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잔소리와 바가지2022.01.21.
“와하하하하하!”
“한 잔 더 드시지요.”
“암! 마셔야지! 더 마셔야지! 우리 조카사위가 따라주는 술이라면 더 마셔야지!”
테라비스가 따라준 술을 벨본은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에는 비싼 술이라 그 맛을 음미하며 마셨는데, 머리꼭지까지 술에 취한 지금은 그저 맹물처럼 느껴졌다.
“자, 우리 조카사위도 한 잔 더 드시게!”
그는 술병을 제대로 고정도 하지 못하면서 테라비스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반쯤은 술잔 안으로 들어가고, 반쯤은 테라비스의 손에 술을 부었건만 테라비스는 괘념치 않았다. 지금 저자는 자신이 매우 비싼 술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비싼 술은 처음의 병뿐이었다. 두 번째로 나온 술은 테라비스의 지시로 그 병에 다른 술을 넣은 것이었다.
“크흐~ 역시 고급술은 맛이 다르군! 아주 향이 기가 막혀!”
하지만 벨본은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많이 드십시오. 이 술 역시 저희 유통품 중 하나인데, 신전의 신관들도 숨겨놓고 몰래 마신다는 아주 귀한 술이랍니다.”
“오! 그런가? 역시! 맛이 남다르더라니! 아주 신성한 술이었군 그래.”
테라비스는 웃으며 벨본의 잔에 술을 더 따라주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의 에델라가 아주 귀여웠다는 당연한 사실이나, 벨본이 어렸을 때 머리가 아주 좋았다는 쓸데없는 말이나, 자신이 훌륭한 안목을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들었을 뿐이었다.
‘술값이 아깝군.’
테라비스는 술잔을 비우며 혀를 찼다. 처음 테라비스의 계획은 술을 좀 먹인 다음, 그가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취했을 때쯤 되면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벨본은 으슥한 골목에서 강도를 당하게 될 예정이었다. 벨본은 흠씬 두들겨 맞고, 가진 돈도 다 빼앗기고, 뜨내기 주제에 루젠타에 계속 머물고 싶으면 세금을 더 내라는 협박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세금을 내지 않으면 벨본이 당하게 될 여러 가지 험한 꼴에 대한 설명도 함께. 테라비스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15년간 한 번도 루젠타를 찾지 않았던 벨본이 에델라가 부자와 결혼하고 한 달이 된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평민과 귀족의 결혼이니 주변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평민이 부자라면 그 소문은 더욱 빠르게 번졌을 것이다. 제국 어딘가에서 예로니아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을 벨본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릴 만큼.
‘이제 슬슬 계획대로 해볼까?’
만약을 대비해 벨본이 루젠타에 어떤 계획으로 온 것인지 알아내려 했던 테라비스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처음의 계획대로 고주망태가 된 벨본을 길거리로 내보낼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테라비스는 벨본의 계획을 그렇게 만들 예정이었다.
“이봐, 조카사위.”
벨본이 앞으로 몸을 숙이며,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테라비스를 불렀다. 그리곤 어서 자기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라는 듯 손까지 까딱거렸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고급 술집의 개별 룸이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누가 듣는다고 그렇게 고개를 가까이하라는 것인지 테라비스는 어이가 없었다.
“네, 처외삼촌.”
하지만 이 방을 나가기 전까지는 매너 좋고, 결코 강도 따위와는 연관이 없을 조카사위로 보여야 했기에 테라비스는 벨본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자네가 돈이 많다니까 내가 아주 좋은 투자처를 알려주려고 하는데 말이야.”
“아, 그러십니까?”
테라비스는 역시나 그런 계획이었나 싶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게 투자하고 딱 일 년만 기다리면 두 배, 세 배가 될 그런 노다지 투자처야. 한마디로 넣기만 하면 무조건 대박인 거지.”
“아, 그렇군요.”
“내가 고급정보는 아무에게나 안 알려주는데, 우리 조카사위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지!”
“아, 그러시군요.”
벨본의 수법이 너무 뻔한 수법이라서 테라비스는 슬슬 지루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속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투자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는 순진한 귀족이라든가, 돈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수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밑바닥부터 굴러온 장사치였고, 돈은 이미 많았으며, 가진 재산을 현재 상단과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벨본의 허황한 이야기에 혹할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자네가 내 이야기를 못 믿는 모양인데 말이야.”
하지만 벨본은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테라비스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그는 애가 닳았다. 테라비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예로니아 백작 내외에게 고개를 숙이고, 평생 해본 적도 없는 풀베기나 청소 같은 것을 하며 예로니아 저택에 붙어 있는 중이었다. 사실은 예로니아 백작에게 사기를 친 재산이 아직도 제법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라비스에게 크게 한탕을 더 해서 평생 놀고먹을 돈을 긁어내기 위해서.
“예로니아 백작님께서도 이 이야기를 믿으시고, 내게 이런 것을 맡기셨다네.”
벨본은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야말로 은밀히 테라비스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아, 그렇…….”
별 꼴 같지도 않게 자꾸 은밀한 척을 하는 벨본이 어이없어서 이번에도 대충 대답하고 넘어가려던 테라비스는 그가 보여준 문서를 힐끗 보았다가 눈에 들어오는 글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건 혹시 예로니아 저택의 소유권 문서입니까?”
“그렇다네. 자네 장인께서도 나를 믿고 좋은 투자처에 투자해달라며 맡기신 것이지.”
테라비스가 물건을 알아보자 벨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문서를 다시 갈무리해서 넣었다.
“맡기셨다는 것은, 예로니아 백작님께서 그것을 담보로 투자를 하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벨본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테라비스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생각에 지금 벨본이 하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예로니아 백작은 저택의 소유권을 담보삼아 벨본에게 투자를 맡길 사람이 아니었다. 예로니아 저택은 루젠타의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산의 초입에 있는 루젠타 시내 전체와 바다를 내려다보는 풍광을 가진 그야말로 유서 깊은 대저택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세가 기운 탓에 가꿔주지 않아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내부는 더욱 황량했지만, 그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현재 예로니아 백작이 가진 거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제법 가치를 가진 재산이었다. 에델라가 처음에 결혼 제안을 해왔을 때, 안 그래도 테라비스는 그것이 궁금했었다. 저런 대저택에 살면서 왜 그들이 그렇게 궁곤하게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보다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아서? 약값과 병원비가 밀린 사람이 가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루젠타가 아무리 작은 항구도시라고 해도, 부자는 제법 있었다. 거기다가 루젠타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 유서 깊은 대저택을 탐낼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당장 테라비스만 해도 많은 돈을 벌게 된 뒤 루젠타에 집을 사려고 했을 때, 예로니아 저택도 고려했었다. 결국엔 상단의 사무실에서 가까운 지금의 집을 선택했지만. 조상이 물려준 저택을 차마 팔 수 없어서? 그래도 하나뿐인 딸을 파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국, 테라비스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예로니아 백작은 저택을 팔지 않은 것이 아니라, 팔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방금 테라비스는 그 팔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낸 것 같았다.
“예로니아 백작님께서도 관심을 두신 투자처라고 하니,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테라비스는 퍽 흥미로운 척을 하며 벨본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의 재킷 안쪽으로 조금 전에 슬쩍 보여주었던 예로니아 저택 소유권 문서가 보였다.
“자세히 좀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벨본을 흉내 내듯, 테라비스는 은밀하게 말했다. * * * 누군가 테라비스의 머리 안에서 북을 치고 있었다. 어쩌면 심벌즈도. 그리고 트럼펫도.
“으…….”
아침에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두통을 느낀 테라비스의 입술에서는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억지로 눈을 뜨자 이번에는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회전목마에서 잠이 들었던가? 그건 아니었다. 테라비스의 마지막 기억은 회전목마의 마차가 아니라 집으로 향하는 자신의 마차였다.
“으…….”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다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더불어서 타는 듯한 갈증도 함께 밀려 들어왔다. 머리는 욱신거리고,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으며, 속은 울렁거리면서 동시에 쓰렸고, 목구멍은 바싹바싹 마른, 딱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바로 지금 테라비스의 상태였다.
“무, 물……. 물…….”
침실의 작은 탁자 위에 두는 물이 생각나서 테라비스는 손을 더듬거렸다. 그게 아니면 하인을 부르는 줄이라도 잡아당길 참이었다.
“자, 여기 있어.”
허공을 휘젓던 손에 물이 담긴 잔이 닿았다. 꿀꺽꿀꺽 마시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하아…….”
하나의 고충을 해결한 테라비스가 깊게 숨을 내어 쉬자, 그 앞에 있던 에델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술 냄새.”
안 그래도 술 냄새 그 자체 같았던 테라비스였다. 그런데 깊게 숨을 내쉬자 더 심한 술 냄새가 에델라를 덮쳐와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체 어디서 술을 그렇게 마신 거야?”
테라비스로부터 한걸음 떨어지며 에델라가 물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온 줄 알아? 술은 대체 얼마만큼 마신 거야?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어제 당신은 술이 사람을 잡아먹은 것 같았던 것 알아? 대체 누구랑 술을 마셨길래 그렇게나 많이 마신 거야?”
아니, 사실은 물은 것이 아니라 다그치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테라비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것 좀 봐? 도대체 이렇게까지 술을 먹는 사람이 어딨어?”
“오! 혹시 이게 바가지라는 건가?”
“뭐?”
“나 지금 모든 유부남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온 다음 날 부인의 잔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이거 신선한데?”
테라비스는 지금 이 상황이 신기하다는 듯,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다음은 뭐지? 한 번만 더 그러면 집에서 쫓겨나는 건가? 아니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각서를 써야 하는 건가? 아! 무릎을 꿇고 비는 건 봐줘. 지금은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거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니라고? 난 분명히 바가지를 긁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아니야!”
“그래? 이게 바가지가 아니라면…….”
테라비스의 눈이 음흉하게 에델라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