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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에델라의 결심 (79/92)

79화. 에델라의 결심2022.01.31. 

16590716605231.jpg“사내놈이 큰일을 위해서는 느긋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그새를 못 참고 쪼르르 에델라를 찾아가서 으름장을 놔? 그따위로 초를 치면 받을 돈도 못 받게 된다는 걸 알아야지 말이야.”

무릎에 먼지라도 묻었다는 듯이 옷을 툭툭 터는 벨본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에델라에게 보여주었던 미안함이나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귀찮음과 짜증스러움만이 그의 얼굴에서 가득 묻어날 뿐이었다.

16590716605231.jpg“그 졸부 놈이 다행히 멍청해서 일이 술술~ 풀리고 있는 참인데!”

벨본은 어슬렁거리며 다시 침대로 돌아가 풀썩 몸을 뉘었다. 듣기 싫은 삐걱대는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16590716605231.jpg“이따위 걸 침대라고. 쯧!”

벨본이 혀를 차는 것은 당연했다. 15년 전, 루젠타에서 친 사기로 한몫을 단단히 챙긴 그는 항상 고급 호텔에서 묵었고, 루젠타나 고향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은밀하게 마련해둔 별장에도 이것보다 훨씬 좋은 침대가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스멘델을 마주하게 되었던 것도, 바로 그 침대 위에서였다. * * *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시퍼런 칼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날이 상쾌한 하루가 될 것이라고 예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6590716605231.jpg“아니, 잠깐! 아니! 잠깐만!”

벨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자와 그 뒤에 있는 덩치 큰 자, 그리고 비릿한 웃음을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누가 봐도 그 셋 중에서 대장인 자를 쳐다보았다. 이제껏 자신이 사기를 친 사람 중에서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숫자가 워낙에 많아서 벨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16590716605231.jpg“감히 내 돈을 떼먹은 놈 중에서 살아남은 놈은 없었지.”

16590716605231.jpg“오, 오해일세. 나는 남의 돈을 떼먹는 그런 사람이…… 끄윽!”

무어라 변명을 하려던 벨본은 칼날이 자신의 쪽으로 더욱 바싹 다가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16590716605231.jpg“15년 전, 루젠타에서 내 돈을 떼먹고 도망간 벨본 드 저바이스가 당신이 아니라고?”

16590716605231.jpg‘저 미친놈! 15년 동안 그럼 날 찾아다녔다고?’

벨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동시에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이해했다. 15년 전 루젠타에서 자신이 친 사기는 워낙에 큰 건이었다. 예로니아 백작은 그리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귀족인 데다가 신용도가 좋은 사람이었다 보니 그의 보증으로 제법 많은 금융업자에게 제법 큰 금액의 돈을 융통할 수 있었다. 아마도 눈앞의 남자도 그 제법 많은 금융업자 중의 누군가이리라고 벨본은 짐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16590716605231.jpg“내 돈은?”

스멘델의 질문은 명쾌했다.

16590716605231.jpg“…….”

하지만 벨본은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16590716605231.jpg“뭐, 됐어. 다 썼겠지. 사기꾼들이 다 그렇지, 뭐.”

스멘델은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16590716605231.jpg“당신을 찾아오기 전에 이미 조사를 다 해두었지. 사기를 치고 난 뒤에 은신처용으로 마련한 이 별장이 대략 1억 5천 루나쯤은 받을 수 있겠고, 저기 액자 뒤에 숨겨둔 돈이 좀 있을 테고, 책상 서랍에 귀금속은…… 한 2천 루나쯤? 그리고 당신을 염전 노예로 팔아먹으면, 5백 루나는 받을 수 있겠군. 쯧. 당신 몸뚱이가 제일 싸구려야.”

벨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스멘델은 그의 미래를 그려가고 있었다. 당연히 벨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16590716605231.jpg“슬픈 아이러니야. 당신 조카는 지금 굉장히 비싼 몸이 되었는데, 외삼촌인 당신은 이렇게나 싸구려라니 말이야.”

16590716605231.jpg“조카가 비싼 몸이 되었다니?”

16590716605231.jpg“이런 시골에서 숨어지내느라 아무 소식도 못 들은 모양이군? 아니면, 누나와 매형의 뒤통수를 후려친 죄로 절연을 당했나 보지?”

스멘델의 짐작은 틀렸다. 지금 벨본은 여기서 지내고 있긴 했지만, 틈이 나는 대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며 사기를 쳤고, 돈을 흥청망청 쓰며 지냈다. 지금은 그저 휴지기라서 여기서 쉬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가족들로부터 절연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고,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돈은 없고, 식구만 많은 가족에게 돌아갈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막내인 자신은 물려받은 작위 따위도 없었다. 물론 사기를 칠 때는, 자신이 곧 저바이스 자작이 될 몸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말이다.

16590716605231.jpg“네 조카는 루젠타에서 아주 어마어마한 부자랑 결혼했어.”

16590716605231.jpg“뭐?”

16590716605231.jpg“‘불쌍한 에델라’가 지금은 귀하신 상단의 사모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지.”

스멘델은 웃으면서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15년의 세월을 견딘 차용증은 누렇게 변해 있었지만, 글자는 아주 또렷했다.

16590716605231.jpg“자, 보이지? 지금부터 내 권한을 행사해야겠어. 당장, 이 저택 문서를 내놔. 빨리 팔아치우고, 네놈도 팔아치워야겠으니까.”

16590716605231.jpg“아, 아니! 잠깐! 잠깐!”

더욱 바싹 칼이 제 목에 들어오자 벨본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16590716605231.jpg“제안이 있어!”

16590716605231.jpg“제안?”

벨본의 말에 스멘델은 터무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지금 그는 뭘 제안할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순진하고 선한 예로니아 백작이라면 모를까? 벨본이 이미 사기꾼인 것을 아는 자신이 그에게 속을 리 없었다.

16590716605231.jpg“이까짓 시골집 하나보다, 그 차용증을 더 비싸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어.”

하지만 벨본은 매우 자신만만했다. 속으로 자신은 천재라는 생각까지 했다. 목에 칼을 댄,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렇게 빨리 사업계획을 세울 수 있다니!

16590716605231.jpg“내가 그 차용증의 열 배를 벌게 해주지.”

16590716605231.jpg“어떻게?”

스멘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거야 공짜였다. 거기다 가끔, 아주 가끔,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제야 숨겨둔 재산을 이야기하는 놈들도 있었고 말이다.

16590716605231.jpg“일단, 내가 그 차용증의 기한 연장에 동의해주겠어. 문서로 남기고, 서명을 해주겠다는 말이야.”

16590716605231.jpg“하! 지금 내가 차용증의 기한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보여? 내가 법적인 채권 유효기간 그딴 거에 벌벌 떠는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16590716605231.jpg“물론 그래 보이지는 않아. 이미 날짜가 지난 차용증과 칼을 함께 들이대는 것만 봐도 정상적인 금융업자는 아닌 것으로 보이니까 말이야.”

16590716605231.jpg“그런데 지금 무슨 개수작을 하는 거야?”

16590716605231.jpg“하지만 그게 나와는 달리, 그리고 당신과는 달리 그런 문서에 아주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내려면, 기한 연장 동의서가 필요하니까 말이야.”

16590716605231.jpg“……또 사기를 치겠다는 건가?”

16590716605231.jpg“사기라니? 사기가 아니라, 15년 전 당신에게 진 빚을 지금 갚겠다는 거지. 이자까지 듬뿍 쳐서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먼저 이 칼을 좀 치우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사업가 대 사업가로 말이야.”

스멘델은 잠시 생각하더니, 눈짓으로 벨본의 목에 겨누어져 있던 칼을 치우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스멘델의 일행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벨본의 집에서 나왔다. 이제 그가 가진 문서는 3장이었다. 하나는 빛바랜 차용증, 두 번째는 그 차용증의 기한 연장동의서, 그리고 마지막은 벨본과의 계약서였다. 스멘델이 에델라로부터 무사히 10억 루나를 받게 되면 이 방법을 설계해준 벨본의 몫으로 그 돈의 30%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16590716605231.jpg“저기, 두목. 저 사기꾼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영~ 사기꾼 같던데요.”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칼을 든 부하가 스멘델에게 말했다.

16590716605231.jpg“당연히 안 믿지.”

16590716605231.jpg“네?”

벨본을 믿지 않는다는 스멘델의 말에 부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를 믿지 않는다면, 계약서는 왜 썼단 말인가?

16590716605231.jpg“내가 믿는 건 예로니아 백작 가의 순진한 아가씨와 붉은바람 상단 단장의 어마어마한 돈이야. 거기다가 저자가 담보로 저 집의 문서까지 걸었잖아. 지금도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건 저 집뿐이야. 지금 챙기나, 저 작자에게 조금 시간을 준 뒤에 챙기나 저 집이 어딜 달아나지는 않는단 말이지.”

두어 달 더 기다린 대가로 큰돈을 챙길 수 있다면, 스멘델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어차피 그의 직업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이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스멘델은 믿었다. * * *

16590716679234.jpg“할 이야기가 있어.”

자못 비장하게 말하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눈을 굴렸다. 오늘은 바가지를 긁힐만한 일을 한 것이 없었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왔고,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혹시나 자기한테서 아직도 술 냄새가 나나 싶어서 테라비스는 몰래 코를 벌름거려보았지만, 약간의 땀 냄새가 날 뿐이었다. 이 정도는 오늘 날씨를 고려하면 평범한 편이었다.

16590716679238.jpg“해.”

자신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16590716679234.jpg“당신이 술을 마셨던 사람이 벨본 외삼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16590716679238.jpg“그렇군.”

에델라가 괜히 걱정할까 싶어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말하지 않기는 했지만, 딱히 비밀은 아니었던 터라 테라비스는 순순히 수긍했다.

16590716679234.jpg“예전에 당신이 예로니아 백작 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물었던 것 기억나?”

16590716679238.jpg“기억나.”

16590716679234.jpg“그때, 내가 외삼촌의 이야기를 한 것도 기억나?”

16590716679238.jpg“물론.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외삼촌을 도와주려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했었지.”

16590716679234.jpg“맞아. 그 외삼촌이 바로 벨본 외삼촌이야.”

16590716679238.jpg“그렇군.”

테라비스는 이미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하는 에델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별것 없는 아내의 족보를 듣고 있는 것처럼.

16590716679234.jpg“어머니와 아버지는 외삼촌을……. 용서하셨다고 하셨어.”

용서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올리기가 힘든 듯, 에델라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16590716679234.jpg“하지만 난 아직 외삼촌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아. 왜냐하면 난 외삼촌의 말을 믿을 수가 없거든.”

처음부터 그랬다. 에델라는 벨본이 그저 순순하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 루젠타로 돌아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스멘델이 자신을 죽이려 해서 어쩔 수 없이 차용증 연장동의서에 서명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정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서류에 서명할 수 없었을 터였다. 거기다가 벨본은 에델라에게 오늘 거짓말까지 했다. 테라비스를 ‘우연히’ 만났다고. 벨본은 순진한 에델라를 속여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에델라는 그에게 속지 않았다. 벨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을 뿐이었다.  

16590716679234.jpg‘벨본 외삼촌을 예로니아 저택에 계속 머물게 하지 마세요.’

  에델라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16590716679234.jpg‘벨본 외삼촌이 주는 어떤 서류에도 서명하시면 안 돼요.’

  에델라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이제 남은 것은 테라비스였다.

16590716679234.jpg“벨본 외삼촌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야. 난 외삼촌이 최근에 루젠타로 돌아온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델라는 침착하게 테라비스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는 아주 힘들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부와 명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에델라는 그가 예로니아 백작 가처럼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16590716679234.jpg“그래서, 당신과 이혼했으면 해.”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지켜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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