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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은밀한 거래 (68/92)

68화. 은밀한 거래2021.12.24.

  루젠타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칸테야.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 안에서는 그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잠깐씩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술을 따르는 소리와 그것을 마시는 소리뿐이었다. 꽤 독한 술이었건만 샤를리안은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한 정신 속에서 에델라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아름답고 화사한 미소를 띤 채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던 에델라가.

16590715501486.jpg“…….”

샤를리안은 또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마셨다. 술은 그리 쓰지 않았다. 제 속이 이미 쓰라려서일 것이라고 샤를리안은 짐작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샤를리안은 잔을 채우려던 손을 멈췄다.

16590715501486.jpg“무슨 일이지?”

16590715501499.jpg“비에라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에 샤를리안은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비에라 자작과 약속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그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미처 모르고 있었다.

16590715501486.jpg“바로 나가지.”

샤를리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나가기 전, 술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박하 향이 나는 물로 입을 헹구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90715501486.jpg“어서 오십시오, 비에라 자작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비에라 자작과의 약속을 잊고 있었지만, 샤를리안은 비에라 자작을 보자 악수를 청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노라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비에라는 샤를리안의 말에 활짝 웃었다.

16590715501486.jpg“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안다비아에서 가지고 온 좋은 커피도 있습니다.”

16590715501499.jpg“아, 그럼 그 유명하다는 안다비아 커피로 하겠습니다.”

비싸고 귀한 커피를 대접하겠다는 말에 비에라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엔젤로테 백작이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보면 오늘 대화의 결말이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끝날 것 같았다.

16590715501499.jpg“커피 냄새가 참 좋군요.”

시종이 커피를 내리는 모양새를 보며 비에라 자작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윽한 커피 향이 방 안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16590715501499.jpg“이런 귀한 것을 루젠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에라는 은근히 자신의 방문목적을 드러냈다. 그의 말에 숨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를리안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16590715501499.jpg‘바넬레오 놈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요즘 젊은것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니깐.’

샤를리안의 미소에 비에라는 습관적으로 마주 보고 웃긴 했지만,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살짝 애가 타고 있었다.

16590715501486.jpg“드시지요.”

손님께 샤를리안이 먼저 커피를 권하자, 비에라는 조심스럽게 새까만 색깔의 액체가 가득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16590715501499.jpg“커피 향이 참 좋군요.”

비에라는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했다. 굳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까닭은, 이 쓰기만 한 액체를 먹어야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사실 비에라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 쓴 것이 뭐가 맛있다고 먹는 것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커피를 즐기는 척을 해야 했다. 엔젤로테 상단으로부터 커피 교역권을 따내려면 말이다.

16590715501499.jpg‘에잇! 으윽!’

비에라는 혼신의 기합을 넣어서 커피를 마셨고, 곧이어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이렇게 쓴 것을 좋다고 마시는 놈들은 참으로 변태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안다비아 커피를 들여오게 된다면, 돈줄이 되어줄 사랑스러운 변태들이 되겠지만 말이다.

16590715501499.jpg“커헉흠! 피 맛이 참 좋군요.”

쓴 것을 갑자기 마셔서인지 갑자기 침샘에서 침이 쏟아져나와 비에라는 커피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간신히 그렇게 말하고, 간신히 미소 짓는 비에라를 보며 샤를은 생각했다.

16590715501486.jpg‘거짓말쟁이로군.’

비에라의 입가는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샤를리안은 그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16590715501486.jpg‘적어도 그자는 저런 티는 내지 않았는데 말이야.’

샤를리안은 조금 굳은 티가 나는 것 말고는 표정 관리를 잘했던 테라비스를 잠시 떠올렸다. 아무래도 눈앞의 비에라 자작은 그보다는 한 수 아래인 듯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샤를리안은 비에라와는 달리 그 안에 있는 고소함과 풍부한 산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끝에 감도는 과일 향을 느꼈다. 술보다 훨씬 나았다. 그보다 훨씬 향긋했고, 충분히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술과는 정반대로 절대 잠을 이루지 못할 테지만.

16590715501499.jpg“어떻습니까, 백작님. 제가 한 제안은 생각해보셨습니까?”

샤를리안이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던 비에라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16590715501486.jpg“아, 그 제안이요?”

샤를리안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16590715501486.jpg“네. 검토해보았습니다.”

샤를리안은 붉은바람 상단을 대신하여 비에라 상단과 거래를 할 예정이었다. 일단 다른 이유보다도 이전에 엔젤로테 가문과 거래를 했던 이력이 있다는 것에 가산점을 두었다. 비록 과거에는 그리 끝이 좋지 못했지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뒤였고, 비에라 상단만큼 안다비아 교역에 대해서 잘 아는 상단은 루젠타에서 드물었다. 물론, 붉은바람 상단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16590715501486.jpg“저희 쪽에 유리한 조건을 많이 제시해주셨더군요.”

16590715501499.jpg“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16590715501486.jpg“그 서류를 가지고 오도록.”

샤를리안이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시종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조금 전까지 샤를리안이 있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16590715501499.jpg“서류라고 하심은……?”

웃음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끌어내리며 비에라가 물었다.

16590715501486.jpg“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보내주신 제안에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보았고, 결론 또한 긍정적으로 내렸습니다.”

16590715501499.jpg“그, 그럼!”

비에라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샤를리안 역시 미소로 대꾸해주었다.

16590715501499.jpg“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백작님! 역시나, 그런 근본 없는 상단이 아니라 저희 상단을 택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그런 곳과 거래를 하신다면 백작님의 위신이 떨어졌을 겁니다.”

비에라의 말에 막 커피잔을 다시 집으려던 샤를리안의 손이 멈칫했다.

16590715501486.jpg“그런 곳이라니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샤를리안은 비에라에게 물었다.

16590715501499.jpg“당연히 그 붉은바람인지 뭔지 하는 천박한 상단을 말씀드리는 거지요.”

그리고 비에라 역시 덥석 물었다.

16590715501499.jpg“요즘은 개나 소나 다 상단을 운영한다고 설치고 다니는데, 이게 어디 될법한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상단이 무슨 구멍가게나 시장 노점상도 아닌데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생계가 달리고, 나라 경제의 근간이 되는 일인데 근본도 없고, 지식도 없는 놈들이 돈만 보고 천박하게 달려드니 참으로 말세입니다, 말세. 쯧쯧.”

16590715501486.jpg“그렇죠.”

샤를리안은 자신이 짐작한 것이 맞자, 대충 대꾸하며 넘어가려 했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험담이나 하는 비에라가 더욱 천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16590715501499.jpg“더 말세인 것은 귀족이면서 격 떨어지게 그런 자들과 어울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그런 작자와 결혼을 하는 귀족 영애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평민과 결혼하는 귀족은 흔치 않았으며, 상단을 운영하는 평민은 더더욱 없었다. 비에라의 발언이 명백하게 에델라를 두고 하는 말임을 샤를리안은 알아차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비에라 자작은 빙긋이 웃었다. 내 말에 백작님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시냐는 눈빛이었다. 비에라는 자신의 아내에게서 그날 밤 무도회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었다. 에델라가 제 남편의 편을 들며 나타난 것도, 제 편을 들어준 아내를 위해서 뺨을 내어준 테라비스의 이야기도. 거기에 비에라는 자신이 보았던 샤를리안의 애처로운 눈빛을 더하자 그럴듯한 이야기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16590715501499.jpg‘에델라, 그 바보 같은 여자가 돈에 눈이 멀어서 참으로 아까운 짓을 했지. 이런 남자를 두고 그런 놈과 결혼하다니 말이야.’

한 쌍의 커플과 맺어지지 못한 한 명의 남자. 비에라가 추측해낸 결말은 거의 정확했다.

16590715501499.jpg“솔직히, 순수혈통의 귀족으로서 그런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상단은 귀족이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제를 모르는 평민 것들이 아니라요.”

16590715501486.jpg“저도 그것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규제하신다는 말씀이신지요?”

16590715501499.jpg“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지요.”

제가 한 말에 샤를리안이 흥미를 보이자 비에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590715501499.jpg“일단 상단은 신속, 정확이 생명 아니겠습니까?”

16590715501486.jpg“그렇죠.”

16590715501499.jpg“그쪽 상단에서 자주 약속을 어기고, 실수를 하게 되면, 당연히 신뢰는 바닥에 떨어지게 되겠지요.”

16590715501486.jpg“아무리 평민이 운영하는 상단이라고 한들, 그런 기본도 못 할까요?”

16590715501499.jpg“부득이하게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지요.”

16590715501486.jpg“부득이하게요?”

16590715501499.jpg“그렇습니다.”

샤를리안이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비에라를 쳐다보자, 그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더불어 이 잘생긴 미남자와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바다 건너의 외국인일지라도 역시 귀족끼리는 말이 통하는 법이라며.

16590715501499.jpg“예를 들면, 그쪽 상단 창고에 쥐 떼가 나타난다든가, 도둑이 들어 물건을 훔쳐 간다거나, 중요한 서류를 소매치기당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쪽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이 예를 들면 이지, 자신이 그렇게 만들겠다는 말이었다. 비열하게 웃는 비에라의 얼굴에서 샤를리안은 그의 의도를 읽어냈다.

16590715501486.jpg“그런 상황이라면 확실히 거래처와의 약속을 지키기는 어렵겠군요.”

샤를리안은 그의 말에 동조하는 척을 하며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에 담긴 검은 액체보다 눈앞에 남자의 속내가 더욱 시꺼멨다.

16590715501499.jpg“그렇죠. 거기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다거나, 해적이라도 만나 배가 침몰이 되면 더더욱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비에라의 말에 샤를리안은 말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늘 향긋하던 커피 향이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고소함과 산미, 과일 향도 마찬가지였다. 입안을 깔끔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했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불행을 이야기하고, 그런 계략을 꾸미고, 심지어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이 타고 있는 배를 침몰시킨다고 이야기하는 작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자신은 도대체 뭘 얻기 위해서 루젠타로 왔단 말인가?

16590715501499.jpg“여기 있습니다, 백작님.”

서류를 가지고 온 시종이 샤를리안에게 내밀자, 비에라가 눈을 빛냈다. 샤를리안이 서류를 펼쳐 테이블 위에 놓자 비에라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제 서명만 하면, 그 꼴 보기 싫은 바넬레오 놈을 누르고 자신이 엔젤로테 상단과 거래를 따내게 되는 것이었다.

16590715501499.jpg“어, 어엇! 으악!”

싱글벙글하던 비에라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곧이어 비명이 쏟아져나왔다. 샤를리안이 들고 있던 커피잔을 갑자기 뒤집은 까닭이었다. 정갈한 글씨로 작성되어 있던 서류는 순식간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16590715501486.jpg“이런, 손이 미끄러졌군요.”

샤를리안은 마치 실수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커피잔을 완벽하게 뒤집어서 들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쏟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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