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침대 밑 괴물2022.01.17.
“누구시죠?”
이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뒤였지만, 테라비스는 그를 전혀 모른다는 듯이 태연히 물었다.
“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겠군. 나는 에델라의 외삼촌인 벨본 드 저바이스이네, 조카사위.”
벨본은 활짝 웃으면서 단장실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왔다.
“에델라에게서 내 이야기는 들어봤겠지?”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습니다만?”
의심스럽다는 듯이 테라비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하자, 벨본에게 밀쳐진 채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호위무사가 재빨리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그것을 눈치챈 벨본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테라비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태연자약했다.
“아, 아니, 이보게, 조카사위.”
벨본은 당황해서 테라비스를 불렀다. 자신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테라비스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확률상 나쁜 쪽일 가능성이 컸지만 상관없었다. 돈이 많고, 부자라고 한들, 테라비스는 평민이었고, 자신은 지방의 이름 없는 가문일지라도 귀족이었다. 막내로 태어나 서열이 낮아 저한테까지 올 작위는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거기다가 자신이 에델라의 외삼촌이니 테라비스보다 손윗사람이었고, 나이도 열 살이나 많았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든, 평민에 어린 손아랫사람인 테라비스는 자신을 존중해주고 깍듯하게 대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벨본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부 테라비스가 예의 바르고, 겉치레에 신경 쓰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에델라의 외삼촌이 확실합니까?”
하지만 테라비스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행색이 좀…… 잡상인 같은데?”
부인의 외삼촌이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귀족임이 분명한 이름을 대어도, 일단 잡상인 취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례했다.
“아, 아니! 지금 무슨!”
벨본의 얼굴은 대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자신의 행색이 조금 초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신분은 이런 무례한 취급을 받을 정도로 낮지 않았다. 심지어 테라비스의 말에 호위무사는 당장이라도 벨본을 단장실에서 끌어내리려는 듯, 그의 팔을 붙잡기까지 했다.
“의심스러우면, 나와 같이 예로니아 저택으로 가서 누님께 인증을 받으면 되겠지.”
벨본은 호위무사의 손에서 거칠게 제 팔을 빼내며 테라비스에게 쏘아붙였다.
“흠……. 확인해보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에델라의 외삼촌분이 맞는 것 같군요.”
그가 에델라의 외삼촌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던 테라비스는 그제야 벨본의 말을 믿는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상단에 거래 좀 해달라, 뭐 좀 사달라, 혹은 팔아달라고 하는 잡상인들이 워낙에 많이 드나들다 보니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조금 전 벨본을 무시하던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깍듯한 태도로 테라비스는 안쪽 소파 자리를 벨본에게 권유했다. 그것도 상석으로.
“크, 크흠!”
그제야 기분이 풀어진 벨본은 헛기침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히며 테라비스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언제 루젠타에 오신 겁니까?”
“에델라가 정말 내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단 말이지?”
“네.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테라비스의 대답에 벨본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에델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뜻밖이었다. 그래서 아까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야기가 더 잘 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원래 얌전하고 말이 없는 아이라 내 이야기를 안 했던 모양이군.”
“에델라가요? 전혀 아닌데요. 제가 아는 한, 에델라는 똑 부러지게 제 할 말을 다 하는 타입입니다. 제가 참 배울 점이 많죠.”
“어, 어릴 때는 그랬는데, 크면서 많이 변했나 보군.”
“어릴 때만 기억하시는 걸 보면, 꽤 오랜만에 루젠타를 찾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한 십 년 넘게 그 아이를 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그렇군요. 어디 멀리 가셨었나 보죠? 아! 외가 쪽분이시니, 원래 루젠타분이 아니시겠군요.”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벨본의 말에 수긍하는 척을 했다.
“…….”
“…….”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그저 미소를 띤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실, 할 말이 없을 관계이긴 했다. 처음 보는 아내의 외삼촌. 거기다가 서로 다른 신분에 나이는 열 살 차.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남자 둘이 갑자기 마음을 터놓고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예로니아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덕분에 잘 지내시네. 자네 칭찬이 아주 대단하시더군.”
“제 칭찬을 할 게 별로 없을 텐데요. 오히려 변변치 못한 평민 사위 때문에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니! 무슨 그런 겸손의 말을! 내가 듣기로는 루젠타에서 제일가는 부자라고 들었는데…….”
벨본은 일부러 말꼬리를 흐리며 테라비스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벨본이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을 눈치챘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신분은 낮으나, 돈은 좀 가지고 있지요.”
테라비스는 보란 듯이 거만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군.”
벨본은 테라비스의 대답이 만족스러워서 활짝 웃었다.
“내가 이렇게 자네를 찾은 것은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조카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해서, 과연 내 조카사위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는데, 자네를 보니 비록 신분은 미천하지만, 사람은 괜찮은 것 같아서 마음이 좀 놓이는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저를 그렇게 신뢰해주는 것입니까?”
“사실 나도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라, 어느 정도 안목이 있거든.”
“오! 사업가셨군요. 어떤 사업을 하십니까?”
“좋은 투자처를 선정해서, 재산을 불리고자 하는 투자자들을 연결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지.”
테라비스는 이전에 에델라가 예로니아 백작 가를 망하게 만든 외삼촌이 처음에 예로니아 백작에게 좋은 투자처가 있으니, 그곳에 투자하라고 말했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벨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이 작자가 예로니아 백작 가를 망하게 만든 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저와 함께 나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술을?”
“제 아내의 외삼촌이라면, 제 외삼촌이나 다름이 없죠. 오랜만에 루젠타에 들렸다고 하시니, 제가 대접을 한번 해드리고 싶군요. 거기다가 같은 사업하는 분이시라니 말도 잘 통할 것 같고요.”
테라비스는 벨본을 향해서 비즈니스용 미소를 활짝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