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실패 기념 파티2021.12.20.
마틴은 단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반응이 없자, 다시 두드렸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테라비스가 조금 전에 단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마틴이 똑똑히 보았는데 말이다. 단장의 조용한 침묵을 예의상 존중하여 되돌아갔다가 다시 올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시간을 더욱 존중하여 이대로 문을 열 것인지 마틴은 고민했다. 한 0.3초 정도.
“실례하겠습니다.”
마틴은 테라비스보다는 본인을 존중하기로 했다. 사실, 마틴의 결론은 늘 그랬다. 0.3초가 최대한의 예의였다. 단장실의 문을 연 마틴의 눈에 보인 것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테라비스였다. 그는 마틴이 노크를 한 것은 물론이고, 지금 단장실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장님.”
“응? 아? 어? 아!”
더 가까이 다가가 마틴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테라비스를 부르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마틴을 쳐다보았고, 마틴이 자기 옆에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테라비스는 조금 전까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에델라와의 키스를 떠올리는 중이었다. 어제의 키스는…… 뭔가 특별했다. 뭐가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딱 꼬집어서 대답할 수는 없지만, 테라비스의 느낌은 그랬다. 그래서 그 뭔가가 뭔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어제의 키스를 반복해서 떠올려보는 중이었다. 몸은 상단의 단장실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에델라와 함께 침실에 있었던 테라비스는 갑자기 마틴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어떤 거지?”
일 이야기에 테라비스는 눈을 또렷이 하며 마틴이 건넨 보고서를 받았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마틴의 깔끔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안다비아 교역 무산에 따른 손해 명세와 하반기 계획 차질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더불어 올해 목표 이익 수치를 변경해야 할 것 같다는 의견도 첨부했습니다.”
“그렇군.”
테라비스는 마틴이 말한 내용이 적혀 있는 보고서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나중에 다시 꼼꼼하게 보긴 할 테지만, 대략적인 수치는 바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손해가 큽니다.”
“비용적으로는 그리 큰 액수는 아닌데?”
테라비스는 마틴이 적어놓은 손해비용의 합계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했다.
“금액적인 부분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가장 문제는 하반기 대형 프로젝트가 없어졌다는 거겠죠. 지난번 보석상 입찰 건도 따내지 못했는데, 안다비아 교역권까지 무산되었으니, 올해는 신규거래가 전혀 없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그런 때도 있는 거지. 당분간 기존 사업에 집중하자고.”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틴은 그런 테라비스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매우 의외였다. 교역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에 분해서 날뛰거나, 보는 눈이 없는 것들이라며 엔젤로테 상단에 욕을 퍼부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직원들은 어때? 실망하지는 않아?”
“좀 기운 빠져 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군.”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파티를 열까 해.”
“네?”
“거래실패 기념 파티.”
“네?”
실패 기념 파티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파티 이름이었다. 보통은 성공 축하, 혹은 승리 기념 파티이지 않은가? 그런데 실패를 기념하기 위한 파티라니?
“…….”
마틴은 자신의 단장이 정말 제정신일까 싶은 생각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대형 프로젝트가 무산된 탓에 미쳐버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때 엔젤로테 백작이 거래하지 않기로 하면서 뭔가 심한 말을 한 것일까?
‘설마……. 누가 자기한테 무슨 말을 한다고 기가 죽거나, 순순히 수긍할 사람이 아닌데?’
마틴은 수상쩍은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제 상관을 보았다.
“직원들 사기도 올릴 겸, 좀 규모가 큰 회식인 거지.”
“회식한다고 직원 사기가 올라갈 리가…….”
회식으로 사기가 올라갈 리가 없다고 단언하려던 마틴은 머릿속에 회식으로 사기가 올라갈 사람이 생각나 버리자 말을 채 마칠 수가 없었다. 그 회식에 술이 가득하다면, 로즈는 환영할 게 틀림없었다.
“회식만으로 부족하다면 간단한 시상 같은 것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상품이나 상금 같은 걸 걸고. 휴가권 같은 것도 괜찮겠군.”
“그건 나쁘지 않죠.”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로 하지. 일은 일찍 마치도록 해. 가능하면 오전 근무만 하는 것도 괜찮고.”
“그렇게 일찍이요?”
“일찍 시작해서 일찍 가고 싶은 사람은 일찍 보내자고. 물론 더 놀고 싶은 사람은 놀고.”
테라비스의 말에 마틴은 가장 마지막까지 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장소는 우리 집으로 하지.”
“단장님 댁이요?”
“홀도 있고, 주방장도 있으니까. 뭐, 정원 파티 같은 것도 괜찮고.”
“그런 것 해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테라비스는 당연한 것을 뭘 묻냐는 듯이 딱 잘라서 대답했다.
“하지만 몇 번 가봤거든. 그리고 앞으로 계속 사업을 하다 보면 내가 주최할 일도 있을 것 같으니, 그 처음을 직원들이랑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마틴이 지금 준 보고서에 따르면 분명 올해의 목표이익 달성은 어려워 보였다. 그의 말대로 안다비아와의 거래실패로 비용적 손해가 있었고, 하반기의 일정이 어그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틴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테라비스가 최근 2건의 무도회에서 야금야금 인맥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무언가가 없어서 부단장인 마틴과 의논하지는 못했지만, 테라비스는 곧 그 인맥을 활용하여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안다비아와의 교역을 대신하여 하반기 매출을 껑충 뛰게 할 밑그림을 천천히 그려가고 있었다.
“일단 직원들에게 그렇게 전해. 아, 참가는 자유라고 꼭 말하고.”
테라비스는 다시 마틴의 보고서를 펼치며 말했다. * * *
“계약실패 기념 파티?”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델라가 그리 많은 파티에 참석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패를 기념하는 파티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보통 실패는 기념하지 않잖아?”
“난 하려고.”
테라비스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에게 안다비아 교역 실패는 충분히 기념할만한 실패였다. 붉은바람 상단으로서는 실패였지만, 테라비스 개인으로 보자면 성공일 수도 있었다. 그의 아내가 처음으로 그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말해주었으니 말이다.
“일단 그렇게 말해놓긴 했는데, 만약 당신이 불편하다면 다른 장소를 물색해보도록 할게.”
“아니, 난 괜찮아.”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얼른 사양했다. 조금 기괴한 파티라는 생각은 했지만, 테라비스가 자기 집에서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자신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금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은 뭘 하고 싶어?”
“내가 뭘 하고 싶냐고?”
“응.”
뜻밖의 질문이었다. 분명 조금 전에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하는 파티라고 해놓고선, 왜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 걸까?
“당신도 엄연히 우리 상단의 일원 중 한 명이잖아.”
“내가?”
“잊었어? 우리 전속 번역가가 되기로 한 것.”
“하지만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잖아.”
“엔젤로테 상단과 성사가 되지 않은 거지. 안다비아에 어디 상단이 거기 하나만 있겠어?”
“그럼 다른 상단과 접촉해볼 생각인 거야?”
“물론이지.”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두 번의 실패로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그는 이미 수많은 실패를 겪었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고 절망하지 않았기에, 그보다 많은 성공을 일궈낸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집에서 파티를 연다면, 당신이 안주인이니 당연히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
테라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 번 더 못 박았다.
“자, 에델라. 뭘 하면 재밌을 것 같아? 아니면 음식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그는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에델라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티파티는 재미없겠지?”
“미안하지만, 그건 기각이야. 우리 직원들은 술 파티를 훨씬 좋아할 거야.”
첫 의견이 기각당하자 에델라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에델라는 파티에 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서 가본 것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의 파티라고 하면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과 무도회 2번이 전부였다.
“그럼 무도회?”
그러니 아는 것을 말하는 수밖에.
“춤추고 싶은 거야?”
“아니, 꼭 내가 춤을 추고 싶은 것은 아니고…….”
살짝 말꼬리를 흐렸지만, 사실 에델라는 춤추는 것이 재밌었다. 특히나 테라비스와 함께 춤을 출 때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와 춤을 출 때보다 예쁜 드레스를 입어서일 수도 있었고, 혼자 출 때보다 근사한 음악이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어쨌든, 즐거웠다.
“무도회도 나쁘진 않지.”
다행히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델라는 제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 같아서 슬쩍 웃었다.
“그럼 장소는 정원이 좋을까, 홀이 좋을까?”
“홀은 치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사용한 적이 없다며.”
“치워야지. 앞으로는 사용할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그럼 음식은? 주방장 혼자서 다 만들긴 어렵지 않을까?”
“메인은 그래도 주방장에게 맡길 생각이야. 디저트류는 따로 주문하고, 아! 주조사를 부르려고 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은 술을 좋아하거든.”
“술을 그렇게나 좋아해?”
“응. 그러니까 술은 무조건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거야. 절대로 모자라면 안 돼.”
“알았어.”
“그리고 혹시 모르니 손님방도 몇 개 준비해놓는 게 좋겠어.”
“몇 개면 될까?”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머리를 맞대고 며칠 후에 있을 실패기념 파티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악단에 대해서, 노래 선곡에 대해서, 춤에 대해서. 처음에는 의논이었지만, 이야기는 잘도 옆길로 샜다. 예전에 참석했던 파티에서 있었던 일화, 에델라가 아버지와 춤추다가 있었던 일, 테라비스가 어떤 자선행사에서 사 온 그림에 얽힌 사연, 그리고 이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서.
“말도 안 돼! 이 집 인테리어가 어디가 어때서?”
“정말 몰라?”
“얼마짜리인지는 말할 수 있지.”
“돈이 문제가 아니야!”
“세상에 그것보다 큰 문제가 어딨어?”
“이 집 인테리어!”
에델라의 지적에 테라비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비싼 돈을 들인 자신의 집 인테리어가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에델라는 완강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델라 역시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진짜?”
“진짜!”
테라비스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아 멍한 얼굴로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에델라는 말없이 그런 테라비스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