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아름다운 레이디2021.12.27.
“아, 아니, 이게, 이걸, 이렇게!”
비에라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서류를 닦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커피에 잉크가 번진 데다가, 커피가 스며들어 종이는 누렇게 변한 뒤였다. 닦는다고 닦아질 것이 아니었다.
“비에라 자작님.”
샤를리안은 소용없는 짓을 하는 비에라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무래도 불길하군요.”
“네?”
“거래가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서류가 이렇게 된 것을 보니, 영 꺼림칙합니다. 게다가 저희 교역 품목에는 원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커피를 쏟아서 이렇게 된 것을 보니, 뭔가 교역을 하지 말라는 계시 같군요.”
“그, 그런 것은 미신이 아닙니까?”
비에라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분명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던 엔젤로테 백작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고의로 커피를 쏟더니, 불길하다며 거래를 하지 않으려고 하다니?
“제가 미신을 좀 믿는 편이라서요.”
샤를리안은 숫제 빈 커피잔을 더러워진 서류 위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이번 거래는 없던 일로 해야겠습니다.”
“잠시만요, 엔젤로테 백작님!”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샤를리안을 비에라는 황급히 붙들었다.
“서류야 다시 작성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침착하게 샤를리안을 설득하려 들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잡은 비에라의 손을 보던 샤를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비에라 자작님께서는 조금…… 끈기가 있으신 타입이신 것 같군요.”
끈덕지다는 말을 돌려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거래가 무산되려는 상황 때문에 공황에 빠진 비에라는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의 조건으로도 부족하시다면 제가 더 최대한 조건을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에라는 지금도 제법 파격적인 조건이었음에도, 더 저자세로 딜을 걸어왔다. 여기서 더 엔젤로테 상단에 유리하게 조건을 변경한다면 한다면 오히려 비에라 상단은 손해가 날 수도 있었지만, 비에라는 지금 다급했다. 안다비아와의 거래를 성사시켜, 붉은바람 상단이 더는 쫓아오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물론 조금 전에 샤를리안에게 말했던 비열하고 추잡한 계획들도 비에라는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비에라는 붉은바람 상단이, 테라비스가 자신에게 감히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샤를리안 역시 자신을 버린 여인에게 복수하고 싶을 것이라고, 그녀의 남편인 테라비스가 가진 상단을 망하게 만들고 싶어 할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비에라처럼 치졸하고, 좁은 속을 가진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비에라 자작님, 제가 왜 붉은바람 상단과 거래를 하지 않으려 했는지 아십니까?”
“그야, 거기가 천한 평민이 만든 하잘것없는 상단이라서겠지요.”
“제 기준에서 비도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이해합니다. 그것들이 그렇죠. 비도덕적이고, 천박하고, 무례하고. 저희 같은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들이니까요.”
“죄송합니다만, 비에라 자작님 역시 제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네?”
순간, 비에라는 샤를리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자기가 들은 이야기가 맞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자신에게 기준미달이라고 이야기를 한 건가?
“저희 엔젤로테 상단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일하는 상단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곳과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백작님?”
순식간에 비도덕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된 비에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이제껏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또한 저는 정정당당하게 이기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비열한 흉계를 쓰거나, 눈앞에 사람이 없다고 해서 비겁하게 뒷담화를 하는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습니다.
샤를리안의 표정은 온화했고, 은은한 미소마저 띠고 있었지만, 그의 입술과 혀에서 나오는 말은 차디찼다.
“돌아가시는 길은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요? 루젠타 분이시니까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비에라에게 꺼지라는 말을 돌려 말하곤, 샤를리안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에델라에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라는 것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홀을 꾸밀 꽃을 정원에서 손수 골라서 예쁘게 꽃꽂이하고, 주문해놓은 음식을 찾아오라고 지시를 내리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 했다. 테라비스는 직원들을 위한 작은 파티라고 했지만, 처음으로 파티를 준비하는 에델라로썬 그게 작은 일이 아니었다.
“다 됐나?”
“다 되긴요.”
홀을 둘러보는 에델라에게 핀잔을 준 것은 녹스였다.
“마님께서 아직 준비가 안 되셨잖아요.”
“아! 맞아!”
아침부터 뛰어다닌 탓에 에델라는 정작 자신이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 어서요.”
녹스의 손에 이끌려 에델라는 부랴부랴 씻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했다. 직원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보니 다른 무도회에 갈 때처럼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에델라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예쁜데?”
일찍 집으로 돌아온 테라비스 역시 그것을 알았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이 정말 예쁘네요. 사모님도요!”
“음~ 맛있는 냄새! 벌써 기대가 되네요.”
홀에 들어선 직원들 역시 한껏 꾸민 차림새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보통의 직원들은 무도회에 참석할 일이 없었다. 결혼식이나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가 아니면 춤을 출 일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요리사가 하는 음식이나 비싼 디저트, 그리고 바가 있는 곳에서 술을 먹는 일 역시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오늘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려한 저택과 홀에 감탄했으며, 처음 보는 요리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애석하게도 홀의 한쪽에 자리한 악단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오늘 온 직원들은 전부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재밌게 즐기세요.”
“저기 바텐더가 보이지? 얼마든지 마셔. 음식도 실컷 먹으라고.”
“파우더룸은 홀 밖에 오른쪽에 있어요.”
“오! 자네! 수고 많았어! 에델라, 인사해요. 우리 상단에서 아주 중요한 회계를 맡은 조안이에요.”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바로 온 사람도 있었고, 집에 다녀온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홀에서 가까운 방에 마련한 파우더룸에서 치장하는 중인 사람들도 있어서 다행히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덕분에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네고, 즐기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얼추 다 온 것 같은데 우리도 들어가 볼까요, 부인?”
홀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몇 분간 없자,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눈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계속해서 인사를 한 터라 목도 조금 축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에델라와 함께 춤을 추고 싶었다. 사실, 테라비스의 그런 사심이 조금 들어가 있는 파티이기도 했다.
“아, 저기 누가 오는데요?”
테라비스를 따라 입구 근처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에델라는 복도에 얼핏 보이는 인영에 발을 멈췄다.
“여자분이 한 분 오시는데요.”
“아, 그래요? 누구지?”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고개를 빼고 누가 오는지를 보았다.
“어?”
테라비스는 뜻밖에 사람, 아니 정확하게는 뜻밖의 차림을 한 사람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에몬테 님.”
그녀를 먼저 알아본 것은 에델라였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와주셔서 더욱 감사하고요.”
“그래요? 전 너무 어색한데.”
“어머, 왜요? 이렇게나 예쁜데요.”
로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무도회이니 당연한 차림이었지만, 항상 바지에 셔츠, 그리고 경량 보호구를 한 모습만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모습이었다. 벌써 그녀를 알아본 직원들이 술렁술렁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요. 에몬테 님. 잘 어울립니다.”
처음에는 놀랐던 테라비스였지만, 이내 함박웃음으로 그녀를 환영했다.
“술과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드시고, 흥겨우면 춤도 추며 즐겁게 보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로즈는 제법 그럴듯하게 무릎을 숙여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올~ 뭐야, 로즈 에몬테! 여자였어?”
“오늘 무도회가 가장무도회였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내가 맨손으로 잡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왔지!”
제일 먼저 로즈에게 다가온 것은, 붉은바람 상단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놀림 반, 놀라움 반의 말을 로즈에게 건네며 그녀의 쪽으로 걸어왔다. 로즈는 웃으며 저 인간들의 명치에 한방을 꽂아 넣어서 몸을 반으로 접게 해줄까, 정강이 후려 차서 예쁜 무늬를 만들어줄까를 고민했다.
“실례합니다.”
아쉽게도 그 둘 다 로즈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로즈를 놀리기 위해서 걸어오던 용병 둘과 로즈의 사이에 한 사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단장님?”
무도회라고는 하지만 혹여 직원들이 부담스러울까 봐 테라비스는 옷을 꼭 갖춰 입지는 않아도 된다고 전달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깔끔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마틴은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제가 아름다운 레이디께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마틴은 매우 정중하게 로즈에게 춤을 청했다.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위무사 둘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눈을 끔벅거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럴까요?”
원래라면 들어오자마자 곧장 바텐더에게 걸어갈 예정이었던 로즈였지만, 흔쾌히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틴의 손에 로즈가 손을 얹자, 그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로즈를 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리고 살짝 주저하긴 했지만, 로즈의 허리에 손을 얹는 데도 성공했다.
“…….”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부단장님?”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마틴을 로즈가 부를 때까지, 그는 계속 굳어 있었다.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과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지만, 로즈는 마틴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미묘한 당황스러움을 읽어냈다.
“저, 춤 못 춥니다.”
그의 고백에 이제는 로즈가 당황할 차례였다.
“춤을 못 춘다고요?”
“네.”
“춤을 못 추는데 왜 춤을 추자고 하셨어요?”
“그야, 저 신사분들이 에몬테 님께 춤 신청을 하려는 것 같아서요. 제가 춤을 못 추긴 하지만, 다른 남자랑 에몬테 님이 춤을 추는 꼴은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끼어들고 본 겁니다.”
마틴은 눈으로 로즈를 놀리기 위해서 다가오던 호위무사들을 가리켰다.
“그러려고 저한테 오는 게 아니었을걸요?”
“맞을걸요?”
마틴은 제법 강경하게 대답했다.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못 들으셨나 봐요?”
“못 듣긴 했습니다.”
“저한테 여자 분장을 하고 왔냐고 물어보던데요.”
로즈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정도 농담은 흔쾌히 받아줄 수 있었다. 여자라고 동료 취급을 하지 않으려는 작자들에 비하면, 그런 농담은 오히려 친근함에서 나오는 농담이었으니까. 실제로 저들은 로즈와 친한 동료였다. 아마 저들도 저 농담을 하면 로즈에게 걷어차일 것까지 알고 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어때요? 드레스를 입으니까 그럴싸하게 여자로 보이죠?”
로즈는 오히려 제가 한술 더 떠 치맛자락을 펼쳐 보이며, 마틴에게 물었다.
“아뇨.”
치맛자락을 잡은 로즈의 손을 마틴이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치마나 바지는 상관없습니다. 저한테 에몬테 님은 항상, 언제나 여자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