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벨본 호2022.02.18.
“어서 오십시오, 처외삼촌! 더운데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테라비스는 활짝 웃으며 붉은바람 상단의 사무실을 찾은 벨본을 반겼다.
“아니네. 원래 여름은 더워야 제맛 아니겠는가?”
벨본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쪼르르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더위나 땀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생길 오늘이, 이 계약이 훨씬 중요했다.
“자, 그럼 앉으시죠.”
더운데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말하면서도 테라비스는 벨본에게 자리만 권할 뿐, 시원한 물 한 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어떻게 서류 준비는 끝났는가?”
하지만 마음이 급한 벨본은 물이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테라비스를 채근했다.
“네. 투자금을 받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조금 서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준비해두었습니다.”
“이런! 말을 했으면 내가 도와주었을 텐데!”
“아닙니다. 처외삼촌께서 참고하라고 주신 리조트 서류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벨본이 준 서류는 정말 테라비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혹시나 투자가 무산되거나 손실이 생길 수 있으며, 그것은 온전히 투자자의 책임이라는 구절이 테라비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몰랐다.
“그럼, 리조트 서류는 다 확인을 했겠군?”
“네. 제가 서명만 하면 됩니다.”
“그럼 어서 서명하게.”
“그런데 서명을 하기 전에 먼저 돈을 확인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걸 확인할 것까지야 있나? 자네가 알아서 딱 맞게 주겠지. 그런데 수표가 아니라 현금인 건가?”
“네. 이게 사실…….”
테라비스는 은밀한 이야기라는 듯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벨본 역시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숙여 테라비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 은밀한 비자금이라서 말이지요.”
“비자금?”
“네. 그래서 수표를 발행하기가 어렵답니다.”
“아! 그렇군.”
벨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회삿돈을 횡령하거나, 은밀한 뒷거래의 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뭐, 벨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검은 돈이든, 붉은 돈이든,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되었다.
“제가 부단장에게 일러 돈을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처외삼촌께서는 여기서 서류를 작성해주시지요. 아! 예로니아 저택 소유권 문서는 가지고 오셨겠지요?”
“물론이지. 여깄네.”
벨본은 품 안으로 손을 넣어서 서류를 테라비스에게 넘겼다. 15년 동안 처치 곤란이었던 것이 지금은 벨본의 귀한 돈줄이 될 예정이었다.
“마틴. 비자금을 좀 가져다주겠어?”
“전의 그 돈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돈.”
대화를 주고받는 마틴과 테라비스를 보며 벨본은 그저 흐뭇했다. 마틴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자 더욱 그랬다.
“서류는 어떻습니까?”
“원래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작성을 매우 잘했군.”
“처외삼촌께서 좋은 샘플을 주신 덕분이지요. 자, 그럼 사인을 하시겠습니까?”
“아, 물론 해야지.”
라고 말하며 벨본은 펜을 들었다. 조금 전에 그가 말한 대로 서류는 자신이 꾸며낸 리조트 계약서와 비슷해서 크게 볼 것도 없었다. 벨본은 10억 루나 상당의 가치를 지닌 예로니아 저택의 소유권을 붉은바람 상단에서 사용할 배에 투자하겠다는 내용의 서류에 직접 서명을 했다.
“서명이 아주 고풍스럽고, 멋있군요. 뭔가 사나이의 기개가 느껴지는 필체면서도, 아주 귀족적이군요.”
테라비스는 쓸데없는 칭찬을 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벨본은 쓸데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아주 자연스럽게 예로니아 저택 소유권 문서를 테라비스에게 건넸다. 대충 문서를 살펴본 테라비스는 웃으며 그것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부단장이 늦는군.”
정확하게는 13억 루나가 늦는군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벨본이 고개를 슬쩍 돌려 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열릴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네요. 그럼 배를 먼저 보실까요?”
“배? 그 건조 중이라는 배 말인가?”
“네. 처외삼촌께서 투자하신 그 배 말입니다. 마침 오늘 도착을 했답니다.”
“오오! 궁금하긴 하다만……. 부단장이 우리를 찾지 않을는지?”
“우리가 단장실에 없으면 부두로 올 겁니다. 그는 우리 배가 어디 있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고요.”
“그렇지만 돈을 가지고 왔는데, 우리가 없으면 당황할 것이 아닌가?”
“우리 부단장이 융통성이 없긴 합니다만, 똑똑한 사람입니다.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거기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이제까지 말씀을 안 드렸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갑자기 테라비스가 말꼬리를 흐리자, 벨본은 간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신의 인생이 걸린 일인데, 지금에 와서 문제가 있다면 곤란했다.
“배에 처외삼촌의 성함을 붙였습니다.”
“뭐?”
“저희 배의 투자자이신 데다가, 제 처의 외삼촌 아니십니까? 거기다가 아주 멋진 성함을 가지고 계시고요. 부디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뭐, 굳이 내가 허락을 해주지 않을 것은 아니네만.”
그렇게 말하는 벨본의 입에서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광대는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고, 입꼬리는 쉴 새 없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내 이름을 딴 수백억 루나 짜리 배라고?’
“그럼 그 배의 이름은 ‘저바이스 호’인가?”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제가 저바이스 가문과 어떤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닌 데다가 가문에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배의 이름은 ‘벨본 호’로 정했습니다.”
“벨본 호라……. 좋은 이름이군. 하하하핫!”
결국, 벨본은 마지막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치 위대한 업적을 지닌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배가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다는 것을 더는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벨본 호를 보러 가도록 하지.”
“네. 이쪽입니다.”
붉은바람 상단 사무실 바로 뒤편이 항구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고 배들을 즐비하게 매어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떤 배는 막 들어온 듯 바쁘게 짐을 내리고 있었고, 어떤 배는 한가롭게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어 주고 있었다. 배의 종류도 아주 다채로웠다. 척 보기에도 호화로운 유람선이나, 커다란 교역선, 어부의 조그만 낚싯배들까지.
‘저건가? ……아니군. 그럼 저것? ……도 아니군.’
테라비스의 옆에서 벨본은 연신 힐끗거렸다. 커다란 배가 나올 때마다 이건가 싶었지만, 테라비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여깁니다.”
마침내 테라비스가 발을 멈춘 곳은, 그야말로 거대한 배의 앞이었다. 목을 젖히다 못해 거의 꺾어야 볼 수 있는 세 개의 돛대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아 있었고, 가지런히 묶여 있는 흰 천은 하늘의 뭉게구름만큼이나 뽀얀 색이었다. 이제껏 벨본이 본 어떤 배보다도 가장 큰 배였고, 가장 위엄이 넘치는 배였으며, 가장 훌륭한 배였다.
“오오! 이것이 벨본 호!”
벨본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배의 앞으로 한 발 나아갔다. 그의 눈가에는 살짝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아, 그쪽이 아닙니다.”
뿌듯한 표정으로 배를 바라보던 벨본의 뒤통수로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뭐?”
“그 배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테라비스의 발이 지금 벨본이 서 있는 배의 영역에서 반 발자국 정도 더 부두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고, 배를 가리키고 있는 그의 손은 교묘하게 그 배보다 약간 뒤편을 향하고 있었다.
“아, 그런가?”
벨본은 조금 머쓱해 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배가 마음에 들어 눈을 쉽게 떼지 못했다. 언뜻 봐서는 테라비스가 가리키고 있는 배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봐선 지금의 이 배보다 작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아, 벨본으로서는 못내 섭섭했다.
‘역시나 출신은 못 속이는 건가? 돈은 많은데, 아무래도 배포가 귀족의 그것만큼은 따라갈 수가 없는 모양이야.’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테라비스를 따라 옆으로 두어 걸음을 더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음?”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벨본의 입에서는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의아함이 솔직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
벨본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믿지 못하고, 몇 번이나 눈을 끔벅였다. 혹시나 지금 원근법이라던가, 눈이 뭔가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도 떠보고, 크게도 떠봤지만, 역시나 현실은 마찬가지였다.
“이보게.”
결국 벨본은 옆에 있는 테라비스에게 말을 붙였다.
“네, 처외삼촌.”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뭐가 말씀이십니까?”
벨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테라비스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배가 너무 작지 않은가!”
그랬다. 테라비스가 가리킨 배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범선이나 교역선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조그만 유람선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다. 잘해봐야 어부 혼자서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 어선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호숫가에 띄워놓고 한두 명의 귀부인이 뱃놀이나 할 정도의 크기였다.
“아, 그런가요?”
벨본의 항의에도 테라비스는 태연했다. 마치 벨본의 의견도 옳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분명 자네의 말로는 외국에 수출과 수입을 하는 아주 커다란 배라고 하지 않았나?”
“아뇨. 저는 저희 붉은바람 상단이 그런 일을 하는 상단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그럼 지금 나한테 저 조그만 장난감 같은 배가 200억 루나라고 말을 한 건가?”
“아니요. 저희가 건조 중인 배가 200억 루나라고 말씀드렸었지요. 그 배는 빠르면 올해 안에 완성될 예정입니다. 아! 혹시 제가 처외삼촌께 투자를 권해드리고, 또 이름을 붙였다는 배가 그 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저런, 그때 술을 많이 드시더라니……. 제가 설명하는 걸 똑똑히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때 제가 전부, 세세하게 설명을 다 해 드렸는데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현재 그렇게 작업 중인 배가 있다는 예시라고요. 그때 분명 처외삼촌께서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셨습니까?”
간특한 테라비스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벨본에게 말했다. 당연히 벨본은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그때 자신이 술을 많이 마시긴 했었다. 혀도 꼬였었고,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자신이 착각할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계략이었다. 벨본은 처음부터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자, 보십시오. 저기 배의 옆면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벨본 호’라고 아주 멋있게요.”
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