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과거의 망령2022.01.24.
테라비스는 숙취로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에델라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찡긋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어제 내가 늦게 들어와서 해야 할 것을 못 해서 그러는 거구나?”
“해야 할 것?”
테라비스의 말에, 아니 사실은 그의 표정을 보며 에델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있잖아. 당신이랑 내가 해야 할 것.”
테라비스의 표정이 더욱 음흉하게 변했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더니 그대로 에델라를 향해서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서 입술을 내밀고 다가오는 테라비스를 본 에델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 입술을 내민다고? 저 술 냄새 나는 입술을 원해서 내가 지금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델라의 이마 주름이 깊어지며, 가차 없이 뒤로 한 걸음을 걸었다.
“우웅~ 윽!”
입술은 앞으로 쭉 내밀고, 에델라를 향해서 두 팔을 벌린 채 상체를 기울였던 테라비스는 몸을 기댈 곳이 없어지자 팔이 허공을 감싸 안으며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푹신한 침대라서 다친 곳은 없었지만, 숙취로 인한 두통이 더 심해져서 그의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와서 아침이나 먹어.”
이불에 얼굴이 파묻힌 테라비스의 뒤통수를 향해서 한마디를 던진 채 에델라는 술 냄새가 진동하는 침실에서 나와버렸다.
“으으윽……. 죽겠네.”
이대로는 이불에 숨이 막혀 질식사하든, 자신의 술 냄새에 질식사하든, 어쨌든 죽을 것 같은 느낌에 테라비스는 겨우겨우 고개를 돌려 숨을 내뱉었다. 힐끗, 옆자리를 보자 구겨진 시트와 눌러진 베개에서 에델라의 흔적이 보였다.
“술 냄새 난다더니, 다른 방에서 안 자고 옆에서 잔 모양이네?”
머리는 여전히 깨질 듯이 아팠지만, 테라비스의 입술에서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 나쁘지 않네. 바가지 긁히는 기분.”
침대에 거꾸로 꼬꾸라진 채,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빙그레 웃었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제법 좋았다. * * *
“정말 무슨 생각인 건지!”
에델라는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발끈 화를 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어젯밤을 기억도 못 하는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기까지 했다. 할 일을 못 해서 화가 난 거냐고? 지금 에델라의 화는 정반대의 이유에 기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테라비스는 아주 늦게 들어왔다. 그리고 에델라는 그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테라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침실까지 테라비스를 부축한 사람은 에델라였고, 그를 침대에 눕힌 것도 에델라였으며, 옷을 갈아입힌 것도 에델라였다. 그리고 술 취한 테라비스와 키스를 한 것도 물론, 에델라였다.
“에델라.”
테라비스는 뭉툭한 발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내가 요즘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고민이 많은지 당신은 모를 거야.”
그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무슨 고민이냐고 에델라가 묻자, 테라비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에델라.”
테라비스가 다시 에델라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가까이 와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에델라는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은 테라비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들어오자 테라비스는 담쟁이덩굴처럼 에델라의 손목을 휘어 감았고, 그대로 당겼다.
“에델라.”
자신의 몸 위로 쓰러진 에델라를 바라보며, 테라비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 끌어당겨 그대로 에델라의 입술을 삼켰다. 에델라가 처음에 느낀 것은 자신마저 취할 것 같은 지독한 술 냄새였다. 에델라는 당황하며 그대로 몸을 잡아빼려 했다.
“에델라.”
하지만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니길 바라. 당신은 전혀 원하지도 않는데, 나 혼자 이러는 게 아니길 바라. 내가 하는 행동이 전부 주제넘은 짓이 아니기를 바라.”
그저 단순히 지금 에델라에게 키스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애절한 목소리였다. 그의 말속에는 에델라가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찰나의 키스나 한순간의 뜨거움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깊은 무언가였다.
“에델라.”
두 번째 키스는 피할 수 없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테라비스의 입술과 혀에서 느껴지는 술 냄새 때문에 에델라까지 어질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자 술 냄새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테라비스의 입술 감촉과 그의 뜨거운 열기였다. 에델라는 점점 그것에 취해갔다. 테라비스만큼이나. - 똑똑.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던 에델라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마님, 마님을 꼭 뵈어야겠다는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나를? 누군데?”
“팔란드 스멘델이라는 분이십니다.”
에델라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혹시 무도회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거나 붉은바람 상단에 그런 이름의 직원이 있었나를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이름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네.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냥 마님을 뵈어야겠다고 말씀하시던걸요. 일단 태도는 정중했고, 차림새도 멀끔했던 터라 응접실로 안내를 해드렸는데, 혹시 마님께서 만나기 싫으시다면 돌려보낼까요?”
조심스러운 하녀의 얼굴에서 혹시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였다고 혼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엿보였다. 에델라가 이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안주인의 손님과 손님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아직 고용인들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에델라를 찾아올 손님이 예로니아 백작 내외 외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아직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니. 내가 응접실로 가볼게.”
에델라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란드 스멘델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만나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 * * 에델라의 예상은 틀렸다. 팔란드 스멘델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나, 에델라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웃는 낯으로 일단 인사를 나누고, 자리까지 권해 서로 마주 보고 앉았지만, 여전히 에델라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루젠타 시내에서 조그맣게 금융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금융업이요?”
“네. 제가 바넬레오 부인을 뵙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것 때문입니다.”
에델라의 얼굴에서 의아함을 읽어낸 것인지 그는 미리 준비해 온 것 같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에델라는 그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제까지 말을 잘하던 스멘델은 대답 대신 그것을 읽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에델라는 봉투를 뜯었고, 그 위에 적인 글자를 보자마자 인상을 굳혔다. 차용증. 남자가 내민 문서의 맨 위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게…….”
에델라는 고개를 들어 스멘델을 쳐다보았다. 스멘델은 에델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글을 읽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을 뿐이다.
“…….”
입술을 꾹 다물고 에델라는 바쁘게 문서를 읽어내렸다. 몇 가지의 조항과 날짜와 또 의무와 책임들이 적혀 있는 것들을 빠르게 넘긴 에델라의 눈에 들어온 단어들이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채권자: 팔란드 스멘델 채무자: 벨본 드 저바이스 연대보증인: 아퀼라 드 예로니아 금액: 40,000,000 루나 오래된 문서를 쥐고 있는 에델라의 손끝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발목 아래는 끝도 없는 수렁으로 점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에델라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은 비싼 카펫이 깔린 그녀의 집 응접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지 모르겠네요.”
손끝은 이미 차가워졌고, 입술은 바짝 말라왔지만, 에델라는 침착하게 문서를 내려놓았다.
“여기 이 문서에서 제 이름은 찾을 수 없는데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인의 아버님 성함이 여기에 적혀 있으시죠. 연대보증인으로 말입니다. 연대보증인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스멘델은 에델라가 혹시나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검지로 예로니아 백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을 짚어주며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모르고 자랐으면 더 좋았을 그 단어를 에델라는 의미는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의미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상환 날짜가 적혀 있고, 이 날짜가 아주 오래전에 지났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괴로운 기억 때문에 나름대로 공부를 했었다. 혹여나 나중에 또 빚쟁이들이 찾아올까 봐 무서웠고, 자신이 버는 몇 푼 안 되는 돈마저 그들이 가져가 버려서 세 식구가 굶어 죽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여기 적힌 제 외삼촌께서 상환일에 돈을 갚지 못하셨고, 그래서 많은 채권자가 저의 집에 찾아와 돈 대신 돈이 될만한 것들을 전부 가지고 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외삼촌분께서 빌린 돈은 그것보다 많았습니다. 거기다가 저는 소식이 조금 늦었던 터라, 제가 예로니아 저택을 찾았을 때는…….”
그가 예로니아 저택을 찾았을 때는 이미 저택은 메뚜기떼가 다녀간 벌판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망연자실한 예로니아 백작과 울고 있는 예로니아 백작 부인, 그리고 훌쩍거리는 어린 에델라 외에는 말이다.
“어쨌든 저는 이자는커녕, 원금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 이 날짜는 이미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제국 내에서 일반적인 채권의 소멸시효는 10년이며, 특수한 경우라도 15년은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날짜로부터 이미 15년이 지났죠.”
에델라는 차용증을 스멘델 쪽으로 도로 내밀며 말했다.
“물론, 그것도 바넬레오 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스멘델은 에델라의 말이 옳다고 말하면서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서 에델라는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제게 이런 것이 있습니다.”
스멘델은 에델라가 그 말을 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두 번째 봉투를 꺼냈다.
“소멸시효인 15년이 되기 전, 그러니까 두 달 전이지요. 저는 아주 우연히 저바이스 님을 만나 뵐 수 있었고, 그분께 채무상환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친절하게 이런 것을 써주셨지요.”
에델라는 봉투를 열고 싶지 않았다. 아주 무서운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을 것 같았다.
“…….”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에델라는 봉투를 열어야 했고, 그것을 읽어야 했다.
“이전 차용증의 상환기한을 연장한다는 문서입니다.”
스멘델은 아주 친절하게 에델라가 읽고 있는 문서가 무슨 내용인지 설명해주었다.
“4천만 루나의 15년간의 이자를 포함하여, 부인의 외삼촌이신 저바이스 님, 혹은 아버님이신 예로니아 백작께서 제게 갚아야 할 금액은 10억 1천 2백만 루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