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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사기꾼 사냥 (85/92)

85화. 사기꾼 사냥2022.02.21. 

16590717553958.jpg“아, 저기 부단장이 오는군요.”

벨본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테라비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들이 걸어왔던 부두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마틴이 커다란 자루 하나를 가지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틴을 본 벨본의 눈이 새로운 희망으로 빛났다. 그래. 지금 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것은 덤 같은 것이었다. 진짜는 바로 저 돈이었다.

16590717553971.jpg“단장님.”

16590717553958.jpg“수고했어, 마틴.”

테라비스는 마틴에게서 자루를 건네받으며 싱긋 웃었다. 마틴은 평소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묵례할 뿐이었다.

16590717553958.jpg“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실까요? 아니면 여기서 먼저 확인을 해보시겠습니까?”

16590717553992.jpg“여기서 확인해보겠네.”

당연히 벨본의 대답은 지금, 당장, 여기서였다.

16590717553958.jpg“그러십시오.”

테라비스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벨본에게 돈을 건넸다. 그 얼굴에서 벨본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루를 잡은 즉시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13억 루나의 현금이 들어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웠다. 그제야 벨본은 저 부단장이라고 불리는 마른 남자가 이 더운 날씨에 셔츠의 단추를 꽉꽉 채운 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벨본은 손이 덜덜 떨려와서 자루의 매듭을 잘 풀 수 없었지만, 테라비스도 마틴도 그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테라비스는 느긋하게 그 꼴을 감상하고 있었다.

16590717553992.jpg“이, 이게…….”

마침내 자루를 풀고, 그 안을 들여다본 뒤 벨본의 손은 드디어 떨림을 멈췄다.

16590717553992.jpg“이게 뭔가!”

그리고 그 떨림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버럭 소리를 지른 벨본의 턱이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16590717553958.jpg“말씀드렸던 제 비자금입니다만?”

16590717553992.jpg“분명 내게 13억 루나라고 하지 않았나!”

16590717553958.jpg“음……. 제 기억에는 그 정도 금액이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16590717553992.jpg“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벨본은 네 눈으로 직접 보라는 듯이 들고 있던 자루를 테라비스에게 들이댔다. 그곳에는 꼬깃꼬깃한 1루나가 잔뜩 들어 있었고, 아주 가끔 5루나가 드문드문 보였다. 심지어 돈이 아닌 찢어진 서류라든가 뜯어진 서류 봉투, 부러진 펜까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16590717553958.jpg“이상하네요. 제 기억에는 꽤 돈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16590717553971.jpg“다 쓰셨으니까요.”

마틴의 대답은 간결했다.

16590717553971.jpg“우선 지난주에 그림을 한 점 사셨습니다. 침실에 거신다고 하셨죠.”

16590717553958.jpg“아, 맞아! 기억나. 그게 아마…… 음……. 라퓨나 이닝스의 그림이었지?”

16590717553971.jpg“아니요. 이닝스 라퓨나의 그림이었습니다.”

16590717553958.jpg“아, 그랬나?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처외삼촌께서도 아시겠지만, 원래 탈세와 비자금에는 그림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마치 우리끼리는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는 듯이 테라비스는 벨본에게 말했다. 당연히 벨본의 얼굴은 더욱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16590717553992.jpg“그렇다고 해도 너무 적어 보이는데?”

테라비스는 자루의 안을 더욱 자세히 보는 척하며 물었다.

16590717553958.jpg“지난번에 봤을 때는 분명 이거보다는 많아 보였단 말이지. 혹시 네가 빼돌린 건 아니야?”

16590717553971.jpg“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와 그것보다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테라비스를 노려보며 마틴이 말하자 테라비스는 그것이 진짜가 아님을 알면서도 움찔했다.

16590717553971.jpg“지난번에 단장님께서 사적으로 사용하시고 상단의 이름으로 수표를 끊으신 것을 제가 알아서 제했을 뿐입니다. 제게 비자금을 맡기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으십니까? 회계 처리가 불가능한 부분이 있으면 여기서 처리하라고 하셨지요.”

16590717553958.jpg“음. 그렇지.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었지? 근데 내가 사적으로 뭘 썼는데?”

16590717553971.jpg“술을 드셨습니다. 사적으로.”

16590717553958.jpg“아! 그게 혹시?”

16590717553971.jpg“혹시가 뭘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집에서 꽤 큰 금액을 두 번 사용하셨기에 그 돈은 단장님의 비자금에서 메꾸었습니다.”

16590717553958.jpg“역시! 하하하핫! 보셨습니까, 처외삼촌? 우리 부단장이 얼마나 깐깐한 사람인지? 우리가 술 마신 걸 여기서 제했나 보네요.”

테라비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마틴의 등을 치려다가, 조금 전보다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움찔해선 손을 거두어들이며 자연스럽게 바닷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벨본의 눈에는 그런 테라비스의 모습이 자신을 속여 넘기고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여서 더욱 재수 없게 느껴졌다.

16590717553958.jpg“그럼 다른 돈은 없나?”

16590717553971.jpg“무슨 다른 돈 말씀이십니까?”

16590717553958.jpg“그러니까 내가 쓸 수 있는 내 돈?”

16590717553971.jpg“없습니다.”

16590717553958.jpg“그럼 내가 횡령을 좀 할 수 있는 돈은?”

16590717553971.jpg“없습니다.”

16590717553958.jpg“아니면, 상단에 좀 꿍쳐놓은 돈은?”

16590717553971.jpg“없습니다.”

16590717553958.jpg“아! 그럼 혹시 마틴. 나 돈 좀 빌려주면…….”

16590717553971.jpg“안 됩니다.”

테라비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틴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16590717553958.jpg“그렇다네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듯, 그래서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16590717553992.jpg“지금, 나랑 무슨 장난질을 하는 거지?”

벨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분노에 찬 음성으로 테라비스에게 물었다. 아니, 물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유한 표현이었다. 벨본은 분노에 찬 음성을 내뱉은 것이었다.

16590717553958.jpg“장난질이라니요. 그저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런 쪽으로는 감각이 좀 없다 보니, 부단장을 꼼꼼한 사람으로 둔 것이거든요.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16590717553992.jpg“처음부터 이러려는 계획이었나? 나를 농락한 거야?”

16590717553958.jpg“설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 벨본 호를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매우 작은 배이긴 하지만, 저와 처외삼촌 간에 존재하는 신뢰의 증표 아닙니까?”

테라비스는 보란 듯이 벨본 호를 가리켰다.

16590717553958.jpg“처외삼촌께서 배에 대해서 잘 모르셔서 저 배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겁니다.”

16590717553992.jpg“저 배가 보기보다 값이 나간다는 건가?”

벨본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테라비스에게 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어리석게도.

16590717553958.jpg“배라는 것이 제법 가격이 나가는 편이죠.”

16590717553992.jpg“그러니까 얼마나?”

16590717553958.jpg“한 50만 루나 정도요? 아니, 저 사이즈면 그 정도는 안 하려나? 한 30만 루나 정도일 수도 있겠군요.”

테라비스는 자기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16590717553992.jpg“지금 30만 루나짜리 배에, 나더러 10억 루나를 투자하라고 했다는 건가? 그건 사기가 아닌가!”

16590717553958.jpg“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엄연히 처외삼촌께서 투자하신 것은 처외삼촌의 돈이 10억 루나가 아니라 주인이 따로 있는 예로니아 저택의 소유권 문서 아닙니까? 처외삼촌께서 손해를 보시는 것은 없으실 텐데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벨본은 인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16590717553992.jpg“그럼 10억 루나를 투자해서, 원금 2억 루나와 이익금 2억 루나를 준다는 말은?”

16590717553958.jpg“물론, 이익이 그렇게 난다면 그렇게 돈을 드려야지요. 계약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제야 벨본의 얼굴빛이 조금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어진 테라비스의 말에 곧 다시 창백해졌다.

16590717553958.jpg“아마 이익이 나지 않겠지만요. 아니, 아마도 마이너스가 될 것 같네요.”

16590717553992.jpg“마, 마이너스가 된다고?”

16590717553958.jpg“네. 제가 그렇게 만들 예정이거든요. 부두에 배를 정박하는 데도 돈이 들거든요. 틈틈이 수리도 좀 해줘야 하고, 칠도 좀 새로 해줘야 하고, 혹시나 물이 새면 큰일이니 정비도 자주 해줘야 하지요. 배라는 것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랍니다.”

테라비스는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친절한 사람처럼 벨본에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주었다.

16590717553958.jpg“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마이너스 100%가 될 예정입니다.”

16590717553992.jpg“뭐?”

16590717553958.jpg“마이너스 100%로 만들어서 처외삼촌께 한 푼도 이익금도, 원금도 드리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가능하냐고 묻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제가 아주 단단히 바가지를 씌워서 그렇게 만들어드릴 예정입니다.”

16590717553992.jpg“이, 이, 이! 사기꾼 놈이!”

16590717553958.jpg“사기꾼이라니요? 엄연히 계약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분명 오늘 서명하신 곳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았습니까? 상황에 따라서 이익금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원금손실의 가능성도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은 전부 투자자에게 있다고요.”

물론, 그렇게 적혀 있었다. 게다가 그 문구의 출처는 벨본이 손수 작성한 계약서에서 발췌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기를 친 피해자에게 사기 행각이 발각되었을 때, 그 문구를 방패 삼기 위해서 벨본이 직접 적어놓은 글이었으니까.

16590717553992.jpg“이건 사기야!”

드디어 벨본은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테라비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이 작자는 리조트에 투자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것을 미끼로 자신의 배에 투자하게 만들 셈이었다. 있지도 않은 리조트처럼, 터무니없이 작은 배에.

16590717553992.jpg“이 사기꾼! 출신을 속이지 못하는 더럽고 비천한 놈이 감히 나를 속여?”

더 나아가 벨본은 자신의 분노를 직접 표출하려고 했다. 그는 험한 말과 함께 테라비스를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16590717553958.jpg“이런.”

하지만 참으로 볼썽사납게도, 벨본이 온 힘을 다해서 휘두른 주먹은 테라비스의 커다란 손에 너무도 손쉽게 붙잡히고 말았다.

매일 아침이면 운동을 하고, 상단의 물품을 나르고, 선적하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테라비스의 체격은 벨본보다 월등히 좋았다. 벨본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테라비스의 팔뚝의 굵기는 벨본의 그것보다 두 배는 됨직했다.

16590717553992.jpg“감히 비천한 평민 따위가 내 팔을 잡아? 귀족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은 거냐?”

16590717553958.jpg“아, 맞다. 처외삼촌께서는 귀족이셨죠?”

마치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말했다.

16590717553992.jpg“네가 감히 내 가문을 욕보이려는 것이냐? 아니, 지금 네가 하는 짓이 평민 주제에 귀족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16590717553958.jpg“이런, 저는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처외삼촌께서 폭력을 쓰시려는 것 같아 정당방위로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16590717553992.jpg“이렇게 무식하게 세게 붙들고 있는 게 무슨 정당방위야!”

벨본은 테라비스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강한 악력에 옴짝달싹을 못 하고 있었다.

16590717553958.jpg“실례했습니다.”

16590717553992.jpg“으악!”

테라비스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자, 안간힘을 쓰며 손을 잡아당기고 있던 벨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16590717553992.jpg“이게…… 지금…….”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테라비스에 대한 분노로 벨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16590717553958.jpg“이런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테라비스는 벨본의 분노나 상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특유의 그 능글맞은 웃음을 띤 채 넘어진 그를 향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16590717553992.jpg“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테라비스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내며 벨본이 그에게 쏘아붙였다.

16590717553958.jpg“네. 무사할 것 같은데요.”

루젠타의 푸른 하늘과 맑은 바다를 배경으로 테라비스가 상큼하게 대답했다.

16590717553958.jpg“저는 제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짐승은 원래 종종 사냥을 당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테라비스는 지금, 파비오사 스렌초의 기분을 완벽하게 알 것 같았다. 사냥에 성공한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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