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부부의 키스2021.12.13.
“엔젤로테 백작님은 계속 나를 마음에 담아오고 있었다고 했어. 어릴 적부터 쭉 좋아했노라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어.”
껌껌한 어둠 속에서 에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라비스는 눈만이 아니라 귀도 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당신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어.”
에델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두 테라비스에게 알려주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이 테라비스에게는 더한 아픔이었다. 마치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와 과정을 낱낱이 알려주는 것만 같아, 에델라의 목소리가 비수같이 테라비스의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피부가 베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테라비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감기 전과 똑같은 식당 바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바닥에 포도주를 쏟은 것 같은 색이었다.
‘빌어먹을, 뭐 저따위 색을 식당에 쓰는 미친놈이 대체 누구야?’
테라비스는 괜히 과거의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비겁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난 거절했어.”
다른 생각으로 도망치고 있던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그 말이 들린 순간, 순식간에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땅으로 떨어져 있던 테라비스의 시선이 일순간 위로 솟구쳐 올랐다. 불그죽죽하던 시야가 일순간 환해졌다. 흰 피부와 화사한 금발, 시원한 파란 눈동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붉은 입술. 칙칙하던 붉은 바닥 대신, 아름다운 광경이 테라비스의 시선에 가득 찼다.
“뭐라고?”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서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되물었다. 그 이야기가 너무 듣고 싶어서 제 귀가 제멋대로 에델라의 말을 곡해해서 들은 것인가 해서였다.
“거절했다고.”
“왜?”
테라비스의 말에 일순간 에델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왜라니? 내가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야?”
“아니, 아니, 아니! 아니야!!”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당황해서 연거푸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건 아니었다. 당연히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분명 에델라에게도 좋았을 그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 이유를 물었을 뿐이었다. 샤를리안은 분명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이었고, 많은 재산을 가졌으며, 얼굴까지 잘생긴 미남자였다. 게다가 에델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에델라밖에 없다고 했다. 에델라에게 이보다 더 완벽한 남편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내가 엔젤로테 백작님의 청을 거절한 것이 혹시 당신 사업에 영향을 미칠까?”
테라비스의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델라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아니, 그건 상관없어.”
“그래?”
“그쪽과는 이미 사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뭐?”
이번에는 에델라가 깜짝 놀랄 차례였다.
“엔젤로테 상단과 붉은바람 상단 간의 업무협약은 백지화되었어. 우리가 안다비아와 교역을 하고 싶으면 다른 상단을 찾아봐야 해.”
“뭐? 설마…….”
“당신 때문은 아니야.”
에델라의 얼굴과 목소리에 걱정이 어리는 것을 본 테라비스가 재빨리 말했다.
“게다가 우리 붉은바람 상단이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런 교역 하나 따내지 못한다고 망할 그런 곳도 아니니, 걱정할 건 전혀 없어. 이전에 보석상 입찰에도 실패했지만, 전혀 타격이 없었다고. 아니, 조금 타격이 있긴 했지만, 별 상관없었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별 상관없을 거야. 물론, 안다비아 교역 건은 보석상 입찰보다 훨씬 큰 건이긴 하지만, 그리고 비용도 더 많이 들었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지금 말하는 게 타격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테라비스가 늘어놓은 말들이 그다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에델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테라비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평소와는 다르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을.
“약간의 타격은 있겠지만, 그게 아주 크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야.”
최선을 다해 침착하고 차분하게 테라비스는 다시 자신의 말을 정리했다.
“그럼 다행이긴 하지만…….”
에델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열심히 번역한 일이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 섭섭했고, 테라비스가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 더욱 안타까웠다. 안다비아 건이 성사되면 얼마나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설명할 때, 테라비스가 얼마나 희망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흥분하고 들뜬 목소리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로 이루어졌다면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행복해했을지를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웠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당황한 거야?”
“내가?”
“응.”
“아닌데?”
“조금 전에 횡설수설하고 그랬잖아.”
“내가?”
“응.”
“아닐걸?”
에델라의 질문에 테라비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테라비스의 모습에 에델라는 살짝 미간을 좁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그런 에델라의 시선을 슬쩍 피해 바닥을 바라보았다. 영롱한 빈티지 와인색의 바닥이 보였다.
‘크흐~ 빛깔 한번 예술이네. 역시 비싼 건 때깔이 달라.’
테라비스는 바닥의 색을 보며 감탄했다. 마음의 눈은 그렇게나 변덕스러웠다. 그가 영롱한 바닥의 색을 실컷 감상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에델라는 여전히 아까의 그 표정을 하고 테라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슬쩍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에델라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성싶었다.
“그건 말이야.”
결국 입을 연 것은 테라비스였다. 인내심은 에델라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내게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아서야.”
“내가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당황했다고?”
“그래.”
“그게 왜 당황스러운 일이야?”
테라비스의 대답에 이번에는 에델라가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자신은 테라비스에게 꽤 정직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꽤가 아니라 정직했다. 그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무엇이든 물어보면 솔직하게 답변해주었었다. 물어보지 않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기는 했지만, 그건 테라비스를 속이려고 그랬다기보다는 에델라의 성격 탓이었다.
“그야, 뭔가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당신은 말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리고 그런 에델라의 성격을 이제는 테라비스도 제법 파악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본인이 혼자 해결하려고 하고, 혼자 희생하려 들잖아.”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어. 혼자 이미 다 결론을 내리고, 다 해결하고 나서 나한테 말하는 건 줄 알았지.”
그 결론이 뭐라고 생각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조금 전에 한 번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시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 제 입에 올리는 것은 끔찍했으며, 그것을 귀로 듣는 것은 아주 혐오스러웠다.
“그래. 예전의 나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몰라.”
에델라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테라비스의 말이 옳았다. 아버지의 병원비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 테라비스에게 결혼을 제의하러 왔을 때처럼, 다른 귀족 영애가 자신을 험담하는 것을 들었을 때처럼, 예전의 에델라라면 그저 혼자 고민하고, 혼자 속상해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랬잖아.”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라고.”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고.”
남편. 그 단어가 에델라에게 처음으로 편안하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언제나 어색한 단어였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단어였다. 부인이나 아내라는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테라비스와는 달리, 계약으로 묶인 사이에서 다정하게 부를 호칭이 아니라고 에델라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에델라의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그렇게 불렀다. ‘내 남편’이라고.
“에델라.”
에델라의 남편이 에델라를 불렀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에델라는 고개를 들어 테라비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윽하게 에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게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환하게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테라비스의 얼굴이 에델라에게 다가왔고, 그의 행복한 표정을 눈 안에 가득 담은 후 에델라는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은 순간, 테라비스가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말캉한 에델라의 입술을 짓누르며 테라비스는 그녀의 숨결을 베어 물었다. 달콤한 향이 테라비스의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하며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자신의 쪽으로 더욱 바싹 끌어당겼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닿아 있어도 더 닿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간의 빈틈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숨결이 아쉬웠다. 새어 나오는 작은 신음 역시 아까웠다. 에델라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테라비스는 입을 더욱 크게 벌렸다.
“테, 테라……비…….”
굵은 팔뚝을 꽉 붙잡은 채, 에델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짓눌린 입술과 억압당한 혀로는 완벽한 발음을 하기 힘들었지만,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용케 알아들었다. 키스에 서툰 에델라가 숨 쉴 틈을 주기 위해서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떼어냈다. 그 잠시 잠깐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델라를 숨 막혀 죽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
“하아…….”
에델라가 크게 숨을 몰아쉬자, 테라비스는 다시 조급해졌다. 지금이면 될까? 다시 해도 될까?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조급함을 알아본 것일까? 아니면 조급한 테라비스를 보며 자신도 조급해진 것일까? 에델라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는 대신, 테라비스의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어 테라비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에델라의 돌발행동에 테라비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테라비스는 언제나 자신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신의 아내가 사랑스러웠다. 그는 기꺼이 에델라의 돌발행동에 어울려주었다. 자신이 조금 전 에델라에게 했던 행동을 그녀는 서툴게 따라 하고 있었다. 테라비스의 숨결을 빼앗고, 빈틈없이 입술을 밀착시키고, 그의 호흡을 삼키는 그 행동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테라비스는 기꺼이 에델라에게 제 입술을 내어주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내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