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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세 단어 (60/92)

60화. 세 단어2021.11.26.

  에델라와 샤를리안의 모습을 눈여겨본 것은 테라비스만이 아니었다.

‘이거…… 뭐가 좀 되겠는데?’

비에라 자작은 에델라가 사라져버리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선 샤를리안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에 둘의 약혼식에 갔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루젠타에서 몇 없는 귀족인 데다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엔젤로테 백작 가와 거래를 하던 가문의 후계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사연을 이미 알고 있는 비에라 자작으로서는 조금 전에 자신이 목격한 일이 그저 흘려보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엔젤로테 백작님, 무도회를 잘 즐기고 계시는지요?”

비에라 자작은 샤를리안의 근처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내 ‘젊은 것이 보통내기가 아니로군.’이라고 생각했다.

“아, 비에라 자작님.”

굳은 얼굴로 에델라가 사라져간 방향만 쳐다보고 있던 샤를리안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뒤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무도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군요.”

비에라 자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 젊은 백작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까 싶어서 애가 타고 있었다. 지금 루젠타의 상권은 점점 붉은바람 상단이 주도하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저렴한 가격과 빠른 일 처리로 그들은 빠르게 루젠타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제는 비에라 상단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안다비아와의 무역까지 붉은바람 상단에서 따내게 된다면, 위협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선두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몰랐다.

‘그럴 수야 없지.’

비에라 자작은 샤를리안을 보며 더욱 활짝 웃었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꼬여내야 했다. 감히 평민 출신의 천한 바넬레오 따위에게 루젠타 1위의 자리를 넘겨줄 수 없었다. 그건 비에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엔젤로테 백작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면밀하게 검토해보고 있습니다.”

“아! 검토요…….”

샤를리안의 말에 비에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에라 상단으로서는 제법 파격적인 제안이었건만, 그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처음에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수수료나 물류비를 올리려는 비에라의 속셈을 이미 파악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건 비에라 상단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었으니까.

“엔젤로테 백작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따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좀 가질 수 있을까요?”

“지금 말씀입니까?”

“저야 빠를수록 좋긴 합니다만, 백작님의 즐거운 시간을 빼앗고 싶진 않군요.”

“그럼 내일…… 아니, 제가 내일은 약속이 있을 것 같군요. 모레, 제가 이곳으로 방문토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기왕이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입맛에 맞는 요리를 준비하겠습니다.”

“번거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루젠타의 가정식 맛을 보여드리고 싶은 제 마음이랍니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샤를리안의 허락에 비에라 자작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저 이국의 백작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비에라 상단에도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모레 저녁이 비에라 자작에게는 기회였다. 저 붉은바람 상단을, 평민 나부랭이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기회.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비에라 자작은 그 기회를 반드시 잡을 참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 * 아침에 눈을 떠서 에델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 입술을 만져보는 것이었다.

‘혹시 붓거나, 부르트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만져본 입술이 평소와 같은 촉감이자 그제야 에델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슬쩍 눈을 돌려 옆에서 아직 자는 테라비스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입술도 정상이었다.

‘어제는 뭐에 홀린 것 같았어.’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남들이 자신에 관해서 수군거리는 것을 이미 많이 들었던 에델라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소리를 못 들은 척했던 에델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테라비스에 관해 험담하는 순간, 에델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고, 저도 모르게 테라비스를 옹호하고 있었다. 키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집에서 계약이행을 위해서 하려고 했을 때는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서 하지 못했던 행위였는데, 남의 집 복도에서 그렇게 정신없이 키스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야말로 뭐에 홀리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었다.

‘홀린 걸까?’

정말 에델라가 홀렸다고 한다면, 그녀를 홀린 것은 바로 눈앞의 이 남자였다. 고집 세고, 뻔뻔한, 빨간 머리의 남자. 알고 보면 다정하고, 착한 이 남자. 어쩌면 정말로 홀렸는지도 몰랐다. 에델라는 조용히 옆으로 돌아누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자는 테라비스의 얼굴을 한참이나 더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얕은 숨소리를 듣고, 그 숨소리에 맞춰 테라비스의 몸이 완만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찰나였다. 테라비스의 드리워진 속눈썹이 잠시 움찔하는 것 같더니,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것을 보고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왜 눈을 감았지?’

의문이 에델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의문에 답하기 전에, 이미 그녀는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암~.”

테라비스의 하품 소리와 기지개를 켜는 기척이 들리자 에델라는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왜 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잠자는 테라비스를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테라비스가 곧 씻으러 나가겠지? 그때 일어나야겠어. 혹시 그와 마주친다면 지금 막 일어난 척을 하면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에델라는 조금만 더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테라비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씻으러 나가지도 않았다. 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인기척이 침대 바로 옆자리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뭐지?’

눈꺼풀 아래에서 에델라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밖의 상황을 짐작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답답할 뿐이었다. 혹시 테라비스가 이미 나갔는데,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가 해서 그냥 살며시 눈을 떠볼까를 생각한 순간이었다.

“꿈을 꾸는 건가?”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아직 밖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아직 침대인 것이 분명했다. 눈앞에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분명한 온기가 에델라의 눈꺼풀에 닿았다. 그리고 마사지라도 하듯이 슬쩍 문질렀다. 조금 전에 생각하느라 에델라가 눈을 움직인 것을 테라비스는 그녀가 꿈을 꾸느라 그런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에델라의 눈앞에서 들렸다. 테라비스가 웃고 있다는 걸 에델라는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뭘 보고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 일어나려는 거지?’

테라비스가 일어나서 나가야 눈을 뜰 텐데, 그는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에델라의 눈꺼풀을 문지르고, 이어 손을 좀 더 내려 에델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또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작은 숨결이 에델라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에델라.”

작은 목소리가 에델라를 불렀다. 순간, 에델라는 자신이 깨어나 있는 걸을 테라비스가 눈치를 챈 것인가 싶어서 움찔했다. 하지만 에델라의 잔머리를 뒤로 곱게 넘겨주는 테라비스의 손길은 여전히 에델라가 깰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에델라는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자는 척하는 것은 테라비스를 속이는 것 같았다. 다만, 지금 이 분위기에서 어떻게 눈을 떠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뜨는 것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척 연기하며 눈을 뜨는 것도, 한 번도 그런 연극을 해본 적이 없는 에델라에게는 어려운 과제였다. 에델라가 속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다시 그녀의 앞에 짙게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말랑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에델라의 이마에 닿았다. 그건, 에델라도 아는 그 무언가였다. 천천히 에델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귓불 역시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드디어 테라비스가 침대에서 일어났고, 가운을 입는지 조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뒤에 침실의 문이 열리고, 또 닫혔다. 그제야 에델라는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에델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방금 일어난 일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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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너무 자는 것 아니야?”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 에델라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와 있던 테라비스가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그의 태도에 에델라는 눈만 끔벅였다. 자기도 조금 전까지 침대에 있어 놓고선? 게다가 사실은 에델라보다 테라비스가 더 늦게 일어나지 않았던가? 거기다 조금 전에 자는 척하는 에델라의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까지 해놓고, 저 불순한 말투는 뭐란 말인가?

“잠을 너무 자도 얼굴이 붓는다고.”

테라비스의 말에 제 얼굴이 부었나 싶어서 에델라는 뺨을 만졌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입술이 부었나만 확인했지, 얼굴은 확인하지 않기는 했었다.

“아니, 뭐. 그렇다고 진짜 당신 얼굴이 부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

황급히 테라비스가 자신의 말을 취소하자 에델라는 다시 눈을 끔벅거렸다. 진짜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 음……. 주스 마실래?”

“그래.”

에델라의 시선을 읽은 듯, 테라비스는 괜히 딴청을 피우다 그녀의 잔에 주스를 따라주었다. 자리에 앉아 일단 주스로 목을 축인 에델라는 눈앞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피곤해서인지 그다지 식욕은 돌지 않았다. 샐러드와 과일만 조금 접시에 덜고, 주스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식사를 해볼까 하던 에델라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에델라의 눈에 뜨인 것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나이프로 열심히 양상추를 썰고 있는 테라비스였다.

‘저걸 왜?’

에델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조금 전 테라비스의 태도로 봐선 물어봤자 순순히 좋은 말로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에델라가 그저 조용히 자신의 앞에 놓인 토마토를 포크에 찔러 넣었을 때였다.

“오늘!”

외마디의 비명처럼 테라비스가 소리쳤다. 둘밖에 없는 식당에서 말하는 볼륨으로는 지나치게 큰 소리였다. 에델라는 갑자기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뭔가 단단히 준비한 듯한 표정의 테라비스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에델라가 식당에 오면 이 말을 해야겠다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당신, 예쁘네.”

그게 다였다. 테라비스답지 않게 유려하지도, 화려하지도, 번지르르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단출하고, 꾸밈없는, 담백한 세 단어. 오늘, 당신,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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