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계약의 파기2021.11.29.
이른 아침부터 테라비스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밤새 작정이라도 한 듯, 그는 결례가 될법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겨서 붉은바람 상단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엔젤로테 백작님.”
일단은 웃는 낯으로 그를 반긴 테라비스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제 비에라 자작 가의 무도회에서 이 작자가 에델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테라비스는 웃는 얼굴과 그렇지 못한 눈빛으로 샤를리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에델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었다. 그래서 그녀를 쫓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사건들이 그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준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했었냐고 캐묻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 눈치가 없는 테라비스라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일찍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 간에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샤를리안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눈 밑은 거무죽죽했고, 피부는 거칠어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저 역시 엔젤로테 백작님을 뵙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 하셨습니까?”
“백작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 용건을 전달하기 위하여 이렇게 일찍 저희 상단을 찾아주셨는데, 먼저 발언 기회를 드려야지요.”
“좋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샤를리안은 테라비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하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며, 절대 되돌리지 않을 발언이니 똑똑히 들어두라는 듯한 태도였다. 상대방이 그런 태도로 나오면 어느 정도 기가 죽을 법도 한데, 테라비스는 처음과 똑같이 미소를 띤 채 여유롭게 샤를리안의 눈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저는 엔젤로테 상단을 대표하여, 이전에 오갔던 엔젤로테 상단과 붉은바람 상단의 교역 이야기를 전면 백지화하고자 합니다.”
단숨에 자신의 용건을 토해낸 후, 샤를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밤새 생각한 결과였다. 처음에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이제껏 루젠타와의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서 엔젤로테 상단에서 들인 비용이나 시간을 생각하면 계약을 전면 백지화한다는 것은 당연히 나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축복 같은 일을 계약이라는 냉정한 서류의 형태로 더럽힌 자를 샤를리안은 자신의 사업 파트너로 선정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와 그 계약 결혼을 한 사람은 에델라였다. 그녀의 처지가 어떤지 샤를리안은 잘 알고 있었고, 루젠타에 와서 들은 그간의 예로니아 백작 가의 이야기는 더욱 비참했다. 그들의 약점을 인질 삼아 이 계약을 테라비스가 진행했을 것이라고 샤를리안은 쉬이 짐작했고, 그렇게 비열한 자라면 더더욱 같이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시군요.”
샤를리안의 말에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혀 놀라지 않는 모습을 보며 샤를리안은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비열하고 뻔뻔한 작자에게는 또 다른 흉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참 공교롭게 되었다고 해야 할지, 잘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엔젤로테 백작님께 드리려던 이야기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진중하게 샤를리안과 눈을 맞추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저희 붉은바람 상단 역시, 엔젤로테 상단과의 교역을 전면 백지화하려고 했습니다.”
저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었다. 상대방의 처지가 어려워진다면 언제든지 모른 척할 수 있는 냉정한 자라는 것을 테라비스는 알아버렸다. 그런 신의 없는 자와는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안다비아와의 교역을 위해서 들인 공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기 그지없었지만, 이대로 일을 진행하다가 미래에 후회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 더 최악이었다. 테라비스는 불안의 싹을 안은 현재의 영광보다 미래의 안정성을 택했다. 적어도 갑자기 연락을 딱 끊어버릴 상대방과는 함께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잘된 이야기라고 하는 게 좋겠군요.”
“네. 바넬레오 님께서도 저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니, 저 역시 이 뒤의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될 것 같아 매우 안심이 되는군요.”
“뒤의 절차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직 진행된 것이 없는데요. 원래 사업이나 계약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서명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물론입니다. 거기다가 서명을 해도 안심할 수는 없지요. 계약이라는 것이 원래 파기도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계약의 백지화를 말할 때보다, 더욱 날 선 목소리로 샤를리안이 말했다. 말뿐이 아니라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치 테라비스를 추궁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계약의 백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정중했던 샤를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테라비스는 지금의 샤를리안이 말하는 것은 거의 사적인 이야기임을 알아차렸다.
‘계약의 파기라니,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그제야 테라비스는 어제 에델라가 춤을 추다가 갑자기 뛰어나간 연유를 알 것 같았다.
“글쎄요. 저는 엔젤로테 백작님과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계약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파기가 된다면, 그건 계약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오늘은 상호합의하에 원만하게 합의가 되었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건 계약 파기가 아니라 계약 자체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테라비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이 대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계약에 하자가 있거나, 어느 한쪽이 그 계약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이미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샤를리안은 테라비스의 말에 물러서지 않았다.
“예를 들면,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여자의 약점을 잡아서 한 파렴치한 계약 같은 것 말입니다.”
샤를리안이 에델라와 테라비스의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방금 그가 한 말로 확실해졌다. 그리하여, 테라비스의 입장도 더욱 확실해졌다.
“글쎄요. 그 여자가 무슨 계약을 어떻게 했는지는 당사자만이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서로 간의 신뢰와 믿음에 대한 증거가 바로 계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그 여자도 상대방을 믿었기 때문에 계약을 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제 일이 아닌 양, 테라비스가 유들유들한 태도로 대답을 하자 샤를리안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닙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샤를리안이 말했다. 테라비스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이제 날카로운 정도가 아니라 당장 그를 베어버릴 것같이 매서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서 하는 게, 결혼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샤를리안의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도 테라비스는 태연했다. 그의 날카로움을, 그의 분노와 화를, 전혀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엔젤로테 백작님의 결혼관은 잘 들었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미혼 여성을 만나 서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드리겠습니다.”
테라비스의 축복 아닌 축복의 말에 샤를리안은 이를 꽉 깨물었다.
“에델라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더러 제 부인을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당연히…….”
“거짓말.”
테라비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샤를리안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에델라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인형처럼 예쁘게 꾸며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인사를 시키지 않았을 겁니다. 에델라가 그렇게 불편해하는데 절대로 그럴 리 없었을 겁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공격이 통했다. 샤를리안의 말에 테라비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제 에델라가 힘들어했었나? 불편해했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즐기고 있는 만큼, 에델라도 즐기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실제로 테라비스와 춤을 출 때, 에델라는 꽤 즐거워 보였었다. 아니. 아닐지도 몰랐다. 그 테라스에서의 일만 봐도 그랬다. 테라비스가 없었다면, 에델라가 무슨 꼴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뺨을 맞았을 것이고, 더 심한 짓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무슨 짓을 이미 당했을 수도 있었다. 에델라라면 그런 일을 당했더라도 테라비스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의 자존심과 자기희생을 당연시하는 그 버릇 때문에.
“당신은 에델라를 그저 계약자로만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에델라의 생각이나 에델라의 불편함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거겠지요.”
테라비스의 흔들리는 눈을 보며 샤를리안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그랬나? 자신이 이제껏 에델라를 그렇게 대했던가? 과거를 더듬기라도 하듯, 테라비스의 눈이 몇 번을 깜박였다. 둘은 포옹을 했다. 계약서대로. 둘은 키스도 나누었다. 계약서대로. 거기다 아이까지 낳을 것이다. 계약서대로.
“저는 다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테라비스를 비웃듯, 샤를리안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이 사내의 뻔뻔하고 유들유들한 가면을 벗겨냈다는 사실이 기꺼워 저절로 그런 목소리가 나왔다.
“저는 에델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똑같은 마음입니다.”
제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이 남자와 자신은 달랐다. 샤를리안은 에델라를 좋아했었다. 사랑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었다. 작고 고운 소녀를, 환한 미소를 가진 그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샤를리안은 그 소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꽃반지를 나누면서 한 청혼은 진심이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물론, 재혼도 기꺼이 할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샤를리안의 입에서 나온 재혼이라는 소리가 테라비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재혼? 에델라와 저 자식이 결혼한다고? 테라비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러니 괜한 헛물켜지 말고 안다비아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테라비스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에델라와의 계약은 그 시작이 정해져 있었고, 서로 간의 의무 역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이 어디인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계약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는 테라비스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