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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무릎의 무게 (78/92)

78화. 무릎의 무게2022.01.28. 

16590716510174.jpg“어머니! 어머니!”

에델라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저택의 문을 열어줄 사람이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녀가 주로 2층에서 기거하기에 빠르게 문을 열러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에델라는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16590716510179.jpg“에델라! 무슨 일이라도 있니?”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에델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문을 연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16590716510174.jpg“외삼촌은요? 벨본 외삼촌은 어디에 계세요?”

16590716510179.jpg“벨본은 아직 손님방에서 자고 있단다. 어제 누굴 만났는지 술을 잔뜩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아침에 깨워도 통 일어나지 못하더구나.”

벨본이 숙취로 아직 자고 있다는 말에 에델라의 인상이 더욱 굳어졌다. 오늘 아침,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마침 두 명이라는 것이 결코 우연일 리가 없었다. 어젯밤, 테라비스가 함께 술을 먹은 사람이 바로 벨본이었다.

16590716510174.jpg“외삼촌을 만나야겠어요.”

에델라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예로니아 저택에 살았던 에델라였다. 벨본이 어느 방에 묵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16590716510179.jpg“벨본은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16590716510174.jpg“아직 잘 몰라요.”

16590716510179.jpg“얘, 에델라. 무슨 일이니? 응? 그 아이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거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물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벨본은 아는 사람과 함께 술을 마셨다고 했지만, 15년 만에 루젠타에 나타난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이상했다. 게다가 돈을 빌렸다가 잠적했던 벨본이 함께 술을 마실만큼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이상했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세상 물정을 잘 몰랐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제 몇 번이나 벨본을 다그쳐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물었었고, 오늘 역시 몇 번이나 물었었다. 하지만 어제는 너무 술에 취해서 벨본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오늘은 숙취로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가 정신을 좀 차리면 반드시 다시 물어보리라고 다짐하고 있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었다. 그런데 에델라가 찾아온 것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다급하게 제 외삼촌을 찾으면서.

16590716510174.jpg“그냥 벨본 외삼촌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어서 그래요.”

창백한 제 어머니의 안색을 보며, 에델라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심약한 어머니는 예로니아 백작에게 엄청난 빚이 또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원인이 또 제 남동생이라면 더욱 그랬다.

16590716510179.jpg“에델라, 얘야.”

불안감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에델라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물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16590716510174.jpg“일단, 외삼촌을 만나고 난 뒤에 말씀드릴게요.”

에델라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한 뒤, 2층의 손님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여는 순간,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술 냄새와 입 냄새, 그리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옷들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그야말로 악취가 그 방에서 나고 있었다. 그 악취의 근본을 향해서 에델라는 걸어갔다. 빚쟁이도 가져가지 않을 낡은 침대에서 벨본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16590716510174.jpg“벨본 외삼촌.”

에델라는 벨본을 불렀다. 하지만 벨본은 그저 코만 드르렁거릴 뿐, 눈을 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16590716510174.jpg“벨본 외삼촌!”

더 큰 소리로 벨본을 부르며, 에델라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16590716510179.jpg“으? 으어? 으윽!”

벨본은 희한한 소리를 내면서 잠에서 깼다가, 이내 몰려드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16590716510179.jpg“으으~. 머리야.”

16590716510174.jpg“벨본 외삼촌. 이야기 좀 해요.”

16590716510179.jpg“누구? 에델라냐?”

16590716510174.jpg“네. 에델라예요. 일어나서 저랑 이야기 좀 하셔야겠어요.”

벨본이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에델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에게 얼른 일어나라며 재촉했다.

16590716510179.jpg“음……. 그래, 그래. 일어나야지.”

굳은 표정의 에델라를 힐끗 본 벨본은 입으로는 일어나겠다고 말을 했지만, 행동은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꾸물거렸다.

16590716510179.jpg“아이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머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네.”

벨본은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는 듯이 다시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낡은 침대는 그의 무게가 힘겹다는 듯이 끼익거렸다.

16590716510174.jpg“그렇게 많은 술을 대체 누구랑 마신 거죠?”

16590716510179.jpg“…….”

16590716510174.jpg“아버지, 어머니께 그동안 조금씩 일해서 모았던 돈을 사죄의 의미로 다 드렸다고 했잖아요.”

16590716510179.jpg“그게…….”

16590716510174.jpg“제 남편, 테라비스를 만난 거죠?”

16590716510179.jpg“그래.”

에델라의 목소리에서 확신을 발견한 벨본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그녀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90716510174.jpg“제 남편은 왜 만난 거죠?”

16590716510179.jpg“아니, 내가 일부러 만난 것은 아니고, 그저 우연히, 내가 시내에 나갔다가 아주 우연히~ 만난 거란다.”

일부러 시내까지 내려가서, 제 발로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벨본은 그저 우연으로 뭉뚱그렸다.

16590716510179.jpg“내가 네 외삼촌이라고 말을 했더니, 네 남편이 만나 뵙게 되어 반갑다며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말을 해서 같이 술을 먹게 된 거였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테라비스를 꼬여낼 수 있을까 고민했던 벨본에게 테라비스가 먼저 그 말을 해서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16590716510179.jpg“저기, 혹시…… 네 남편에게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니?”

16590716510174.jpg“무슨 이야기요?”

16590716510179.jpg“그러니까……. 옛날이야기라든지 그런 것 말이다.”

16590716510174.jpg“…….”

벨본의 말에 에델라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거로 생각하는 건지, 기가 막혀서였다.

16590716510174.jpg“그럼, 팔란드 스멘델이라는 사람은요?”

16590716510179.jpg“……어?”

16590716510174.jpg“그 금융업자라는 사람이 외삼촌을 만났다고 하던데요.”

16590716510179.jpg“아! 그 사람!”

금융업자라는 말에 그제야 그가 누군지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던 벨본은 이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마치 문밖이나 창문에서 누가 자신을 엿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살펴보았다.

16590716510179.jpg“그, 그자가 너를 찾아갔단 말이야?”

16590716510174.jpg“네.”

16590716510179.jpg“오! 이런, 에델라!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벨본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에델라의 팔을 붙들고 그녀의 몸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16590716510179.jpg“그 사람, 아주 무서운 사람이란다. 자기 말로는 금융업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채꾼이야. 에델라, 어디 다친 곳은 없니?”

16590716510174.jpg“다친 곳은 없지만, 저를 찾아와서 문서를 보여주더군요.”

16590716510179.jpg“아아……. 역시……. 그렇구나.”

에델라의 말을 들은 벨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풀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도 침대는 크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16590716510179.jpg“아까도 말했지만, 스멘델은 무서운 사채업자란다. 폭력적인 깡패들을 동원해서 끝까지 돈을 받아내는 사람이지.”

16590716510174.jpg“그런 사람에게 돈을 빌렸었단 말인가요?”

16590716510179.jpg“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금융업자로 보였어! 나도 속았던 거란다.”

16590716510174.jpg“15년 전에는 그랬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사람은 두 달 전에 외삼촌을 만났다고 하던데요. 외삼촌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도 가지고 있었고요.”

16590716510179.jpg“그래. 그 문서!”

벨본은 제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16590716510179.jpg“그자가 나를 찾아와서 그 문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단다. 내 사지를 자르고, 내장을 꺼내버리겠다는 둥, 얼마나 잔인한 말로 날 협박했는지! 말뿐이 아니었어. 내 목에 칼도 들이댔단다!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16590716510174.jpg“…….”

16590716510179.jpg“에델라, 오! 에델라야! 착한 조카야!”

고개를 든 벨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16590716510179.jpg“네 외삼촌은 겁쟁이에다가 비겁한 사람이야. 너무나 무서워서 그 문서에 사인하고 말았단다.”

16590716510174.jpg“그럼 외삼촌이 정말로 그 차용증의 기한이 연장되도록 사인하셨단 말인가요?”

16590716510179.jpg“미안하다, 에델라. 정말 미안하구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벨본은 에델라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이제껏 단호했던 에델라도 잠시 멈칫했다. 원수 같은 사람이긴 했지만, 어머니의 동생이었다. 지금쯤 복도에서 제 동생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불안해서 눈물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16590716510179.jpg“정말 미안하다, 에델라. 조카야, 정말 미안해.”

에델라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벨본은 이미 엉엉 울고 있었다.

16590716510174.jpg“외삼촌이 갚으세요.”

약해지려는 마음을 꼭꼭 붙들며, 에델라는 냉담한 목소리로 벨본에게 말했다.

16590716510174.jpg“외삼촌이 빌린 돈이고, 외삼촌이 기한을 연장한다고 하셨으니, 그 돈은 외삼촌이 갚으세요.”

16590716510179.jpg“그래. 그래. 당연하지.”

16590716510174.jpg“그 금융업자인지, 사채꾼이지 하는 사람에게 꼭 그렇게 전하세요.”

16590716510179.jpg“물론이다. 내 오늘 당장 그자를 찾아가마. 네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하마.”

16590716510174.jpg“저뿐만이 아니라, 제 가족들 모두의 곁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세요.”

16590716510179.jpg“그래. 그러마. 누님에게도 백작님의 앞에도, 절대로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마.”

16590716510174.jpg“그리고 제 남편을 다시는 만나지 마세요.”

16590716510179.jpg“어?”

에델라의 마지막 말이 조금 의외였던 듯, 벨본은 고개를 들었다.

16590716510174.jpg“다시는 붉은바람 상단으로 테라비스를 찾아가지 마시라고요.”

벨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에델라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요구를 말했다. 벨본은 테라비스를 우연히 만날 수 없었다. 둘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말로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테라비스가 벨본이 에델라의 외삼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고, 벨본 또한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서로의 이마에 각각 에델라의 외삼촌, 혹은 에델라의 남편이라고 써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에델라는 벨본이 루젠타에 왔다는 사실을 테라비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벨본이 루젠타에 있는 것도 모르는 테라비스가 예로니아 저택으로 벨본을 찾아갈 리가 없었다. 그러니 에델라가 내린 답은 하나였다. 벨본이 에델라의 남편이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이라는 것을 알았고, 상단으로 테라비스를 찾아간 것이었다.

16590716510179.jpg“그, 그러마.”

벨본은 테라비스를 우연히 만났다는 자신의 거짓말에 에델라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90716510174.jpg“제가 말한 것들을 지켜주시길 바라요, 외삼촌.”

16590716510179.jpg“그래. 물론이지. 약속 꼭 지키마.”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끄덕이는 외삼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델라는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아섰다.

  -탁.

16590716510179.jpg“…….”

에델라가 방에서 나가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벨본은 잠시의 시간을 두고 고개를 스윽 들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이미 말라 있음은 물론이었고, 에델라에게 매달리던 불쌍한 표정은 오간 데 없었다. 이질적일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로 문을 쳐다보던 벨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16590716510179.jpg“시건방진 계집애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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