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낚시의 미학2022.02.14.
“아, 확실한 건이라니까 그러네!”
벨본은 말이 통하지 않은 것이 답답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부자라며? 테라비스인지 테라스인지 하는 놈이 루젠타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
“물론 그렇긴 하죠.”
스멘델은 자신의 앞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는 벨본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불과 지난 달만해도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며, 칼 좀 치워달라고 한 작자인데 지금은 개선장군처럼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저는 금융업자입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람이지 투자를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저더러 빚 독촉을 하지 말라고 하시니, 참으로 당황스럽네요.”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하잖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니깐? 딱 2년만 기다리라고. 그 뒤에 돈을 받으면 되잖아! 얌전히 묵혀두었다가 2년 뒤에 받으면 이자도 더 늘 테고, 좋잖아!”
“좋긴 뭐가 좋습니까? 바넬레오 부인이 딱 잘라서 자기 일이 아니라며, 당신더러 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물론 그렇지. 그래서 지금 내가 당신을 찾아온 거잖아.”
“바넬레오 부인이 계속 돈을 못 갚겠다고 버티면, 제 입장은 매우 곤란해집니다. 그리고 제 입장이 곤란해지면, 당신 입장은 더욱 곤란해질 거고요.”
스멘델의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칼잡이가 보란 듯이 검집에서 살짝 자신의 검을 끄집어냈다. 벨본의 목을 겨눴던, 바로 그 검이었다.
“곤란해지긴 뭐가 곤란해져? 지금에야 그렇게 말하겠지. 내가 지금 여기 있으니까, 나한테 돈을 받으라고 말이야. 하지만 곧 나는 잠적을 할 거라니까! 한 2년 뒤에 말이야. 내가 없어지고 나면, 결국 당신은 누굴 찾아가야 하겠어? 그럼, 결국 누가 그 돈을 줘야겠냐고?”
벨본은 며칠 후, 테라비스와 최종적으로 서류를 작성하기로 했었다. 각자의 돈이 마련되고, 필요한 서류를 완벽하게 작성하기 위해서라고 테라비스는 말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뒤에 두 사람은 만날 것이다. 벨본은 테라비스에게 13억 루나의 투자금을 받았다는 서류를, 그리고 테라비스 역시 벨본으로부터 투자금을 받았다는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서.
‘예로니아 저택을 10억을 쳐준다고 했으니, 내년에 원금 2억과 이자 2억을 받을 수 있을 테고, 내후년에도 같게 받는다면, 총 8억 루나. 거기다가 테라비스로부터 받은 13억 루나를 합하면…… 21억!’
머릿속의 계산만으로 벨본은 짜릿해졌다. 그 금액이라면 이번에야말로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15년 전에 루젠타에서 사기를 친 돈은 딱 10년 동안 즐겁게 쓰니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금액이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스멘델이 끼어들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로니아 백작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대는 걸 봐선, 에델라가 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벨본에게 경고한 대로, 그가 알아서 갚기를 기다리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몇 년쯤 재촉하지 않으면, 계속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테라비스의 태도로 봐선, 에델라는 제 남편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겠지. 원래 귀족의 자존심이라는 게 쓸데없이 높은 법이니까. 부끄러워서 자기 아버지한테 아직도 빚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못 하겠지. 멍청한 계집애. 너 때문에 네 남편이 손해가 막심하게 될 거야. 뭐, 그래봤자 그 많은 재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나더러 2년을 손가락이나 빨고 기다리란 말입니까?”
“그래. 손가락 좀 빨고 있으면 일확천금이 생기잖아! 그, 뭐냐? 당신의 그 계산대로 하면 2년 뒤에는 한 15억 루나쯤 되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런 악덕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다.”
4천만 루나를 10억 루나로, 그것도 빌리지도 않은 사람의 딸에게 되돌려받으려고 하는 주제에 스멘델은 잘도 그렇게 지껄였다.
“제가 그런 악덕고리대금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예로니아 백작을 만날 계획을 세우는 겁니다. 아무래도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아, 그건 좀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라니까!”
또 벨본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무슨 놈의 사채업자가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혔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15년 동안이나 자신을 찾아다닌 것을 보면 이런 성격인지 미리 짐작했어야 할지도 몰랐다.
“좋아. 좋아. 당신 입장은 다 알겠어.”
벨본은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스멘델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진정하기 위해서 스멘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이었다.
“그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면 되겠지?”
“상응하는 보상이라뇨?”
“당신이 2년간 에델라를 찾아가지 않고, 빚 독촉도 하지 않는다면, 내 몫을 20%로 낮추는 걸로 하지. 아, 물론 예로니아 백작이나 예로니아 백작 부인도 찾아가면 안 돼.”
“…….”
벨본의 제안에 스멘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이 없었다.
“1년간 독촉을 하지 않는 대가로 하죠.”
“아니, 필요한 건 2년이라니까?”
“제 아량은 1년입니다.”
벨본은 이를 꽉 깨물었다. 역시나 사채업자라는 놈들은 악독했다.
“좋아. 그럼 15%에 2년!”
“흐음…….”
“그렇게 하면 자네 이자도 더 불어나 있을 것 아닌가! 원금은 4천 루나였는데 말이야!”
“세상에는 물가가 있고, 기회비용이 있고, 수익이라는 개념이 있으니, 그렇게 원금만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는 어렵죠.”
“아, 그러니까 내 몫을 15%로 낮춘다고 하지 않나!”
1억 5천 루나를 덜 받게 되겠지만, 대신 테라비스로부터 2년에 걸쳐서 8억 루나를 더 받을 수 있을 테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값도 별로 나가지 않을 예로니아 저택을 10억 루나나 쳐준 테라비스 덕분이었다. 그 저택은 안은 텅텅 빈 데다가, 멀쩡한 곳보다 수리할 곳이 더 많았다. 거기다가 누구나 그곳이 예로니아 백작 가의 소유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벨본이 소유권 문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팔기에 애매한 물건이기도 했다. 오히려 지금처럼 테라비스에게 투자하는 척을 하고, 이익금을 챙기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투자자를 만나고 온다며 루젠타를 떠나 1년 정도 은둔처에서 테라비스가 준 13억 루나를 쓰며 지내다 돌아와 또 4억 루나를 챙기면 되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중간에 일이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13억 루나는 남았다. 벨본이 손해 보는 것은 15년 동안 팔지 못했던 애물단지 같은 예로니아 저택 소유권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손해인 것 같긴 합니다만…….”
손해는 무슨 손해! 저 고리대금업자 놈이! 벨본은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편의를 봐 드리도록 하죠. 우수고객이시니까요.”
스멘델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예로니아 저택에서의 저녁 식사는 언제가 좋겠어?”
“…….”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어머니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싶어?”
“응. 원래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도 있잖아? 예로니아 백작 부인께서는 요리를 그다지 잘하지는 못한다고 당신이 말하긴 했지만, 자고로 사랑이 들어가면 맛이 다른 법이지.”
사랑이 들어가면 맛이 다르다는 말에 에델라는 잠시 손을 멈칫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직 외삼촌이 예로니아 저택에 머물고 있어.”
“알아. 하지만 그 문제는 곧 해결될 테니까, 미리 약속을 잡아보자는 거지.”
“…….”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막 썬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려던 테라비스는 그런 에델라의 행동을 보곤 도로 그것을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더 먹지 그래?”
“입맛이 없어.”
입맛이 없은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벨본의 등장 이후 에델라는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식사를 제대로 못 하는 데다가, 스트레스까지 쌓여서였다.
“에델라, 내가 해결할 거라니까.”
“…….”
“내가 이제껏 그렇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그건 아니야.”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얼른 저도 모르게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제껏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말했던 것은 반드시 지켰다. 계약서에 쓴 내용뿐만이 아니라 평소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들까지도 모두 지킨 그였다. 항상 농담처럼 자신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장사꾼이라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믿고, 의지하게 된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서 그를 좋아하게까지 된 에델라였다. 그에게 믿음이 없을 리 없었다.
“당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그냥…… 난…….”
에델라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테라비스를 믿고 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과거의 악몽이 자꾸만 자신의 발을 붙들고, 저 어두운 어딘가로 끌려갈 것 같은 느낌을 에델라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불안감에 에델라는 잠 못 이뤘고, 불현듯 자신을 덮쳐오는 무서움에 화들짝 놀랐다. 그런 증상이 반복되는데 잘 먹고, 잘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뭔지는 알겠어. 기다리는 게 힘들겠지.”
다정하고, 따뜻하게 테라비스는 말했다.
“원래 낚시라는 게, 지리멸렬한 작업이지. 자신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내모는 사디즘적인…….”
“파비오사 스렌초의 ‘붕괴하는 자아’에 나오는 구절이잖아?”
“……그걸 다 외워?”
“다 외우는 건 아니야. 책 안 읽어 봤다더니?”
“뭐, 최근에 좀 한가해서 읽었어.”
“최근에 바빠 보였는데?”
“그, 뭐, 틈틈이…… 조금씩…… 뭐, 그렇게……. 흠! 지금 내 독서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모처럼 책을 읽었고, 모처럼 어려운 말을 써가며 이야기를 해볼까 하던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출처를 파악 당하자 당황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낚시가 꼭 그렇게 오래~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거든.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확 낚아채는 것도 기술이라고 생각해.”
낚시를 해본 적이 없는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니깐 내 말은 당신이 제대로 식사하는 걸 내가 보려면, 슬슬 낚싯대를 걷어야겠다는 거야.”
“그럴 수 있어?”
“애초에 그렇게 시간을 많이 끌 생각은 없었어. 그자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사실, 당신 외삼촌이 루젠타에 아무 기반도 없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였고, 그 나이를 먹도록 사기만 쳐봤지, 제대로 된 일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테라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내일 벨본을 만나야겠어.”
테라비스는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모레쯤에 예로니아 저택에서 저녁을 먹는 게 어때?”
할 말을 다 하고 나서 테라비스는 입안으로 스테이크를 쏙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