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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나의 샤를 (63/92)

63화. 나의 샤를2021.12.06.

“샤를.”

에델라는 어릴 적 부르던 애칭으로 샤를리안을 불렀다. 그녀의 호칭에 샤를리안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감돌았지만, 에델라가 그의 손 안에 있던 자신의 손을 빼내자 되레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들어 에델라의 손이 아니라 얼굴을 바라보자 에델라가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샤를리안이 기억하고 있는 에델라의 해사한 미소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슬픔과 애틋함이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나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다니,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

이것은 에델라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렇게 나를 걱정하고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도 미안하고 고마워.”

이것 또한, 에델라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리안을 애칭으로 부르고, 예전처럼 친근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서.

“하지만, 샤를. 난 정말로 너에게 섭섭함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처음에는…… 그래. 너를 원망하기도 했어. 아무런 편지도 없는 너를.”

에델라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듯, 살짝 시선을 비틀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선명하지만 희뿌연 기억이었고, 흐릿하지만 또렷한 기억이었다. 과거의 장면이 기억났고, 그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얼마나 슬펐는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것이 와닿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너무 오래.

“하지만 그건 정말 처음뿐이었어. 우리 집이 그렇게 되었을 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듯이 너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곧 생각할 수 있었거든.”

에델라다운 생각이라고 샤를리안은 생각했다. 착하고, 배려심 깊은, 작은 소녀. 그래서 자신이 좋아했던 소녀.

“날 용서해주는 거야?”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잖아.”

에델라는 샤를리안을 보며 웃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미소였다. 맑고 해사한 미소였다. 어릴 적 샤를리안이 보았던, 바로 그 미소.

“에델라.”

“그러니 샤를. 어릴 적에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너를 탓하지는 마. 그건 네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니까.”

에델라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더는 자신을 탓하지 말라는 것. 애처롭고 괴로운 표정으로 회상해야 하는 과거를 더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래, 에델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샤를리안은 에델라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 역시 어릴 적과 똑같은 맑고 따뜻한 미소였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샤를리안의 가슴에 못처럼 박혀있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일순간에 뽑혀 나가자, 그는 마침내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럼, 내 말대로 하는 거겠지?”

샤를리안은 희망을 담아서 에델라에게 물었다.

“…….”

하지만 에델라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다무는 것을 보자 샤를리안은 조급해졌다.

“걱정하지 마, 에델라. 계약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결해 줄게. 위약금이든, 뭐든 다 내가 책임져 줄게.”

“네가 책임져 준다고?”

“그래.”

에델라의 질문에 샤를리안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쉽게 에델라가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아, 애가 탔다.

“넌 원래 내 신부였잖아, 에델라.”

“…….”

“나와 결혼하기로 했었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네 말은, 테라비스와 이혼을 하고 너와 결혼을 하자는 거야?”

“그래!”

에델라가 마침내 온전히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하자, 샤를리안은 체통도 잊고 반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에델라는 이전에도 샤를리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어째서일까?’

에델라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샤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릴 적과 변함이 없어 보였다. 물론, 지금의 샤를리안은 키가 컸고, 어른이 되었고, 생김새도 변했다. 하지만 샤를리안은 샤를리안이었다. 어린 에델라를 수줍게 만들던 잘생긴 얼굴도 그대로였고, 환한 미소를 짓게 하던 다정함도 그대로였다. 거기다가 어릴 적과 변함없이 에델라를 좋아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도 에델라는 어릴 적 그때처럼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에델라는 테라비스와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제안을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에델라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샤를리안의 말을 거절했다.

“어째……서?”

한 대 맞은 듯한 얼굴로 샤를리안은 물었다. 그는 당연히 에델라가 수락하리라고 생각했다. 테라비스가 뭘 원했는지는 모르지만, 몰락 귀족에 예로니아 백작이 병환 중인 에델라가 뭘 원했는지는 빤했다. 돈이었다. 게다가 그 뻔뻔하고, 능글맞은 졸부 남자가 가진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을 테니. 돈이라면 샤를리안도 얼마든지 있었다. 오히려 유서 깊은 엔젤로테 백작 가문의 가주인데다, 붉은바람 상단보다 더 규모가 큰 엔젤로테 상단의 단장인 샤를리안은 테라비스보다 더 재산이 많았다. 에델라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샤를리안은 절망했다. 자신의 뒤늦음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 결혼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계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행의 구덩이에서 에델라를 구해낼 기회.

“어째서, 에델라?”

하지만 에델라는 자신의 손을 거절했다. 힘껏 뻗어도 그녀가 마주 잡아주지 않으면, 샤를리안은 에델라를 구해낼 수 없었다.

“난 예전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뭐?”

“이 결혼은 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어.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기도 해.”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알아, 샤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 신성한 결혼을 계약하는 것은 나쁜 일이야. 부도덕한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이지.”

에델라는 샤를리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리고 수많은 고민 끝에 에델라가 내린 결론이기도 했다.

“…….”

하지만 샤를리안은 에델라의 결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에델라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났다. 무엇에 화가 나는지 자신도 정확하게 몰랐지만, 그저 화가 났다. 너무 늦게 에델라를 찾은 자신에게인지,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은 에델라에게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갑자기 나타난 그 바넬레오라는 작자에게 내는 화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신에게일 수도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야.”

알 수 없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샤를리안은 말을 내뱉었다.

“샤를.”

“네 입으로 말했잖아.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짓이라고. 그런데도 그 부도덕하고 비상식적인 결혼을, 아니, 결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계약을 유지하겠다는 거야?”

“그래.”

“내가 억지로라도 못하게 만든다면?”

“뭐?”

샤를리안의 말에 처음으로 에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사람들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너희의 결혼이 계약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도 그 결혼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샤를!”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너만 그 계약에서 꺼내올 수 있다면 말이야.”

이제 주먹을 쥔 쪽은 에델라였다.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난감함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아주 어쩌면, 샤를리안이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리고 자신이 아는 샤를리안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샤를리안의 입에서 최악의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싸늘한 정적이 에델라와 샤를리안 사이에 감돌았다.

“그럼 이건 너와 하는 또 다른 계약인 거야?”

침묵을 깬 것은 조용한 에델라의 음성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와 테라비스의 계약 결혼을 비밀로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테라비스와 이혼하고 너와 결혼을 하자는 거잖아? 결국, 넌 내게 또 다른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거야?”

“아니야, 에델라! 당연히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들렸어.”

“전혀 아니야! 난 달라, 에델라.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계약 같은 것이 아니야.”

에델라의 말에 샤를리안은 그야말로 펄쩍 뛰었다. 자신이 한 말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난 널 사랑해.”

샤를리안은 제 뜻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것은 그녀의 비밀을 무기 삼아 협박하려는 것도, 또 다른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품어왔던 제 사랑을 고백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에델라가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난 어릴 적 우리의 약속을 지키려는 거야.”

“이미 깨어진 약속을 말하는 거야?”

“그건 어른들의 약속일 뿐이야. 내 마음의 약속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어. 내 신부는 언제나 너뿐이었어.”

샤를리안에게는 그랬다. 그의 신부는 언제나 에델라였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너도 날 좋아하잖아, 에델라.”

“…….”

신부는 대답이 없었다.

“에델라?”

“…….”

재촉해봐도 여전히 신부는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제야 샤를리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손을 뻗고 있었던 불행의 구덩이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내가 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게 마지막일 거야.”

에델라는 충격을 받아 굳어 있는 샤를리안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샤를.”

조용한 음성이었다.

달콤한 음성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아쉬워 눈물이 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상냥하고, 따뜻한, 나의 샤를.”

흘러나온 단어들보다 더욱 상냥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끝끝내, 샤를리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참아내지 못했다. 참을 수 없었다. 15년의 사랑이 끝이 나는 순간인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너를 좋아했었어.”

상냥하고 잔혹한 목소리가 작별을 고했다.

“에델라.”

물기 어린 목소리가 에델라를 불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샤를리안은 그저 에델라를 불러만 놓고 다음 말은 쉬이 하지 못했다. 에델라는 그저 조용히 기다려주었을 뿐이었다. 15년은 너무 길어 그를 기다려주지 못했지만, 그가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었다.

“에델라.”

툭-. 굵은 눈물방울이 샤를리안의 눈동자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시야에 에델라가 보였다. 선명하고도, 흐릿하게 보였다. 지금의 에델라였다. 과거의 에델라가 아니라, 꿈속의 에델라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의 에델라가 아니라, 진짜 에델라였다.

“너를 좋아했었어.”

마지막 고백이었다. 그리고 작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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