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느 무더운 날2022.02.07.
때 이른 더위가 루젠타를 덮쳤다. 한낮의 태양은 강렬했고, 부둣가의 작업자들도 일사병을 걱정해 작업을 멈추기까지 했다. 이 유독 더운 날, 예로니아 백작이 집으로 에델라를 찾아왔다.
“어머나! 백작님!”
예로니아 백작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때마침 현관 근처에서 에델라가 꽃꽂이한 화병을 놓고 있던 녹스였다.
“세상에! 이 땀 좀 봐! 설마 예로니아 저택에서 여기까지 걸어오신 건가요?”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 거기다가 비틀어서 짜면 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백작이 손에 쥔 손수건을 보면, 그가 예로니아 저택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예로니아 백작 가의 가정형편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에델라는 집에 있는가?”
“네, 네. 모셔올게요. 일단 좀 앉으셔서 시원한 걸 드셔야겠어요.”
녹스는 다른 하녀에게 서둘러서 시원한 음료를 준비하게 하고, 예로니아 백작을 응접실로 모셨다. 그리고 늙은 관절이 허락하는 한 가장 빠른 종종걸음으로 에델라에게 가서 예로니아 백작이 방문했음을 알렸다.
“아버지!”
소식을 들은 에델라는 예로니아 백작이 있는 응접실로 날 듯이 달려왔다.
“세상에! 땀 좀 봐! 설마 걸어오신 거예요? 오늘 날씨가 이렇게나 더운데요. 몸도 아직 좋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무리를 하시면 어떻게 해요?”
딸의 잔소리에 예로니아 백작은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이미 빈 물잔을 내려놓았다. 대충 물어물어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이렇게 멀 줄은 그도 몰랐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이렇게 더운 줄도 몰랐었다. 그저 에델라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을 뿐이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다리가 아프지는 않으세요? 좀 누우시는 게 어떠세요?”
하녀가 가져다준 차가운 물수건으로 예로니아 백작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며 에델라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에델라를 바라보며, 예로니아 백작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파졌다.
‘이런 착한 아이에게…….’
“에델라.”
예로니아 백작은 조용히 물수건을 쥔 에델라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다오.”
“뭘…… 말씀이세요?”
그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에델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슬그머니 백작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면서. 누가 봐도 에델라는 뭔가를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예로니아 백작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몸동작이었다. 예로니아 백작이 에델라를 바르고 곱게 키운 탓에, 그녀는 거짓말에 너무 서툴렀다.
“네가 다녀가고 나서, 내게 절대로 서류에 사인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같이 생각이 깊은 아이가 아무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
“그래서 벨본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벨본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게 그런 말을 했으니까 말이다. 벨본은 아무 일도 없다고 펄쩍 뛰더구나. 하지만 아닌 거지?”
예로니아 백작은 다시 에델라의 손을 잡았다. 제 곁에서 살 때는 거칠기 짝이 없던 딸아이의 손은 한두 달 사이에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예로니아 저택에서는 이름도 잘 모르는 들풀을 이 나간 병에 꽂아두었던 에델라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정원의 꽃을 꺾어다가 화려한 꽃꽂이를 해서 저택에 장식해두고 있었다. 물론, 물질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예로니아 백작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 만난 에델라는 예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 에델라의 인생을 바꿔준 선택이라는 것을 예로니아 백작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얘야, 에델라. 내 딸아. 이 못난 아비에게 말해 다오. 대체 무슨 일인 거니?”
그러니, 예로니아 백작은 알아야 했다. 딸의 인생에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인지, 그리고 또 딸아이에게 험한 길을 걷게 만든 것은 아닌지.
“아버지.”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를 위한답시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실은…….”
에델라는 어쩔 수 없이 털어놓으려고 했다. 벨본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것, 15년 전의 차용증을 들고 찾아온 금융업자가 있다는 것, 어쩌면 15년 전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아이고~.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예로니아 백작님!”
닫아두었던 응접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고 테라비스가 큰소리로 예로니아 백작을 불렀다.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에델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테라비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아직 그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말이야. 직원들에게 시원한 주스라도 좀 나눠줄까 해서 집에 들렀어. 상단 근처 가게에는 이미 시원한 것은 동이 났더라고.”
갑작스러운 날씨가 빚어낸 우연이라는 이야기였다.
“오랜만에 뵙는 군요, 백작님. 결혼식 이후 처음인 것 같은데요.”
테라비스는 빙긋이 웃으며 예로니아 백작의 앞에 섰다. 그리고 인사를 건넸다. 예법에 정확히 맞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마음은 예로니아 백작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정도의 인사였다.
“그런 것 같군.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네의 집에 방문하게 된 것에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딸의 집인데, 언제든 편하게 들리십시오. 아! 이렇게 오셨으니, 저녁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는 게 어떠실까요?”
“아닐세. 난…… 곧 돌아가려는 참이었네.”
아직 에델라로부터 들으려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참이었지만, 예로니아 백작은 그렇게 말했다. 테라비스 앞에서 벨본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거기다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그의 앞에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병 때문에 딸이 계약 결혼을 한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수치스러웠다. 예로니아 백작은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벌써요? 이제 막 오신 것 같은데 좀 더 계시다가 가지 않으시고요. 나중에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아니네. 아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걸세.”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 있었고, 저녁 먹을 시간은 아직 멀었건만, 예로니아 백작은 그런 말로 테라비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참 아쉽군요. 그럼 다음 기회에 꼭 같이 저녁을 먹도록 하지요. 백작 부인께서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신 것은 아직도 유효하겠지요?”
“물론이네.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조만간이라는 말을 하는 예로니아 백작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 조만간이라는 시간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조만간, 예로니아 저택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로니아 백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라비스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 * *
“제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러겠나, 조카사위?”
벨본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그는 이미 취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술자리가 이어진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고, 테라비스가 연거푸 그에게 술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비싼 술에 혹한 벨본은 테라비스가 따라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저도 한 잔 따라주시죠.”
테라비스는 비어 있던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아, 물론이지! 지난번에 보니 자네도 아주 술을 잘 마시더군. 나만큼이나 말이야. 하하핫!”
지난번에 분명 테라비스가 부른 마차에 거의 실려 나간 주제에 벨본은 호탕하게 웃었다. 테라비스는 그저 빙긋 웃으며, 벨본의 허풍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제가 며칠 동안 처외삼촌께서 말씀해주신 투자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입니다.”
천천히 잔을 흔들며 테라비스는 운을 띄웠다. 흔들리는 잔 속에서 올라오는 진한 술의 향기가 어질했다.
“그래? 어떻게, 결정을 내린 모양이야?”
테라비스의 말에 벨본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세를 바투 잡으며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네. 결정 내렸습니다.”
그 말에 벨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빙긋 웃었다.
“어, 어떻게, 결정을 내렸지?”
일부러 자신의 애를 닳게 만들려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벨본은 테라비스의 수작대로 다시 마른침을 삼키고, 테라비스의 쪽으로 바짝 몸을 내밀며 답변을 재촉했다.
“처외삼촌께서 제게 권해주신 기회인데, 당연히 제가 투자를 해야지요.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지! 물론이지! 피는 물보다 진하지! 하하하핫!”
“그렇지요. 하하하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투자한다면 얼마나 할 생각인가?”
“아, 혹시 최소금액이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너무 적은 금액이면 내가 중간에서 입장이 좀…….”
“제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군요. 지금 상단에 묶여 있는 돈이 있다 보니, 지금 당장 유용할 수 있는 현금을 소소하게 투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것 참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테라비스를 보며, 조금 전까지 한껏 들떠 있던 벨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어. 예로니아 저택이 그렇게 방치된 걸 보고 구두쇠인 것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그 건방진 계집애가 그렇게 날 찾아왔을 때부터 일이 안 될 거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벨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안 그래도 예로니아 백작이 자신을 달달 볶는 걸 봐선 아무래도 일이 안 될성싶었다. 부인이 제 외삼촌이라면 정색을 하고, 장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며 매일같이 다그치는데, 테라비스가 저를 믿고 투자를 할 것 같지 않았다. 정 안되면, 몸을 숨겼다가 스멘델이 에델라에게 10억 루나를 받으면 그중 제 몫인 3억 루나만 받고 다시 루젠타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테라비스가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소소한 금액은 얼마인지 일단 말해보겠나?”
벨본은 잘 지어지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쥐어짜며 테라비스에게 물었다. 부유한 상단의 단장이라는 놈이 설마 백 단위를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한 도시의 제일가는 부자라는 놈이 융통할 수 있는 현금이 겨우 천만 루나, 2천만 루나로 끝이지는 않겠지. 제발, 제발 5천만 루나만 넘어가라! 그래야 내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지! 벨본은 그렇게 간절히 빌었다.
“뭐?”
너무 간절해서, 테라비스의 말을 잘못 들었을 정도였다.
“얼마라고?”
“13억 루나라고 말했습니다.”
아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처외삼촌께서 말씀하시는 투자처에 13억 루나를 투자하려 합니다.”
테라비스는 웃는 낯으로 술잔을 들며, 소소한 금액을 다시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