장되었으니 당연히…….”
“당연하지 않습니다. 설사 보증이 함께 연장된다고 한들, 그 동의서는 공증인도 없이 작성된 것이잖아요? 유효하지 않은 문서이죠. 이 부분은 이미 시내의 저명한 법률학자에게 확인을 받은 사항입니다.”
에델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벨본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을수록 벨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 빚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전부 오로지 외삼촌께만 있다는 겁니다. 원금뿐만이 아니라 이자까지요.”
“인제 보니 부부사기단이었군? 날 함정에 빠트리려고 말이야.”
이를 바드득 갈고, 희번득한 눈으로 에델라를 노려보며 벨본은 말했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저희는 한 번도 외삼촌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한 적이 없어요. 전부 외삼촌께서 파놓은 함정이었고, 스스로 그곳에 빠지신 거지요.”
“웃기는 소리! 너희가 교묘하게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잖아!”
“외삼촌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평생 그렇게 생각하시는 수밖에요. 다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다시는 제 가족 앞에 나타나시지 말라는 겁니다.”
“또 그 소리군?”
“네. 하지만 이전에는 온건한 부탁이었고, 지금은 강경한 명령이라는 점에서 다르죠. 외삼촌께서 다시 루젠타에 나타나신다면 다음에는 제가 외삼촌께 어떻게 행동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오호!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네. 협박하는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이 힘들게 번 것을 착취하고, 기생하려는 그런 뻔뻔한 사람이 제 외삼촌이라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거든요.”
“뭐? 착취? 기생?”
에델라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벨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악당이 그렇듯이.
“어린 계집애 주제에 어디서 감히 건방지게 충고질이야? 부자 남편을 얻고 나니 아주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엉!”
벨본은 험악한 표정으로 에델라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마치 제게 건방진 소리를 한 에델라를 한 대 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딜!”
날카로운 검이 빠르게 에델라와 벨본의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벨본의 코끝을 겨누었다.
“감히 붉은바람 상단의 앞에서, 저희 사모님께 덤비시려는 겁니까?”
줄곧 에델라의 뒤에 서 있던 로즈가 앞으로 나서서 벨본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건방지게! 내가 누군지 알고 칼을 겨누는 것이냐?”
“음…….”
벨본의 말에 로즈는 아주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잡상인?”
하지만 생각 끝에 나온 대답은 벨본을 열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감히 계집애 주제에 칼 좀 들었다고 시건방지게 굴어?”
그리고 벨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로즈를 열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
로즈는 아무 말 없이 벨본의 코끝을 겨누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그것을 로즈가 꼬리를 내리는 것으로 생각한 벨본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로즈의 검이 멈췄을 때, 그는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로즈의 검이 정확하게 벨본의 두 다리가 갈라지는 그곳을 정확하게 겨누자 벨본의 얼굴은 당황과 놀람으로 점철되었다.
“사모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경계 태세 중인 겁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로즈는 천연덕스럽게 벨본의 그곳을 향해서 검을 겨눈 채, 대답해주었다.
“당장 검을 치우지 못할까!”
“네. 못합니다. 그쪽 분께서 저희 사모님의 안전거리 밖으로 나가시지 않은 한은요. 지금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저도 어쩔 수 없이 공격하겠습니다.”
로즈가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이 건방진 것들이!!”
벨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발은 움직이지 않은 채, 매우 심한 말을 에델라와 로즈를 향해서 내뱉으려고 했다.“이런, 처외삼촌께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으셨군요?” 하지만 벨본이 뭐라고 하려고 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테라비스가 그들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테라비스에게 손목을 붙잡혀 그가 얼마나 힘이 센지를 알고 있는 벨본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뒤로 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테라비스는 피식 웃었다.
“이것들이…….”
에델라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고, 로즈는 자신의 중요 부위를 검으로 겨누고 있으며, 테라비스는 커다란 덩치로 자신을 위협하고 있었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아는 벨본은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제 몸만 부들부들 떨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 대치를 끝낸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