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루젠타의 밤2021.12.31.
“…….”
마틴의 말을 들은 로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로즈가 여자라는 것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로즈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당연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미 마틴과 로즈는 꽤 가깝게 붙어 있었다. 춤을 추기 위해서 자세를 잡은 뒤였으니까. 하지만 그 간격을 더욱 좁혀오며, 마틴은 입을 열었다.
“에몬테 님은 그냥 여자가 아니라 아주 멋진 여자입니다.”
여전히 표정은 별로 없었고, 목소리는 브리핑을 하듯이 딱딱했다. 그래서 더 진실해 보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로즈에게 미쳤다고 할지도 몰랐다. 자신 역시 이제껏 그랬으니까. 로맨스를 말하는 주제에 언제나 무표정했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항상 한 톨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틴의 진심을 의심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 변화 없는 표정과 목소리가 진짜라는 것을 로즈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 맞습니까? 에몬테 님이 말씀하신 행동이요.”
그저 이 남자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툰 것뿐이라는 것도.
“네. 맞아요.”
로즈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 남자의 처음이 자신이라는 것이 유쾌했다.
“그럼 이제 춤을 춰볼까요?”
“저 춤 못 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뭐 어때요. 누가 춤은 어떻게 추는 거라고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로즈는 마틴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 . .
“다들 재밌어 보이네.”
한쪽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에델라에게 샴페인 한 잔을 가져다주며 테라비스는 말했다.
“특히, 저기가?”
테라비스는 알 수 없는 춤을 선보이고 있는 남자 3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마치 진흙탕에 빠진 멧돼지라도 되는 듯이 뭔가 질척거리는 춤을 추고 있었다.
“저기도?”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다른 방향은 마틴과 로즈였다. 이런 자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저 멀리에서 호위를 보고 있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던 로즈는 의외로 제법 경쾌한 몸놀림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에 반해 마틴은…….
“저건 꼭두각시 춤 같은 건가? 아니면, 저주에 걸린 목각인형? 아! 인간으로 변신한 염소 새끼를 표현하는 전위예술일 수도 있겠군. 그러면 이해해줘야지. 두 발이 처음일 테니까 말이야.”
“풉!”
제법 심각한 테라비스의 평가에 에델라는 순간 마시고 있던 샴페인을 분수처럼 뿜을 뻔했다.
“부단장님께 실례되는 말이잖아.”
“내가? 저 춤이 악단에게 더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 저 악단이 얼마짜리 악단인데? 저 중에 첼로 연주자는 무려 왕실예술단에 있는 선생에게 배운 사람이라고. 어느 왕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재밌으면 된 거지. 직원들에게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재밌게 즐기다가 가라고 했다며.”
“왜 이렇게 관대해? 나한테 춤을 알려줄 때는 그렇게 깐깐하게 굴더니?”
“내가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굴었다고 그래?”
“엄청나게 깐깐했어. 발과 팔의 각도, 보폭, 악력까지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지적했던 것 기억나지 않아?”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조용히 샴페인을 마셨다. 테라비스에게 춤을 가르쳐 준 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좋아. 그럼 깐깐하게 배운 춤 솜씨를 한번 뽐내봐야겠군.”
마시던 잔을 옆에 내려놓고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부인, 부디 저와 함께 한 곡 춰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정중해진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는 피식 웃었다.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춤 예절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게 알려준 것 같았다.
“그럴까요?”
에델라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테라비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테라비스와 에델라가 홀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직원들은 환호성과 웃음을 함께 그들에게 보내주었다. 그 소리를 들은 테라비스와 에델라의 얼굴에는 더욱 큰 웃음이 감돌았다.
“우~! 너무 완벽한 거 아닙니까?”
“단장님, 멋있어요! 사모님, 예뻐요!”
유치한 찬사와 휘파람 소리, 그리고 뜻 모를 야유와 감탄이 뒤섞인 가운데서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춤을 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발걸음과 스치듯 지나가는 친밀한 사람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오는 눈인사, 숨겨둔 뾰족한 뜻 따위는 없는 선의의 목소리들. 춤은 제멋대로였고, 예의나 예절도 없는 무도회였지만, 에델라는 이제껏 가보았던 무도회 중에서 오늘이 가장 즐거웠다. 테라비스 역시 그랬다. 아무런 야망이나 목표도 없이, 잘 보이고자 하는 사람도 없이, 제 돈을 들여서 하는 오늘의 무도회가 가장 행복했다.
“한 곡 더 어때?”
음악이 끝나가는 것 같자, 테라비스는 고개를 숙여 에델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에델라는 흔쾌히 대답했다. 환하게 웃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 역시 미소를 지었다.
“에델라.”
조금 전보다 좀 더 에델라의 귓가에 입을 바싹 붙이며, 테라비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저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부르고, 테라비스도 이제껏 많이도 불렀던 이름. 하지만 조금 전 테라비스의 부름에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엄격한 테라비스의 춤 선생이 스텝이 꼬여버릴 정도로 동요했다.
“이런, 조심해.”
에델라가 잠깐 휘청거리자, 테라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어릴 때 걸음마를 열심히 배우지 않은 모양이야? 귀족들은 그런 건 안 가르쳐 주나?”
테라비스는 키득거리는 것과 농담을 동시에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눈으로 흘기며 다시 뒤로 조금 떨어지려고 했다. 춤추기에 적당한 간격으로. 하지만 테라비스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려는 에델라를 더욱 단단하게 붙들었다.
“에델라.”
테라비스가 다시 에델라의 이름을 불렀다. 부름에 응하듯 에델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조금 전에 에델라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보였던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테라비스의 눈에 보인 것은 진지함과 에델라가 잘 모르는 어떠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뜨거웠고, 어딘지 모르게 에델라의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 밤이 무슨 날인지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어.”
작은 목소리로 테라비스가 속삭였다.
“무슨 날이라니? 실패 기념 파티의 날이잖아?”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게 정답이 아님을 에델라도 알았다. 누구나 알만한 질문을 테라비스가 굳이 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것 말고 훨씬 사적인 날이야.”
속삭이는 테라비스의 목소리에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 먹을 것을 앞에 둔 것도 아닌데?’
에델라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그래. 맞아.”
에델라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을 읽어낸 테라비스는 씩 웃었다. 그녀의 당황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해서였다.
“오늘은 도망치지 않기를 바라.”
‘오늘은?’
테라비스의 힌트 아닌 힌트에 에델라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달았다. 아니, 오늘 밤이 무슨 밤인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터였다.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7일의 밤 동안 손을 잡았고, 7일의 밤 동안 포옹을 했고, 7일의 밤 동안 키스를 했다. 바로 어제가 7번째 키스의 밤이었다.
“테라비스.”
에델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테라비스도 그것을 알았고, 에델라도 그것을 알았다.
“오늘은 도망치지 않아.”
에델라는 고개를 들어 테라비스를 바라보았다. 에델라의 대답을 들은 순간, 테라비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에델라가 잘 모르는 그 감정이 조금 더 진해졌다. 어떤 이는 욕망이라고 부를, 또 어떤 이는 정념이라고 부를, 또 어떤 이는 애정이라고 부를,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감정이었다.
“그래.”
테라비스는 그저 짧은 대답만을 하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계속 에델라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파티고 나발이고 그녀를 번쩍 안아다가 침실로 가버릴 것 같아서였다. 자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뻔뻔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델라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자신을 또렷이 바라보는 파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달콤한지 이미 알고 있는 붉은 입술을 보고 있지 않으면,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길었다. 테라비스는 오늘 밤은 그것보다 더 길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