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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지켜야 할 사람 (73/92)

73화. 지켜야 할 사람2022.01.10. 

16590716006144.jpg“…….”

16590716006144.jpg“…….”

16590716006144.jpg“…….”

고개를 숙인 벨본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벨본을 바라보고 있는 예로니아 백작 또한 말이 없었다. 그 두 사람의 가운데에 앉은 예로니아 백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세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16590716006144.jpg“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습게도 벨본이었다.

16590716006144.jpg“백작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벨본은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16590716006144.jpg“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약값에라도 조금 보태셨으면 해서 마련해왔습니다.”

16590716006144.jpg“이건 어디서 난 돈이니?”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벨본을 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벨본이 잠적하고, 빚쟁이들이 예로니아 저택에 쳐들어왔을 때, 그녀는 당연히 친정에 연락했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하인은 벨본이 그곳에 없다는 것과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벨본은 루젠타에도, 고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든 책임과 빚을 예로니아 백작에게 떠안기고 잠적해버린 벨본이 다른 곳에서 정상적인 경로로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는 선뜻 생각하기 어려웠기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온 것이었다.

16590716006144.jpg“제가 번 돈입니다, 누님.”

16590716006144.jpg“네가 어디서? 어떻게?”

16590716006144.jpg“저도 힘들었습니다.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도망쳐버리고 말았으니, 누님 뵐 면목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냥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했습니다.”

벨본은 정말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16590716006144.jpg“그때는 정말이지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정말 좋은 투자처라고 생각을 했고, 백작님과 누님도 함께 돈을 벌면 좋을 거로 생각해서 그랬던 겁니다. 그놈이 사기꾼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16590716006144.jpg“그렇다고 그렇게 도망을 가면 어쩌니?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

16590716006144.jpg“죄송합니다, 누님. 그때는 제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백작님과 누님께 너무나 죄송하여 지금이라도 사죄를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벨본은 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마지막 문장은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였다.

16590716006144.jpg“그만 하세요, 부인.”

이 자리에 앉고 처음으로 예로니아 백작이 입을 열었다.

16590716006144.jpg“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벨본도 이렇게 뉘우치고, 사죄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고 하니, 우리가 그 사죄를 받아 줘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예로니아 백작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16590716006144.jpg“벨본.”

자신의 가문을 망하게 한 원흉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16590716006144.jpg“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16590716006144.jpg“백작님…….”

고개를 든 벨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그는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것은 15년 만에 마주한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물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했고, 그 참혹한 일을 당했음에도 자신을 용서해주는 예로니아 백작의 마음에 감명받아서인 것도 같았다.

16590716006144.jpg“오랜만에 누이의 집에 왔으니, 쉬었다 가도록 해라.”

16590716006144.jpg“백작님!”

예로니아 백작의 인정에 벨본은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그를 보며,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앉아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부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 .

16590716006144.jpg“정말 벨본이 여기 있어도 괜찮겠어요?”

2층의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16590716006144.jpg“전 솔직히, 저 아이가 또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지 걱정이에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벨본을 ‘저 아이’라고 칭했다. 이미 서른을 훌쩍 넘긴 벨본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 어리기만 한 막냇동생으로만 보였다. 어릴 적 그녀가 업어주고, 놀아주고, 재워주었던, 그 어린 동생이었다.

16590716006144.jpg“벨본이 또 사고를 친다고 한들, 여기서 우리가 뭘 더 잃을 게 있겠어요?”

예로니아 백작은 조용히 그녀의 곁에 가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물고기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연못도 있었고, 색색의 꽃도 피어나는 정원이었건만, 지금은 잡초와 잡목만이 무성한 정원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여전히 정원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잡초일지라도 초록의 풀들을 반가워했고, 정성껏 가꾼 화려한 꽃은 아니었지만 자라나는 이름 모를 들꽃들도 좋아했다. 황량해진 저택을 바라보는 것보다, 적어도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을 보는 쪽을 훨씬 좋아해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16590716006144.jpg“부인.”

예로니아 백작은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 결혼할 때는 보드랍고 매끈하던 손은 이제 나이가 들어 주름이 지고, 손수 집안일을 하는 통에 거칠어져 있었다.

16590716006144.jpg“당신이 계속 마음을 쓰고 있었던 것을 압니다.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계속 내게 미안해했던 것도 압니다.”

그건 예로니아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 두 번을 보고 수줍게 청혼의 말을 건넸던 젊은 소백작은 오랜 병마와의 싸움으로 나이보다 더 늙어 있었다.

16590716006144.jpg“내가 벨본을 용서한 것은 정말 그 애에게 죄가 없어서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애를 용서해야, 당신이 더는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젊었던 시절과 비교해도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예로니아 백작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또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6590716006144.jpg“이제 잊읍시다. 과거는 흘려보내고, 미래를 맞아야지요.”

예로니아 백작이 백작 부인의 손을 토닥이자,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그의 어깨에 제 몸을 기댔다.

16590716006144.jpg“내가 요즘 몸이 좋아졌으니, 내일은 벨본을 데리고 정원 일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꽃을 심을 형편은 못되고, 나무 다듬는 기술도 없지만, 풀을 좀 베어내면 그래도 제법 봐줄 만하지 않겠습니까?”

16590716006144.jpg“무리하지 마세요. 이제 좀 차도가 보이는데.”

16590716006144.jpg“의사도 이제 조금씩 운동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를 토닥이며, 두 사람은 정원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예로니아 저택의 입구에서부터 에델라는 당황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정원에는 수풀이 무성했다. 날이 더워진 지 꽤 되었으니, 지금쯤 정원의 상태가 더 심해졌을 것이라는 에델라의 예상과는 달리 정원은 제법 말끔한 상태였다. 이번에 테라비스에게 받은 돈을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며, 벌레가 끓지 않도록 사람을 써서 풀을 좀 베어야겠다고 말을 할 참이었던 에델라는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6590716053278.jpg“혹시 아버지께서?”

예로니아 백작이 쓰러지기 전에는 정원은 에델라와 그의 몫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풀을 베었고, 보기 좋은 들꽃이 있으면 꺾어다가 예로니아 백작 부부의 침실이나 에델라의 방, 혹은 식당이나 서재에 장식해두곤 했다. 비록 제대로 된 화병이 없어서 이가 나간 화병이나, 깨진 병 같은 곳에 꽂아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 저택은 훨씬 화사하게 보였었다. 하지만 백작이 쓰러지고 나서는 그것마저도 없어지고 말았다. 함께 풀을 벨 사람도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병원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서 더욱 악착같이 날품팔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원을 가꿀 시간 따위는 없었다.

16590716053278.jpg“아버지! 어머니!”

혹여 아버지의 건강이 정원을 가꿀 수 있을 만큼 좋아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델라는 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얼른 제 눈으로 나아진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16590716053278.jpg“아버지! 어머니!”

방문한다는 전갈을 미리 보내서인지,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에델라는 그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16590716006144.jpg“오! 에델라!”

낯선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에델라는 그대로 복도에 우뚝 멈춰 섰다.

16590716053278.jpg“누구…… 신가요?”

낯선 목소리일 뿐만이 아니라, 낯선 얼굴이었다. 예로니아 저택을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델라는 그 남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16590716006144.jpg“이런, 날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 나도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널 못 알아봤을 거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랐을지 몰랐으니까 말이다.”

16590716053278.jpg“절 아시나요?”

16590716006144.jpg“물론이지. 내 조카를 모를 리가 있나!”

16590716053278.jpg“조카요?”

남자의 말에 에델라는 눈을 깜박였다. 예로니아 집안에는 자신을 조카라고 부를 남자는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예로니아 백작의 사후에 작위가 그 사람에게 갈 테니, 에델라가 테라비스에게 계약을 제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어머니 쪽이었다. 에델라는 거리가 멀어서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한 외삼촌 중에 이렇게 젊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거의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16590716053278.jpg“설마…….”

에델라는 기분 나쁜 예감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16590716053278.jpg“제 외삼촌이신가요?”

16590716006144.jpg“그렇단다.”

16590716053278.jpg“혹시, 막내 외삼촌이신가요?”

16590716006144.jpg“맞아! 혹시 날 기억하는 거니?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봤는데 말이야!”

에델라가 자신을 기억하는 듯하자, 벨본은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 마치 아주 반갑다는 듯이.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에델라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16590716053278.jpg“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16590716006144.jpg“당신이라니? 그렇게 남처럼 부르지 말고, 벨본 외삼촌이라고 부르렴.”

16590716053278.jpg“…….”

벨본의 뻔뻔한 태도에 에델라는 할 말을 잃었다. 남이라면 더 좋았을 사람이었다. 외삼촌이라는 이름은 가당치도 않았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에델라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인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외삼촌이라고 부르라니?

16590716006144.jpg“자,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예로니아 백작님과 누님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16590716053278.jpg“아버지와 어머니께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죠?”

16590716006144.jpg“내가 무슨 짓을 하겠니? 갈 곳 없는 나에게 친절하게도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라고 해주신 고마운 분들이신데 말이야.”

16590716053278.jpg“뭐라고요?”

에델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16590716053278.jpg“아버지! 어머니!”

에델라는 거의 그를 밀치듯이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저 남자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사기꾼에다가 거짓말쟁이니까.

16590716006144.jpg“오! 에델라 왔니?”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에델라를 보자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딸을 보자 저절로 나오는 환한 웃음이었다.

16590716053278.jpg“밖의 저 사람은 누군가요?”

이미 벨본에게서 누군지 충분히 들었지만, 에델라는 어머니에게 확인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에 물었다.

16590716006144.jpg“아…….”

에델라의 질문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16590716053278.jpg“그 사람이죠?”

16590716006144.jpg“…….”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6590716053278.jpg“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에델라의 질문에는 수많은 질문이 응축되어 있었다. 왜 그를 예로니아 저택에 들인 것인지, 왜 그를 내쫓지 않았는지, 왜 그를 이곳에 머물도록 허락한 것인지.

16590716006144.jpg“벨본이 미안하다고 말을 하더구나. 자신이 너무 철이 없었고, 순간 너무 무서워서 그랬다고 말이야.”

조금 주저하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딸에게 다가왔다.

16590716006144.jpg“나와 네 아버지는 벨본을 용서하기로 했단다. 물론, 너도 그러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자비로운 그녀의 목소리에서 에델라는 깨달았다. 자신의 부모님은 착했다. 자신들의 인생을 망친 사람을 너무도 쉽게 용서할 정도로, 지나치게 착했다. 그래서 당한 것이었다.

16590716053278.jpg‘내가 지킬 거야.’

에델라는 고개를 돌려 복도 저편에 있을 악당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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