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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위장 이혼 (80/92)

80화. 위장 이혼2022.02.04. 

16590717022298.jpg“그래서, 당신과 이혼했으면 해.”

에델라의 말을 들은 테라비스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어서 눈만 끔벅거렸다.

16590717022303.jpg“……뭐라고?”

그리고 한참 뒤에야, 자기가 뭔가 잘못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되물었다.

16590717022298.jpg“당신은 나와 이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6590717022303.jpg“왜?”

16590717022298.jpg“하아…….”

이유를 물어보자 에델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적의 이야기, 스멘델이 자신을 찾아온 것, 그가 건넨 차용증과 벨본이 서명한 연장동의서에 관한 것, 그리고 벨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까지.

16590717022303.jpg“그런 계산법이 정말 가능한 거야?”

에델라의 이야기를 들은 테라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산 따위들은 적 없었다. 복리의 마법 같은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4천만 루나가 10억 루나가 되는 계산이라면 마법이 아니라 흑마술이었다.

16590717022298.jpg“그건 나도 모르겠어. 알아봐야겠지.”

벨본에게 스스로 갚으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가 정말 자신이 알아서 갚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갚을 수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10억 루나라는 돈은 한 사람이 쉽게 벌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처음에 에델라가 테라비스에게 계약에 대한 대가로 5억 루나를 요구했을 때, 부자인 테라비스조차도 살짝 주저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은 거의 뼛속까지 장사꾼인 테라비스가 본능적으로 흥정을 한 것이었고, 혹시나 에델라가 임신이 안 되는 몸이라던가, 일시금으로 돈을 받고 도망이라도 갈까 싶어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에델라는 아직도 금액이 커서 그랬던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16590717022298.jpg“난 벨본 외삼촌이 지금 시점에 루젠타에 돌아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마침 이때, 그 금융업자라는 사람이 날 찾아온 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16590717022303.jpg“다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야?”

16590717022298.jpg“그래. 난 그렇게 생각해.”

에델라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먹을 것을 걱정하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병원비가 없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눈을 뜨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델라는 아직도 과거의 수렁이 자신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590717022298.jpg“내가 결혼한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 정확하게는 내가 부자인 당신이랑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자신은 영원히 이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몰랐다.

16590717022298.jpg“내 일에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우리는 이혼하는 게 좋겠어.”

그렇다면, 적어도 테라비스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당돌한 제안을 받아들여 준 이 사람을, 뻔뻔하고 능글맞지만, 사실은 배려심 깊고 다정한 이 남자를, 자신의 불행이 옮겨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에델라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16590717022303.jpg“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에델라 당신 말은 지금 당신 외삼촌이 내 재산을 노리고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으니, 그걸 막기 위해서 이혼을 하자는 이야기야?”

16590717022298.jpg“맞아.”

16590717022303.jpg“와우! 브라보!”

테라비스는 별안간 박수를 치며 요란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없이 심각하고, 진지했던 에델라는 그런 테라비스의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90717022303.jpg“갑자기 내 인생이 너무 스펙터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처음에는 계약 결혼이었고, 이번에는 위장 이혼을 하자는 거잖아? 세상에! 나 지금 무슨 소설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야. 그 왜 있잖아? 여자들이 잘 보는 로맨스 소설 말이야.”

16590717022298.jpg“그게 무슨 말이야?”

16590717022303.jpg“책 많이 본다면서 몰라? ‘부자의 결혼을 가져버렸다’라든가, ‘결혼 후, 이혼을 주웠다’라든가.”

에델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쳐다보자, 테라비스는 들어보았던 소설의 제목을 줄줄 읊었다. 하지만 에델라는 그런 소설은 모른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16590717022298.jpg“난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야.”

16590717022303.jpg“그래? 나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16590717022298.jpg“난 지금 매우, 몹시, 진지해.”

16590717022303.jpg“그럼 우리 이야기는 매우, 몹시, 진지한 이야기였다는 거군? 그럼…… 음……. 소설의 제목은 ‘위장 이혼은 침실에서부터’가 어떨까? 우리가 지금 침실에서 위장 이혼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16590717022298.jpg“테라비스!”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는 테라비스를 향해, 결국 에델라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도 살짝 놀라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16590717022303.jpg“내가 루젠타에서 장사를 시작해 지금 이 자리까지 온 비결 중의 하나는,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철칙이 있기 때문이야.”

테라비스는 양손으로는 침대를 짚고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았다. 매우 건방지고, 동시에 여유로워 보이는 자세였다.

16590717022303.jpg“난 쉽게 계약을 파기하고, 신뢰를 개똥같이 여기는 그런 양아치 같은 장사꾼이 아니야. 내가 세운 철칙을 지키고, 계약은 반드시 이행하는 매우 건실한 장사꾼이지.”

싱긋, 미소를 띤 얼굴로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16590717022303.jpg“그리고 동시에 당신 외삼촌같이 어쭙잖은 사기꾼에게 당할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 아니라, 비열하고 악독한, 손해 보는 짓은 절대로 안 하는 장사꾼이기도 하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은 재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16590717022303.jpg“에델라.”

제 몸을 받치고 있던 손을 하나 빼,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내밀었다.

16590717022303.jpg“날 믿어.”

뻗은 손을 보며, 에델라는 잠시 망설였다. 저 손을 잡아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불행의 늪으로 테라비스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닐지 무서웠다. 에델라는 자신을 부르는 테라비스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뻗은 손을 바라보았다. 잡고 싶었다. 저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16590717022303.jpg“에델라.”

망설이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힘주어 불렀다. 잡아 주길 바랐다.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다. 시작은 계약 아내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냥 자신의 아내라고 테라비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위기가 닥친다고 버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내치는, 그런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에델라는 어떨지 몰라도, 테라비스에게는 그랬다.

16590717022298.jpg“테라비스.”

테라비스의 간절한 눈빛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한 자신감에 홀린 것인지, 에델라는 그의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흰 손을 살포시, 그의 손 위에 얹었다.

16590717022298.jpg“아!”

에델라의 손이 테라비스의 손에 닿은 순간, 테라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에델라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그대로 잡아당겼다. 마치 탱고를 추는 연인처럼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손을 잡은 채, 그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그시 서로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도 탱고의 그것과 비슷했다. 테라비스의 가슴에 자연스럽게 얹고 있던 에델라의 손으로 그의 온기와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했고, 세차게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아주 힘차게.

16590717022303.jpg“이혼은 해줄 수 없어.”

테라비스는 잡고 있던 에델라의 손을 천천히 위로 끌어당겼다.

16590717022303.jpg“아직 나와의 계약이 끝나지 않았잖아. 난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어.”

그의 입술까지 에델라의 손이 끌어 올려졌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부드럽게 에델라의 손에 입을 맞췄다. 반듯하게 깎여 있는 귀여운 반달 모양의 손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입술은 조금 더 올라가 꺾여진 에델라의 손 마디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그다음에는 에델라의 손등에 입술을 부드럽게 짓눌렀다. 에델라의 손목까지 그의 입술이 거슬러 올라갔을 때는 테라비스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축축한 숨결이 손목에 닿자, 에델라의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그 순간, 에델라는 짚고 있는 손을 통해서 테라비스의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묘한 차이이긴 했지만, 분명히 테라비스의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힘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16590717022303.jpg“당신도 그렇잖아.”

침대에 앉아 에델라의 손목에 입술을 붙인 채, 테라비스는 물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단어가 스멀스멀 에델라의 팔을 타고 올라가는 느낌은 묘했다. 가렵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하고, 당장 손을 빼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이대로 그에게 양팔을 다 맡겨버리고 싶기도 한 기분이었다.

16590717022298.jpg“그래. 맞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에델라는 지금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쏘아보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테라비스의 눈빛에서는 정염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에델라의 눈빛도 그럴지도 몰랐다. 천천히 에델라의 팔뚝의 여린 살을 더듬으며 올라가는 테라비스의 숨결에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었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고민과 걱정이 어느새 저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에델라도 알았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것보다 더 급하게 에델라가 원하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16590717022298.jpg“테라비스.”

에델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부름에 대한 대답인 듯,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팔뚝 안쪽 여린 살점을 베어 물었다. 마치 검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개처럼, 찌릿한 아픔이 에델라의 흰 피부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 어딘가에 닿았다. 정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에델라는 몸을 파르르 떨며,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본 테라비스는 더 기다리지 않고 남은 한 손으로 에델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빼자, 테라비스의 몸은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풀썩 소리를 내며 테라비스의 등이 침대에 닿은 순간, 에델라의 몸 역시 그와 함께 앞으로 쏠렸다.

16590717022303.jpg“날 믿어.”

어느새 테라비스의 입술은 에델라의 귓가에 와 있었다.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에 에델라의 팔에서는 오스스 닭살이 돋아났다. 결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16590717022303.jpg“절대로 당신이 손해 보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로맨틱한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말이었고, 한 치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얄팍한 상술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델라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안심할 수 있었다.

16590717022298.jpg“그래.”

그가 착하지 않아서 좋았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늘 솔직해서 좋았다. 뻔뻔하게 무조건 자신을 믿으라고 떼를 쓰는 것이 좋았다. 에델라는 어느샌가 이 무례하고 뻔뻔한, 비싼 게 무조건 최고인 줄 아는 졸부인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16590717022298.jpg‘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어.’

마침내 에델라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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