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할 말이 있어2021.12.10.
“뭐요?”
그대로 굳어버리는 테라비스를 보며, 로즈는 아주 잠깐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뭔가 야단맞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분명 로즈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엔젤로테 백작님과 만나셨다고요.”
“어디서요?”
“집 근처의 작은 디저트 가게였습니다.”
“그게 어딘데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곳에 쳐들어갈 듯이 테라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지금은 다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시는 걸 확인하고, 교대한 뒤에…….”
“중간 과정은 됐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 디저트 가게에서 엔젤로테 백작과 내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입니다.”
설명하려는 로즈의 말을 싹둑 잘라내며, 테라비스는 로즈를 다그쳤다.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선 채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요? 방금 엔젤로테 백작과 에델라가 만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봤습니다. 다만, 들은 것은 없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누군가 사모님을 해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지, 대화를 엿듣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로즈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테라비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디저트 가게 안에는 어떤 수상한 자도 없었고, 엔젤로테 백작님께서 사모님께 어떤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걸 에몬테 님께서 어떻게 장담합니까?”
테라비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자는 위험한 작자입니다.”
“엔젤로테 백작님이요?”
“그래요. 아주 위험한 작자란 말입니다.”
적어도 에델라의 한정으로는, 그리고 테라비스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는 아주 상종도 못 할 나쁜 놈이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디저트 가게에서 에델라와 단둘이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는 더욱 그랬다.
“제가 직접 집에 가봐야겠군요.”
걸려 있던 재킷을 거의 잡아 뜯듯이 집어 든 테라비스는 로즈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단장실을 나섰다.
“…….”
애초에 무슨 말을 할 생각도 없었던 로즈는 눈만 끔벅거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단장실 문이 빠끔히 열리고, 마틴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단장님께서 집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밖에 나가시던데요.”
“집에 가시는 길은 맞긴 하실걸요.”
“지금요?”
마틴은 단장실의 창밖을 한번 쳐다보고,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아직 오후 2시였다. 퇴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물론, 단장인 테라비스에게 퇴근 시간을 지키라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 중독이었던 과거 그의 퇴근 시간을 비추어 생각하자면, 일러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결혼 후에는 제법 꼬박꼬박 다른 직원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서 같이 퇴근하긴 했지만 말이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일이라면 일이랄 수도 있고, 별일 아니라고 하면 아닐 수도 있고. 뭐 그러네요.”
로즈의 말투에서 자세하게 말하기는 좀 곤란하다는 어투가 느껴지자 마틴은 테라비스의 퇴근에 대해서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사모님 호위, 이제 교대하신 겁니까?”
“네, 맞아요.”
“그럼 에몬테 님은 이제 퇴근이신가요?”
“네. 새벽에 출근했거든요.”
“일찍 퇴근하셨는데, 뭐 하실 겁니까?”
“일단 집에 가서 좀 자려고요. 너무 일찍 일어나서.”
“그럼 낮잠 자고 일어난 뒤에는 뭐 하실 겁니까?”
“글쎄요.”
마틴의 연이은 질문이 좀 의아했지만,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기에 로즈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별다른 일 없으시면, 저랑 데이트하시죠.”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행동하는 중입니다.”
마틴은 그런 로즈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붕대를 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금 절뚝이긴 했지만, 분명한 한 걸음이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아마 에몬테 님은 제 데이트 신청을 받으실 겁니다.”
“왜 그렇게 자신하시는데요?”
내가 쉬워 보이나? 로즈는 그 생각을 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에몬테 님이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실 데이트를 제가 제안할 테니까요.”
인상을 찌푸린 로즈를 보면서도 마틴은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 * * 테라비스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도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도착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상단에서 집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테라비스는 거의 뛰어들듯이 집으로 들어왔다.
“에델라는 어디에 있지?”
“아마 식당에서 녹스 할멈과…….”
때 이른 주인의 등장에 하녀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의 질문에는 성실하게 대답하려 했다. 그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테라비스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서 온전히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에델라!”
테라비스는 식당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테라비스?”
“어머나, 바넬레오 님. 일찍 오셨네요?”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에델라와 녹스는 갑작스러운 테라비스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
테라비스는 놀란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두 여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녹스가 예전에 에델라의 유모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종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테라비스에게 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녹스도 샤를리안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둘이서 샤를리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테라비스의 안에서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녹스.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싸늘한 목소리로 테라비스는 녹스에게 말했다. 그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녹스는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에델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에델라는 괜찮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상황이 여전히 걱정스러웠지만, 녹스는 조용히 식당을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에델라와 테라비스, 두 사람이었다.
“오늘 외출을 했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테라비스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어.”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테라비스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마시던 차와 함께 애플파이가 보였다. 후식을 그리 즐기지 않는 테라비스는 저택에 따로 파티시에를 고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애플파이는 오늘 에델라가 갔었다는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저절로 테라비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장 저 애플파이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한 생각이었다. 파티시에는 없었지만, 고용한 쉐프가 가끔 후식을 만들기도 했고, 주방 하녀 중에 누군가가 구웠을 수도 있었다. 조금 전에 나간 녹스만 해도 종종 소박하고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기도 했었다. 설사 저 애플파이가 에델라가 그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에델라가 사 온 것을 자신이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테라비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지만 그게 꼴 보기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
테라비스는 테이블 위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금 전까지 녹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에델라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응. 네게 할 말이 있어.”
에델라가 테라비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이.
“오늘 엔젤로테 백작님을 만났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에델라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테라비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를 만난 것을 숨기지도 않고 오히려 할 말이 있다고 먼저 에델라가 말하자 비틀린 미소가 테라비스의 안에서 밖으로 기어나가려 꿈틀거렸다.
‘그래. 역시 그자가 좋다는 거겠지. 돈밖에 없는 졸부보다야, 돈에 작위에 첫사랑이기까지 한 그 잘난 놈이 더 좋겠지.’
자조적인 스스로가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똑바로 보며 방금 자신이 생각했던 이야기를 에델라가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엔젤로테 백작님이 우리 결혼이 계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뭐?”
하지만 정작 에델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였다.
“당신이 말한 거야?”
“아니야! 나도 그가 알고 있다고 해서 놀랐는걸. 그래서 오늘 만나게 된 거였어.”
“당신이 말한 게 아니라면 그자가 어떻게 알고 있다는 거지?”
“그것을 물어봤어야 했을까? 당황해서 거기까지는 나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애초에 우리 계약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에델라 당신과 나밖에 없잖아.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있긴 하지. 이 일을 주선한 녹스 할멈.”
“할멈은 아니래. 조금 전에 나와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는 엔젤로테 백작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어.”
“그럼 다른 사람은…….”
테라비스는 예로니아 백작과 백작 부인을 떠올렸다. 에델라가 그들에게 계약 이야기를 했는지는 테라비스도 이제까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혼식에서의 태도를 봐선 어느 정도는 아는 게 틀림없었다. 작위 계승의 문제에 대해서라면 예로니아 백작이 더 잘 알 테고. 하지만 그들이 에델라의 부모님이기에 테라비스는 선뜻 용의자 취급을 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어. 어머니나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하고.”
에델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테라비스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그게 맞았다면, 정말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에델라는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테라비스에게 사과했지만, 이미 뒤틀린 테라비스에게는 그 사과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평민 졸부 사위보다 귀족 사위가 귀족 나리들의 취향에 더욱 맞으시겠지.’
그의 마음속에서는 예로니아 백작, 혹은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이야기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계약 결혼에 붙잡힌 불쌍한 딸을 고귀한 백작님이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랬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 엔젤로테 백작님이 우리 결혼이 계약인 것을 알게 되어서 뭐 어떻게 되었는데? 당신더러 당장 이혼하고 자기랑 결혼하자고 하던가?”
테라비스는 자신에게 샤를리안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껏 에델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테라비스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졌다. 어젯밤 키스했던 붉고 도톰한 입술에 시선이 한번 머물렀지만, 그리 오래 그곳에 머물지 못했다. 자신이 준 돈으로 산 에델라의 드레스 어깨선을 스치고, 동그란 에델라의 팔꿈치를 스치고, 더 아래로 내려간 테라비스의 시선은 식당 바닥의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혼을 고하는 에델라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응. 그렇게 말했어.”
에델라의 대답에 테라비스는 아예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