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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아프고 어린 과거 (62/92)

62화. 아프고 어린 과거2021.12.03.

  이른 아침부터 손님을 맞이한 것은 테라비스만이 아니었다. 에델라는 우편함에 놓여 있었다며 고용인이 전해준, 소인이 찍히지 않은 편지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겉면에는 보내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받는 사람에 에델라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에델라 드 예로니아 앞’이라고. 굳이 에델라의 결혼 전 성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보낸 사람도, 그 의도도 알 수 없는 편지가 주는 묘한 느낌에 에델라는 쉽게 그것을 뜯지 못하고 있었다.

“됐어. 온종일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크게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에델라는 봉해진 편지를 뜯었다. 눈에 들어오는 필체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글을 읽어내려갈수록 낯선 사람이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샤를…….”

에델라는 편지를 보낸 이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짧은 내용의 편지를 읽고 난 뒤의 에델라의 표정은 편지를 받았을 때보다 더욱 난감하고 복잡했다.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 나서도 에델라는 계속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거리기도 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또한, 편지에 적어놓은 장소에서 에델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쩌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않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와 결혼한 유부녀인 자신이 과거의 약혼자인 샤를리안을 따로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테라비스가 샤를리안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리안은 에델라와 테라비스와의 계약 결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가 비겁하게 에델라의 약점을 잡고 무슨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제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을 보아선 아무 뜻도 없다고 그저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점점 에델라의 생각은 샤를리안을 만나야만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에델라는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 * *

“음?”

정원의 나무그림자에서 몸도 숨기고, 햇볕도 피하고 있던 로즈는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에델라를 보곤, 몸을 긴장시켰다. 그녀가 상단이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늘 에델라의 호위 담당이 로즈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붉은바람 상단 내에서 에델라의 호위 임무는 매우 한가하고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서로 하려는 자리였다. 에델라가 집 밖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어서 집 주변이나 입구만 경계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순번을 정해서 담당할 정도로 인기가 좋을 수밖에. 마차를 부르지 않았기에 처음에 로즈는 에델라가 평소처럼 정원을 산책하려는 것인가 했다. 에델라는 거의 매일 정원을 산책했고, 가끔은 정원의 꽃을 꺾어서 들어가기도 했다.

“어딜 가시려나 본데?”

하지만 이내 로즈는 에델라가 외출하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곧장 정원을 가로지르는 에델라의 걸음걸이는 산책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앞만 보고 걷는 것이 꽃을 꺾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로즈는 나무와 나무그림자에 몸을 숨겨가며 에델라의 뒤를 쫓았다. 그녀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전달사항은 따로 없었지만, 에델라가 신경을 쓰거나 겁을 먹을 수도 있으니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다는 게 이제까지의 지침이었다. 로즈의 짐작대로 넓은 정원을 곧장 가로지른 에델라는 커다랗고 높은 대문을 손수 열고 밖으로 향했다. 로즈 역시 잠시의 시간과 간격을 두고 밖으로 향했다. 에델라를 뒤쫓으면서 로즈는 지금 그녀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말지를 잠시 갈등했다. 분명 자신이 하는 일은 에델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호위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마치 그녀를 미행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꼭 비밀로 해야 한다는 지침은 없었다.

‘일단 목적지까지 따라간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 에델라에게 말을 걸려면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제치고 뛰어가야 해서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손을 번쩍 들고 에델라의 이름을 부를 만큼 그녀와 친숙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래서 로즈는 속 편하게 그렇게 결정하고는 계속 에델라의 뒤를 쫓았다.

‘아! 디저트를 사러 오신 거로군?’

에델라가 디저트 가게로 들어가자, 어쩐지 이해되어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 없이 방문한 디저트 가게가 무슨 위협이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혹시 몰라서 로즈는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커다란 유리창이 있어서 밖에서도 안이 잘 보였다.

“어?”

디저트 가게에 있는 아는 얼굴에 로즈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어어?”

거기다가 에델라가 그 사람의 앞에 앉자 더욱 놀랐다.

“엔젤로테 백작이랑 사모님이 아는 사이였어?”

루젠타에 자리 잡은 것이 테라비스보다 더 최근인 로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놀람과 당황이 문제가 아니었다. 로즈는 붉은바람 상단의 호위무사이자 현재 에델라를 호위 중인 입장에서 지금 이 장면을 상단에 보고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에델라를 보자 환하게 웃는 엔젤로테 백작이나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듯 모자를 고쳐 쓰는 에델라를 보면, 지금 자신이 본 장면이 누가 봐도 밀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로즈가 고민에 빠진 사이, 벽 너머의 에델라 또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루젠타에 온 이유를 알고 있어?”

“백작님께서는 가문의 업을 이어받아 루젠타와 교역을 재개하고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야.”

에델라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샤를리안을 쳐다보았다. 무도회장에서 그리고 붉은바람 상단의 사무실에서 샤를리안이 보였던 태도에서 그가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는 얼핏 알고 있었다.

“난 널 만나려고 루젠타에 온 거야.”

에델라와 눈이 마주치자 샤를리안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엔젤로테 백작님.”

샤를리안의 진심이 에델라에게 전달되어서일까? 그게 아니면 자신의 짐작이 맞아버려서일까? 그를 부르는 에델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에델라.”

에델라가 무슨 말을 하기 전,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달라는 듯이 샤를리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와의 연락이 끊긴 것은 절대 내 의도가 아니었어. 나는 항상, 언제나, 늘, 루젠타로 오고 싶었어. 네 곁에 있어 주고 싶었어.”

에델라에게서 눈을 한 번도 떼지 않고, 샤를리안은 이제껏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토해내었다. 지난 15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너에게 편지를 썼었어. 아마도 수십 통, 아니 수백 통은 되었을 거야. 하지만 한 번도 부칠 수 없었지. 아버지는 그만하라며 화를 내셨고, 어머니는 애원하셨어. 동생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상한 분위기는 감지하고 매일 매일 울음을 터트렸지. 나중에는 편지를 쓰지 못하도록 펜도 종이도 모두 압수당했어.”

그때를 회상하듯, 샤를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울었고, 애원했을 따름이었다. 에델라에게 편지를 한 통만 쓰게 해달라고, 혼자 무섭고 힘들 에델라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샤를리안에게 에델라를 그만 잊으라고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내가 예전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 원두 상자 사이에 몰래 들어가 웅크리고 있으면 루젠타로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물론 에델라는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게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도했었어. 네게 편지를 쓸 수 없다면, 내가 직접 가면 되는 거였으니까. 사실, 그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네 곁에 있어 줄 수 있으니까.”

샤를리안의 고백에 에델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원두는 아니었어. 커다란 라탄 바구니 안에 들어가서 제발 들키지 않고 루젠타까지 갈 수 있기를 빌었어. 하지만 실패했지. 왜 실패했는지 알아?”

“글쎄요.”

“루젠타로 더는 배가 출항하지 않았거든. 나는 그 안에서 며칠을 버텼어.”

“며칠을?”

“응. 배가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지만, 정신이 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버텼어. 하지만 정신을 잃고 나서는 나도 나를 통제할 수 없었지.”

샤를리안의 이야기에 에델라의 도톰한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때라면, 15년 전이라면 샤를리안도 어린 나이였다. 그 어린아이가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바구니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발견되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집, 내 방 안이었어. 자물쇠로 굳게 잠긴.”

“갇힌…… 거야?”

어느새 에델라는 샤를리안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때처럼.

“응.”

샤를리안은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내가 절대로 루젠타에 갈 수 없다고 하셨어. 어머니는 내게 널 잊으라고 했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어차피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라고. 며칠만 지나면 잊혀질 그런 얕은 감정이라고 날 설득하셨지.”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의 말과는 달리 샤를리안은 에델라를 잊을 수 없었다. 해사하게 미소를 짓던 작은 소녀를, 자신의 청혼을 받아 들어준 소녀를, 서툰 외국어로 열심히 편지를 써준 소녀를, 샤를리안의 머리는 절대로 그 소녀를 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난 널 잊을 수 없었어. 하지만 내가 어리다는 이야기는 맞았었어. 난 너무 어렸고, 힘이 없었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오히려 날이 갈수록 기억은 더 선명해졌고, 감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샤를리안의 마음속에서 작은 신부는 키가 커졌고, 더욱 아름답게 변해갔다. 매일 꿈속에서, 그리고 상상 속에서 에델라를 만났다. 어떨 때는 하나도 자라지 않은 샤를리안의 어린 신부였고, 또 어떨 때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것이 진짜 에델라인지, 아닌지는 샤를리안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샤를리안의 에델라는 언제나 어릴 적 그대로 상냥했고, 해사하게 웃었으며, 착하고 고왔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난 이제 그렇게 어리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지도 않아. 네가 불렀던 대로 난 엔젤로테 백작님이고, 엔젤로테 상단도 이끌고 있어.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샤를리안은 손을 뻗었다. 그렇게도 그려왔던 에델라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많은 일을 해서인지 에델라의 손은 귀족 아가씨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거칠었고, 그렇게 곱지 않았다. 그 사실에 샤를리안은 다시 설움이 울컥 북받쳤다. 더 일찍 왔어야 했다. 이렇게 늦게가 아니라 훨씬 더 일찍.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야.”

샤를리안은 당황하고, 놀란 파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혼해, 에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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