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치킨에 맥주2021.12.17.
‘이 남자, 혹시 꾼인 것 아니야?’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술집 안이었던 로즈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맥주에 치킨 어떻습니까? 에몬테 님의 단골집에서요.’
마틴의 제안은 그의 말대로 매력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말한 대로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은 아니었다.
‘제가 사죠.’
이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는. 로즈는 그야말로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틴은 키도 크고, 허우대가 멀쩡했다. 얼굴은 대단한 미남이라고까지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을 줬다. 즉, 로즈가 아는 남자 중에서 몇 없는 멀쩡한 남자였다.
‘수법인가? 바람둥이? 사기꾼?’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끝내 로즈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틴의 얼굴에서 속임수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로즈가 아는 마틴은 너무 정직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인 편이었다. 그는 바람둥이나 사기꾼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사실 내가 단순한 편에 더 가깝겠지.’
로즈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렸을 때, 납치나 유괴를 당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먹을 것으로 꼬드기면 어린 로즈는 틀림없이 넘어갔을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로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가, 심각해졌다가, 다시 뭔가 다 포기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마틴이 말을 걸었다.
“아, 뭐, 그냥…….”
부단장님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차마 할 수 없었던 터라, 로즈는 대충 얼버무렸다.
“자, 치킨 나왔습니다!”
거기다가 마침 로즈를 돕기라도 하듯, 마스터는 치킨을 내어왔다.
“와! 나왔네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야말로 갓 튀긴 치킨이 나오자, 그나마 남아 있던 로즈의 고민과 생각은 벌써 저 구석으로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마스터! 여기 맥주 한잔 더요!”
“이미 가져왔습니다.”
마스터는 빙긋 웃으며 다른 손에 있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로즈라면 처음에 나온 맥주는 이미 다 마셨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크흐~. 역시 우리 마스터! 센스쟁이. 치킨에 맥주가 빠질 수가 없죠.”
“크흐~. 역시 우리 배운 단골님! 이 조합을 아시네.”
로즈와 마스터는 엄지를 세우며 서로를 치켜세워주었다. 그리고 마틴은 지난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재연하고 있는 둘을 보며, 과연 저 말을 몇 번이나 주고받았을까가 궁금해졌다.
“핫! 뜨뜨!”
요란스럽게 소리치며 로즈는 손으로 닭 다리를 하나 뜯었다.
“부단장님은 어느 부위를 좋아하세요? 다리? 날개?”
로즈는 다리를 좋아했지만, 다리는 두 개니 마틴이 다리를 좋아한다고 하면 하나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물론, 속으로는 제발 날개를 더 좋아한다고 하길 빌었지만.
“저는 가슴살을 좋아합니다.”
“진짜요?”
“살코기를 좋아하거든요.”
뜻밖에도 마틴은 그 희귀하다는 가슴살 파였다.
“오! 그럼 제가 다리랑 날개를 다 먹어도 되는 건가요?”
“네.”
“와~. 우리 부단장님 입맛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치킨에 살코기만 드신다니 사라…….”
마틴의 취향에 찬사를 퍼부으려던 로즈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 말은 꺼내면 안 되는 말이었다. 동료들과는 흔히 하는 농담이었다. 뭔가를 양보해준다거나, 도움을 받았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징그럽다고 말하는, 정해진 패턴이 있는 농담. 하지만 고백받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농담으로 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 상식 정도는 로즈에게 있었다.
“사라?”
로즈가 말을 하다 말자, 마틴은 뒷말이 뭐냐는 듯 물었다.
“사라……있네! 우리 부단장님 입맛이 살아 있네요!”
로즈는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다.
“자, 자, 드세요. 드세요!”
로즈는 손에든 닭 다리를 입에 가져다 대며, 먹느라 바빠서 더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듯, 열심히 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 . . 닭이 절반쯤 없어지고, 술잔은 어느새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말술인 로즈도 이제 제법 알딸딸해졌다. 그리고 앞에 있는 마틴 역시 로즈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술을 마셨지만, 제법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부단장님은 축복받은 입맛이라 이겁니다. 이 닭 다리, 이 닭 다리가 얼마나 경쟁률이 치열한지 아세요? 얼마나 먹기 힘든지 아세요? 왜 닭은 다리가 두 개여서! 돼지처럼 4개면 얼마나 좋아요?”
“닭을 더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
“그럴 수는 없죠! 배가 너무 부르면 술을 못 마시잖아요.”
“그럼 닭은 안 먹고 술을 마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죠! 치킨은 맛있으니까요!”
로즈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했지만, 술꾼이 아니었던 마틴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즈는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마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렵네.’
마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약간 진땀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단순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러니 연애도 최대한 상대방이 좋아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을 사고, 치킨이 나올 때부터 닭 다리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에게 그것을 양보하는 일. 하지만 애석하게도 호감이 쌓인다고 애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틴은 깨달았다.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손, 잡을 수 있나요?”
마틴이 심각하게 어떻게 하면 호감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중에 로즈가 불쑥 물었다.
“네?”
“손요. 제 손. 잡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순간 엉뚱한 이야기에 마틴은 로즈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로즈는 마틴이 그렇게 생각을 할 만큼 충분히 많은 양의 술을 먹은 뒤였다. 하지만 로즈의 눈빛은 또렷했고, 표정은 진지했다.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조금 발그스름하긴 했지만, 그건 그저 신체적 현상일 뿐이었다.
“좋아하면, 손도 잡고 싶고, 팔짱도 끼고 싶고, 안고 싶기도 한 게 사람이잖아요. 절 정말로 좋아하면, 제 손 잡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로즈의 물음은 진지했다. 그녀는 마틴이 결벽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방금 자신이 한 말이 가능한 것인지 궁금했다. 적어도 자신은 그랬다. 연애하게 된다면, 정말로 마틴과 연애를 한다면, 로즈는 이것저것 하고 싶었다. 손도 잡고 싶었고, 팔짱도 끼고 싶었고, 포옹도 하고 싶었다. 물론 사랑하게 되면 그다음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시험이었다. 그가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로즈의 시험.
“…….”
마틴은 말없이 로즈의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치킨의 다리를 들고 먹었던 그녀의 손은 기름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전에는 땅콩을 집어 먹었던 손이었다. 땅콩 껍데기의 부스러기가 마치 날벌레의 날개처럼 그녀의 손가락과 손등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손을 잡으라고? 순간 마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역시…….’
점점 초점이 나가고 있는 마틴의 눈을 보며, 로즈는 살짝 실망했다. 마틴이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 시험에 통과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로즈는 마틴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녀 주위에 몇 없는 멀쩡한 남자인 데다가,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남자이니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한잔하시죠, 부단장님?”
로즈는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내려 맥주잔을 손에 쥐었다.
“…….”
하지만 마틴은 잔은 들지 않고, 아직도 로즈의 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부단장님?”
로즈가 한 번 더 마틴을 불렀다. 그때였다. 마틴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번뜩이는 눈으로 로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눈을 돌려 자신의 잔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마틴의 돌발행동에 로즈는 그저 눈만 동그래져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우!”
기세만은 그대로 잔을 다 비울 것 같았었지만, 마틴은 딱 세 모금을 마시고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잔을 감싸고 있던 제 손수건을 풀어냈다. 저건 또 뭔가 싶어서 로즈가 쳐다보고 있노라니, 손수건을 든 마틴의 손이 그대로 로즈에게 다가왔다. 정확하게는 로즈의 손으로.
“…….”
마틴은 조용히 로즈의 손을 닦아 냈다. 기름기가 번들거리고, 치킨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도, 땅콩 껍데기가 묻은 손등도, 맥주의 거품을 닦았던 손등도, 모두 꼼꼼하게 닦아 냈다. 그리고 로즈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런 마틴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의 손을 다 닦고 나자, 마틴의 손수건은 더러워졌다. 마틴은 그것을 미련 없이 테이블 저편으로 밀어놓았다.
“에몬테 님.”
마틴은 제법 비장하게 로즈를 불렀다.
“네?”
이제껏 홀린 듯 마틴이 제 손을 닦아주는 것을 쳐다보고 있던 로즈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마틴이 보였다. 더 없이 진지하고, 긴장한 표정의 마틴이. 그의 진회색의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결심을 한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로즈의 손을 잡는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 같은 눈동자였다. 몇 번의 연애를 해본 로즈였지만, 이렇게나 진지하게 자신을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한 마틴이 로즈의 손에 자신의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로즈의 손등에 마틴의 중지가 닿았다. 그 순간, 뭔가 찌르르한 것이 로즈에게 느껴졌다. 정전기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다른 뭔가일 수도 있었다. 미끄러지듯 마틴의 중지가 로즈의 손등을 훑으며 이어 약지가 닿았고, 검지가 닿았다. 마틴의 소지가 살짝 로즈의 소지에 닿았다 싶은 순간, 그의 엄지가 로즈의 손을 꽉 잡았다. 이어 그의 손이 덮어 누르듯 붙들었다. 마틴의 진회색의 눈을 쳐다보고 있느라 손을 보고 있지 못했지만, 로즈는 느낄 수 있었다. 마틴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잡았습니다. 손.”
이미 로즈도 아는 사실을 마틴은 굳이 소리 내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은 그 느낌을 새겨두기 위해서였다. 방금 마틴은 로즈와 자신의 사이에 있던 벽을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잡은 손이 아니라 바라보고 있는 로즈의 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드디어 그저 호감의 대상이 아니라, 연애의 대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